00015 15.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변한다 =========================
우리가 자주 다니던 통학로는 생각보다 많은 게 변해 있었다.
주변 건물들이 바뀌었고, 길 아래에 흐르는 하천은 이전에는 없던 산책로가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길거리에는 교복을 입고 바쁘게 뛰어가는 학생들 대신 벚꽃을 구경하러 온 연인과 가족이 가득했다.
잘 알던 것에서 모르는 부분을 발견한 것처럼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이 느껴졌다.
마치 대략적인 테두리만 잡아놓은 스케치에 누군가가 생각지도 않은 독특한 색을 칠해놓은 것 같았다. 나는 붉은 태양을 생각하고 그렸는데, 누군가는 파란 소용돌이로 완성해놓은 느낌.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어울려서 작품을 망쳤다는 불쾌함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두운 그늘에 있어 미처 찾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해준 것 같아 고마웠다.
“오, 생각보다 축제 분위기 나는데. 안 그래, 이쏘?”
“그러게. 이렇게 꾸며놓은 걸 보니까 또 색다르긴 하네.”
무엇보다 이 녀석이 내 옆에 있으니까. 추억의 장소가 변해도, 내 추억을 함께 나누던 녀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낯선 모습에 대한 불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주변이 아무리 낯설게 변해도 내 기억에서 가장 익숙한 녀석은 그대로니까.
우리는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도 구경하고, 각자의 모습으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도 구경하며 벚꽃길을 거닐었다. 물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가판대에서 산 음식을 손에 들고 먹으면서.
“우리 학교 다닐 때도 이런 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늦잠자서 아침 못 먹을 때마다 여기서 사 먹게?”
“응. 엄청 좋지 않아?”
“글쎄다. 내 생각에는 먹는데 정신 팔려서 지각은 떼 놓은 당상이었을걸.”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 도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뛰어다니면서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을 개발하면 대박 나지 않을까”라며 중얼거렸다.
누가 또라이 아니랄까 봐 또 헛소리냐. 근데 …좀 병신 같지만,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저 인간의 해괴한 발상이 마음에 들다니. 요새 계속 붙어 다녔다고, 아무래도 병신력이 전염된 모양이다. 뭐, 그래도 나름 즐거우니 나쁘진 않지만.
확실히 점심시간이 지나니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늘어났다. 여의도만큼은 아니지만, 아까보다는 꽤 붐비는 듯하다.
우리는 복잡한 거리에서 음식을 들고 다니며 먹기가 힘들어 벤치에 앉아 노닥거렸다. 돌아다닐 때와는 달리 이곳저곳을 보는 건 무리지만, 앉아서 부분적인 풍경만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일단은 몸이 편하고, 주변을 좀 더 세세하게, 자세히 볼 수 있으니까.
“앉아만 있는 것도 나쁘진 않네. 먹을 것도 있고, 풍경도 예쁘고. 꼭 신선놀음하는 것 같다.”
도란이도 나와 마찬가지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바쁘다. 뭐가 달라졌느니, 저기 벚나무가 가장 풍성한 것 같다느니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도란이가 옆을 바라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유치원생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벚꽃으로 치마를 만든 것 같은 옷을 입고는 이리저리 폴짝거리는 모습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귀엽다고 느낌과 동시에 옆에서 우울해 하고 있을 녀석이 생각났다. 차마 우울한 녀석을 바라볼 용기가 없어, 그저 말없이 손을 잡아줬다. 다행히 손을 잡자 도란이의 웃음 소리가 들려 한시름 놓였다.
아이는 아무래도 자신의 오빠와 벚꽃잎 잡기 대결을 하는 듯했다. 옆에서 같이 폴짝거리던 남자아이가 의기양양하게 여자아이에게 자신이 잡은 벚꽃잎을 자랑하는 걸 보면 말이다.
“우리도 저거 많이 했었는데.”
“그랬지. 봄만 되면 난리 부르스였지.”
녀석도 줄곧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먼저 얘기를 꺼내는 걸 보면.
생각보다 밝아 보이는 목소리에 안도하고는 그제야 녀석에게로 시선을 돌린 나다. 도란이는 내가 자길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아이들만 보고 있지만.
한참 동안 아이들을 바라보던 녀석이 갑자기 내 쪽을 바라봤다. 예상치 못하게 시선이 마주쳐 조금은 놀랐다. 아주 조금.
“어, 뭐야? 이쏘. 쭉 나만 쳐다봤던 거야? 내 얼굴에 뭐 묻었나. 혹시 잘생김?”
“김은 같은 김인데 못생김이다, 멍청아.”
씨알도 안 먹히는 자아도취 개소리에는 매가 약이지. 녀석의 양 볼에 손을 갖다 대고는 힘을 줘서 꾹 눌렀다. 그러자 붕어처럼 툭 튀어나오는 녀석의 입술. 크, 역시 못났다 못났어.
내 놀림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이 상태로 셀카를 찍겠다며 셀카봉을 꺼내서 찍는 녀석. 그렇게 탄생한 걸작, 적나라하게 녀석의 못생김을 담아낸 셀카를 보고 정신없이 웃은 우리였다. 저거 받아서 메신저 프사로 써야지.
셀카를 보며 킬킬 웃다 보니, 어느새 놀이가 끝난 건지 아까 벚꽃잎을 잡느라 정신없던 남매가 우리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잠시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란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쟤네 보니까 생각난 건데, 왜 그런 말 있잖아. 벚꽃잎이 떨어지기 전에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우리가 잡은 벚꽃잎이 몇 갠데. 이루어졌으면 진작 이루어졌겠지.”
“그거야 당연하지. 애초에 우리는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 떡볶이가 목적이었잖아.”
도란이의 말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우리가 봄만 되면 정신없이 벚꽃을 잡았던 이유는 ‘제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같은 로맨틱한 바람이 아닌, 먼저 잡는 사람에게 떡볶이를 쏘는 내기 때문이었다.
2000원짜리 떡볶이 한 번 얻어먹겠다고, 벚꽃철만 되면 난리법석을 떨었던 우리가 떠올라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도란이 너 그때 꽃잎 잡다가 교복 바지 터져서 아저씨한테 혼났잖아.”
“그러는 자기는 바닥에 굴러서 아줌마한테 먼지 나게 맞았으면서.”
“흥. 그래도 내가 승률은 높거든요. 도란이 너 나한테 지갑 탈탈 털린 거 기억 안 나냐?”
“웃기시네. 그땐 그랬어도 지금은 다를걸. 너랑 나랑 높낮이가 다르잖아.”
“하, 기가 찬다, 진짜. 지가 키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내일모레 30대를 앞둔 우리 둘은 철부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유치한 신경전을 벌였다. 서로의 흑역사를 끄집어내며 싸우던 우리는 그때처럼 벚꽃잎 잡기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그래서 뭐 걸고 할 건데?”
“저기 옆에서 파는 솜사탕. 어때?”
“맘에 드네. 콜.”
금방 잡을 줄 알았던 벚꽃잎은 바람이 세서 그런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몸이 둔해진 건가. 옛날에는 엄청 빨리 휙휙 잡았던 것 같은데. 도란이도 생각만큼 잘 안 되는지 하늘만 쳐다보며 낑낑대고 있다.
그래도 기회를 노리는 자에게 벚꽃잎은 주어지나니. 신중히 한 방을 노려야지.
살랑살랑 내려오는 벚꽃잎 하나를 계속 주시하던 나는 한여름 모기를 잡듯 재빠른 손뼉으로 벚꽃잎을 겨냥했다. 조심스레 손바닥을 살펴보니… 있다! 비록 손힘이 좀 세서 짜부라지긴 했지만….
“야! 란! 이거 봐라. 내가 이겼다.”
“헐. 어디서 짝하는 소리가 난다 했더니 완전 손에 들러붙었네.”
“뭐 어때. 이기면 장땡이지.”
졌다고 툴툴거리는 도란이를 거만하게 바라보는데, 녀석의 머리에 벚꽃잎이 붙은 게 보였다.
“도란, 넌 손보다 머리카락이 운동신경이 뛰어난가 보다?”
“응? 뭔 소리야.”
“네 머리에 벚꽃잎 붙었다고.”
“진짜? 이쏘 누님, 떼 줘.”
평소처럼 힐이 아닌, 걷기 편한 운동화를 신어서 그런 걸까. 알았다고 대답하고 녀석의 머리에 손을 뻗는데 생각보다 키 차이가 꽤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고개를 들어야 눈높이가 맞네.
키가 190인 성준이 옆에 붙어 다녀서 그런지, 얘는 그냥 난쟁이 똥자루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높낮이가 다르다고 허세부린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나보다.
“어, 이소. 너도 붙었다.”
“아, 그래?”
도란이가 떼어주겠다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녀석이 늘 기억하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일까.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하니 자꾸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새삼 깨달은 녀석의 새로운 모습은 주변의 풍경이 달라져서 느낀 새로움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왈칵) 아니에요..끕.... 우리 괜찮잖아요.. 그...그쵸?
[system : 눈물바다가 추가되었습니다.]
*조아라 접속이 안 돼서 수정을 네이버에 올린 소설보다 뒤늦게 했어요.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