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14화 (14/97)
  • 00014 14. 봄에는 벚꽃놀이. =========================

    초기에 안정을 취한 덕일까. 도란이는 사흘 만에 말끔히 나았다. 아플 때만 해도 얌전하던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미친놈처럼 발광하는 중이다. 다행이다 싶어 안도하는 것과 동시에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오는 나다.

    그래도 평소와 달리 웬일로 폰으로 귀찮게 굴지 않길래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안락한 마이홈에 성가신 바퀴벌레가 침입한 듯 불이 환히 켜져 있다.

    …진짜 조항에 남의 집 도어락 따고 들어오기 금지를 넣든가 해야지.

    신경질적으로 문을 벌컥 열었더니 봄만 되면 차트 역주행을 한다는 벚꽃연금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리 집 거실에 펼쳐진 아이러니한 풍경.

    티비에는 여자 아이돌이 음소거가 된 채 상큼함을 뽐내며 춤을 추고, 도란이 폰에서는 벚꽃연금이 울려 퍼지며, 화려하게 부활한 미친놈은 거실 한가운데에서 여자 아이돌의 안무를 따라 하며 벚꽃연금을 열창하고 있다.

    저 인간은 대체 왜 남의 집에서 가요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가수 코스프레를 하는가. 민원이 들어오기 전에 제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날아갈 정도로 어이가 없어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야, 너 대체 남의 집에서 뭐하냐.”

    “오, 내 열정적인 무대를 지켜보는 팬이 있었네.”

    “열정적으로 맞고 싶냐?”

    으르렁대며 엄포를 놓자 티비와 휴대폰 플레이어를 끄고선 다가오는 도란이. 그러고선 환히 웃으며 반갑게 인사한다.

    “욥. 왔어? 크리미한 메타x 연성자?”

    “아 진짜 죽을래? 그만 좀 놀리라고!”

    그날 액체 괴물 뺨치는 죽을 연성한 이후로 심심하면 주머니 괴물 창조자라며 놀려대는 녀석이다. 이렇게 평소처럼 깐족대는 모습을 보면, 그때 얼핏 진지했던 모습은 어쩌면 도란이로 분장한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그것보다 왜 남의 집에 와서 이 난리를 부리고 있는 건데?”

    “벚꽃놀이 하고 싶다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해보고 싶었거든.”

    …그걸 대체 왜 우리 집에서 하냐고. 녀석의 어이없는 말에 상대할 의욕이 바닥난 나였다. 내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하자 도란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쏘, 주말에 한가하지?”

    “아니, 안 한가해. 쉴 거야.”

    “쉰다는 거 보니 한가하네. 벚꽃놀이 가자!”

    “싫어. 꺼져.”

    “아직 벚꽃놀이를 하고 싶다는 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나 보네, 흑흑. 알았어. 온 마음을 담아서 열정적인 공연…”

    그러면서 뒤돌아 거실로 향하는 녀석의 어깨를 황급히 붙잡았다. 이게 진짜 날 집에서 쫓겨나게 하고 싶어서 환장했나. 가자, 가자고! 내 다급한 외침에 사악한 악마처럼 씩 웃어 보이는 도란이다.

    뭔가 녀석의 계획대로 된 것 같아서 상당히 열받지만, ‘너는 이 또라이를 막을 재간이 없단다.’ 라고 평생 쌓인 경험이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젠장.

    “근데 나, 사람 많은 곳 질색이거든? 란이 너도 알잖아.”

    “당연히 알지. 그러니까 사람 많은 데 말고, 우리 본가 근처 하천에 벚꽃길 있잖아. 거기 가자.”

    도란이의 말에 학창시절 때 통학로로 자주 이용하던 길을 떠올렸다.

    본가 근처에는 그럭저럭 잘 조성된 하천이 있는데, 하천 바로 윗길 가로수가 전부 벚나무다. 하천 길이가 꽤 길어서 벚꽃길도 긴데다, 분홍색의 꽃잎이 푸른 하천과 조화롭게 아우러져 경치도 장관이다.

    확실히 거기라면 경치도 아름답고 익숙한 장소라 벚꽃 구경하긴 딱이다.

    게다가 동네 사람들에게나 유명하지, 외부인은 근처 큰 공원으로 빠지거나 잠시 들리는 정도니 사람도 여의도에 비하면 많이 없을 테고.

    흔쾌히 녀석의 제안을 승낙하자, 도란이가 만족스럽게 웃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을 바라보니 역시나 오늘도 장을 보고 온 건지 근처 마트 비닐봉지가 식탁에 놓여 있다.

    도란이가 집에 오는 게 귀찮긴 하지만, 이런 건 좋다니까.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오므라이스가 식탁 위에 놓였다. 하긴, 냉동 볶음밥 위에 다 찢어진 계란 프라이를 대충 올려놓은 내 오므라이스보다 맛없어 보이는 게 이상한 거지.

    우리는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벚꽃놀이를 떠날 계획을 세웠다.

    벚꽃은 금세 져버리는 데다 비가 오면 금세 꽃잎이 후두둑 떨어져 버리니 이왕 정한 거 이번 주에 가기로 한 우리였다.

    본가로 가는 김에 부모님과 함께 놀면 어떨까 싶어 연락했더니, 도란이네 아버지는 해외 공연이 잡혀 안 된다고 하시고, 우리 부모님은 이미 가족 벚꽃 여행 계획을 짜놨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근데 그 집 가족인 저는 오늘 처음 들은 얘기인데요. 흑흑.

    잠시 서글프고 씁쓸한 일이 있긴 했지만, 어찌 됐든 벚꽃놀이 계획을 그럭저럭 짠 우리였다. 계획을 짜자마자 도란이는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아직 이른 시간인데, 얘가 웬일이래. 평소 같으면 밤늦게까지 있을 놈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녀석이 드디어 철이 들어 나를 쉬게 배려하는 건가 싶어 아무 말 없이 배웅했다.

    녀석이 나가고 나니 언제 시끌벅적했냐는 듯, 금세 조용해진 집이다. 한편으로는 조용해서 좋다 싶으면서도 뭔가 허전하다.

    잠깐, 허전하긴 개뿔. 조용해지니까 별 잡생각을 다 하네. 일하자, 일. 나는 식탁에 놓인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겼다.

    그릇을 설거지하며, 벚꽃놀이 갈 때 뭘 입을지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벚꽃놀이 굉장히 오랜만에 하는 거네. 취직한 이후로는 퇴근길에 보는 벚꽃이 전부였으니.

    마지막으로 가본 벚꽃놀이가 언제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요새 도란이 녀석한테 하도 시달린 바람에 잊고 있었는데, 내가 왜 벚꽃놀이를 가지 않았는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하지, 벚꽃놀이만 생각하면 원호 오빠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으니까.

    망할 전 남친 박원호는 북적대는 걸 싫어하는 나와 달리 사람 많은 곳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덕분에 데이트할 때 사람이 많은 번화가나 축제에 가는 일이 잦았다. 사람이 많아 불만이긴 했지만, 그만큼 자상하게 챙겨주는 오빠를 보면 금세 불만이 녹아내렸다.

    사람 많은 곳이 싫은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여러 축제 중 유일하게 벚꽃놀이는 마음에 들었다. 수많은 벚꽃이 만개해 분홍빛 바람을 만들어 사람들과 섞이는 모습이 진짜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흔히들 말하는 사랑은 핑크빛이라는 표현에 익숙해져서일까, 벚꽃잎이 우리의 몸에 사뿐히 내려앉을 때마다 마치 그게 사랑의 증표라도 된 것 같아서 마냥 행복했다.

    그땐, 벚꽃놀이라는 게 좋은 추억으로만 남을 줄 알았는데.

    잠시 잊고 있던 그 인간을 떠올리자 단숨에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고무장갑을 벗은 나는 그대로 침실로 들어갔다. 설거지고 나발이고 하기 싫다. 벚꽃놀이도 가기 싫다.

    …오빠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아파하는 내가 싫다.

    박원호 효과가 이렇게까지 오래 가냐. 설마하니 벚꽃놀이 당일까지 기분이 땅바닥을 기어 다닐 줄은 짐작도 못 했다. 덕분에 벚꽃놀이를 떠나는 차 안에서까지 저기압 상태인 나다.

    ‘도란이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고스란히 내 저기압 상태를 겪어야 하냐고!’ 라고 이성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망할 감성은 가볍게 무시하고 계시는 중이다. 정작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도란이는 내가 저기압이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보이지만.

    이성과 감성의 싸움으로 끙끙 앓고 있다 보니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하천,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타고 넘실대는 벚꽃, 분홍빛으로 물든 거리를 걷는 사람들. 동네 축제이기는 해도 축제는 축제인지 곳곳에 가판대도 보인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보는 봄 풍경에 들뜨기도 하고, 착잡해지기도 하는 나였다.

    어차피 집과 하천이 가까우니 번잡한 하천 주차장 말고, 집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 덕에 학창시절처럼 집 앞에서부터 벚꽃길로 향하는 우리였다.

    학교 다닐 때는 언제나 함께 다니던 거리였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부터는 이 길을 함께 걷는 게 점점 드물어졌다. 그래서인지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대변해주듯 주변 풍경도 익숙한 건물들 사이로 바뀐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마치 기억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 틀린 그림 찾기 테스트를 하는 것 같았다.

    “어, 우리 자주 다니던 분식집 없어졌다.”

    “헐. 그러네?”

    “이소 너, 초딩 때부터 맨날 용돈 타면 저기 출근 도장 찍었잖아.”

    도란이도 나와 마찬가지인지 주변을 둘러보며 어디가 달라졌는지 흥미로운 듯 얘기했다. 조금은 기억하던 모습과 달라진 풍경이었지만, 서로의 추억은 변하지 않고 여전했다.

    우리는 어릴 때의 추억을 하나둘 얘기하며 걸어갔다. 추억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즐겁게 노닥거렸더니 어느 순간 꽁했던 기분이 봄바람에 흩날려 사라져버렸다.

    벚꽃길에 도착한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새 활짝 웃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번주는 특별히 주 3회 연재입니다. 다음 연재는 목요일이에요~

    등장인물은 연애를 하는데, 나는(...) 나만 빼고 다 사랑을 하고 봄노래를 부르네...

    오늘도 재밌게 봐 주세요. :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