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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13화 (13/97)
  • 00013 13. 나한테 시집올래? =========================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도 걱정이 돼서 틈틈이 열을 체크했는데,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점점 높아지는 열에 걱정이 커졌다. 집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야 하나 싶어 기사 아저씨께 부탁드리려 했는데, 도란이가 한사코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그대로 집으로 온 우리였다.

    다행히 열은 높아도 인사불성 상태는 아니라 녀석을 부축하면서 집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 도어락 앞에서 멈춰선 나는 잠시 고민하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녀석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두 놈과 달리, 나는 녀석의 집 비밀번호를 알아도 멋대로 쳐들어간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저들과는 다른 교양 있는 상식인이다.’ 라는 생각에 기초해서였다.

    그렇다고 아픈 놈한테 비밀번호를 누르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으니 오늘은 예외다, 응.

    간신히 침실까지 끌고 가 도란이의 외투를 벗겨주고, 침대에 대충 눕혔다. 나보다 덩치도 큰 데다 옷은 덥게 입고, 몸까지 뜨거운 녀석을 옮기느라 나까지 땀에 흠뻑 젖었다. 잠시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도란이를 째려본 나는 구급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보나 마나 작업실에 있을 거 같은데.”

    보통은 서재라고 칭하는 공간이지만, 녀석은 서재에서 글쓰기, 인형 옷 만들기, DIY 기타 등등을 다 하므로 작업실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그야말로 별에 별 걸 다하기 때문에 다칠 일이 많아서 여러 상비약을 작업실에 구비해놓는 도란이였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화려하게 판을 벌여놓은 게 보였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나무판자, 뭘 만들던 건지 알다가도 모를 굳어버린 지점토, 곧 있으면 완성될 것 같은 프릴달린 인형 옷.

    …아무래도 도란이 약 먹이고 청소부터 해야겠다.

    저절로 나온 한숨을 뱉고서 어질러진 것들을 대충, 한 곳에 쓸어놓고서는 구급상자가 어디 있나 둘러보았다. 컴퓨터 책상 쪽에 하얀 상자가 보인다. 저게 구급상자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니 입구에 십자가 모양이 있는 게 보인다. 럭키!

    상자를 열다가 반짝반짝하는 게 신경 쓰여 고개를 돌렸더니 컴퓨터를 끄지 않았는지 모니터 아래가 빛나는 게 보였다. 이 인간이 전기세 아까운 줄을 모르고.

    컴퓨터 끄는 건 금방이니까 이건 지금 꺼놔야겠다.

    나는 마우스를 잡고 가볍게 흔들어 절전모드가 된 모니터 화면이 보이도록 했다. 글을 쓰다가 나온 건지 모니터에는 워드 프로그램이 그대로 떠 있다.

    슬쩍 봐도 집중하게 될 정도로 녀석의 글은 독자를 빨아 당기는 흡인력이 있었다.

    초고인 듯 아직은 허술한 부분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데도, 허술한 공백은 금세 잊힐 정도로 흥미 있는 글이었다.

    근데 어째 이 글, 평소 쓰던 괴기소설이 아니라 분위기가 몽환적인 게 어째 동화 같다.

    하긴… 대학교 다닐 때, 녀석은 괴기소설 작가가 아니라 동화 작가를 꿈꿨었다. 괴기소설을 쓸 때와 다른 필명으로 동화책을 출간한 적도 있었고….

    녀석이 쓴 동화책은 학교 다닐 때 말고는 읽어본 적이 없는데, 확실히 학교 다닐 때보다 실력이 는 게 보였다. 그때는 허구한 날, 교수님한테 이해가 안 되는 세계관이라며 호되게 까였는데.

    동기들 중에 가장 기본도 없던 놈이 지금은 이렇게 잘 나가는 작가가 될 줄은….

    서툰 초고였지만,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무엇인지 가슴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글자가 만들어내는 세계에 나도 모르는 사이 몰입되어 멍하니 스크롤을 내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닌데.

    다급하게 저장 버튼을 누르고 컴퓨터를 끈 나는 구급상자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화상 연고, 붕대, 반창고, 파스까지 있는데도 약 종류는 보이질 않는다. 약은 다른 데에 두는 건가. 어디 있을까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래도 도란이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침실로 갔더니 도란이가 웅크려 누워서 끙끙 앓고 있었다. 진짜 많이 아픈가 보네. 집에 가고 싶다고 고집부리던 걸 어떻게 꺾어서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는데. 후회와 속상함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나도 모르게 씩씩거리며 녀석의 등짝을 때렸다.

    “…아야. …왜.”

    아까와 달리 목까지 잠긴 도란이였다. 말하는 것도 힘든지 인상이 찌푸려지는 게 보인다. 아픈 애한테 말 시키기도 그렇고, 우리 집에 가서 가져오는 게 낫겠다. 어차피 바로 아래층이니까.

    “잠깐 집에 갔다 올게. …보일러 켜줄까? 물 마실래?”

    “…응.”

    주방으로 가면서 거실에 있는 보일러를 켰다. 그리고는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받아왔다. 협탁 위에 놓고 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저 상태로 혼자 물 마시는 건 무리일 듯싶어, 녀석을 억지로 일으키고는 컵을 조심스레 입에 갖다 대 물을 마시게 했다.

    …어째 엄마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가상연애 다음은 가상 엄마 체험인가.

    도란이를 다시 눕혀놓고는 집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슬쩍 몸에 닿았는데도 뜨거운 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까보다 열이 더 오른 듯 보였다. 전부터 감기에 걸리면, 유독 열이 심하게 나는 도란이였다. 그것 때문에 어릴 때 몇 번 응급실에 다녀온 적도 있는 녀석이라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급한 마음에 잠자고 있던 운동신경을 발휘해 계단을 모조리 뛰어넘다시피 해서 내려왔다. 학창시절 이후로는 거의 시도 안 해본 스킬인데도 무사히 성공!

    크, 권이소 아직 안 죽었네. 만약 도란이가 이걸 봤다면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할 게 뻔하지만, 지금은 잔소리할 사람이 뻗어 있는 상태니….

    누워있는 녀석의 모습만 떠올리면 한숨이 푹푹 나온다. 아, 한숨 쉬면 빨리 늙는다는데. 녀석 때문에 노환을 앞당길 수는 없지. 노환 촉진은 또라이 짓 받아주는 거로도 충분하다고.

    후다닥 집에 들어와 장식장 위에 있는 구급상자를 뒤졌다. 다행히 2알 정도 남은 해열제와 감기약이 있다. 이 정도면 지금 당장은 먹일 수 있겠다. 그리고 몇 도인지 재봐야 하니까 체온계도 챙겨가야지.

    이것저것 빠르게 챙긴 나는 계단을 두세 개씩 껑충껑충 뛰어서 도란이 집까지 올라왔다. 운동신경은 그대로인데 체력은 퇴보했는지 숨이 찼다. 폐와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후하고 크게 숨을 내뱉은 뒤 녀석의 집 문을 열었다.

    신발도 대충 던져놓고 침실로 뛰어온 나는 집에서 가져온 체온계를 녀석에게 갖다 댔다. 39.4도. 예상했던 것처럼 높았다.

    “으, 진짜 이 똥 멍청이가.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응, 아파.”

    “지금은 알고 있으니까 말할 필요 없거든! …다 낫기만 해봐라. 신명 나게 때려줄 거야, 아주.”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그래도 환자에게 폭력행사는 안 된다는 이성의 외침에 주먹을 내려놓았다. 주머니에서 해열제를 꺼내 먹이려다가 문득 빈속에 약을 먹으면 안 좋다는 말이 떠올랐다.

    녀석이 먹은 건 나초밖에는 없는데. 게다가 그거 먹은 지 3시간은 넘게 지났고. 빈속이라고 하기에 모호한 상태라 어쩔까 고민하다가 이왕 병간호하게 된 거, 제대로 해줘야겠다 싶어 죽을 끓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근데 나 요리 젬병이잖아. 잘할 수 있을까.

    불현듯 싹튼 불안감이 내가 만든 참담한 요리를 보고 “너 그럴 줄 알았다”라며 킬킬 비웃을 것 같지만, 쌀죽 정도면 간단하니까 나도 할 수 있겠지! 엄마나 도란이가 하는 거 보면 이리저리 뚝딱뚝딱하니까 만들어지던걸, 뭐.

    그렇게 근자감이 폭발해 쌀죽이라는,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는 요리를 시도한 나는 10분 정도 지나고 나서 그야말로 패닉상태에 도달했다.

    …양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쌀이 너무 안 익는다.

    게다가 물 조절을 중간에 실패해서 몇몇 쌀은 백미가 흑미로 진화해버렸고. …아니, 이건 퇴화인가. 일단 제목이 죽이긴 한 요리에서 스멀스멀 탄내와 생쌀 냄새가 섞여서 풍겨 나왔다. 조심스레 한 숟갈 입에 떠서 넣었는데 …젠장. 역시 하나도 안 익었어.

    이 죽을 가장한 약간 타버린 생쌀 요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애는 아프고 약은 바로 먹어야 하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아픈 애한테 이런 걸 먹일 수도 없고.

    한참 동안 죽을 저으며 고민하던 나는 일단 쌀을 적당량 덜어놓고 작은 냄비에 다시 끓이기로 결론지었다. 역시 손발이 나빠도 머리가 좋으면 금방 헤쳐나간다니까.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지에 절로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계획을 실행에 옮겼더니 생각보다 양이 적어 보인다. 엄마의 큰손이 나한테 고스란히 옮은 걸까. 살면서 요리를 안 해봤으니 알 턱이 있나. 잠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다가 쌀밥을 더 넣으면 되겠다는 해결책을 떠올렸다.

    부랴부랴 밥솥을 확인해보니 밥이 남아있었다. 좋아, 진작 쌀 말고 밥으로 죽을 할걸. …하고 생각했었지만, 이내 내 참담한 요리 실력은 어떤 재료를 추가해도 요리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생쌀과 쌀밥의 콜라보. 아니, 부분적으로 까맣게 탄 생쌀과 죽이 아니라 풀이되어버린 쌀밥. 한입 맛보는 순간,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찰싹 달라붙고, 입안에서도 죽을 가장한 풀이 쩍쩍 소리를 내며, 그대로 삼키려고 하면 느껴지는 생쌀의 바삭함.

    이건 죽이 아니라 재앙이다. 어떻게 해야 나아질지 짐작도 안 돼. 그래도 혹시나 하며 물을 좀 더 붓고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열심히 저었다.

    “뭐해.”

    “…어?”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냄비를 쏟을 뻔했다. 다행히 뒤에 서 있던 도란이가 빠르게 냄비를 바로 잡아서 쏟아지지 않았다.

    “화상 입을 뻔했잖아. 불 앞에서 조심해야지. 뭐 하고 있어.”

    “어, 그… 너한테 죽이라도 끓여줄까 싶어서.”

    내 말에 냄비에 담겨있는 하얀 물체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는 도란이. 응, 너도 믿기지 않겠지만, 일단은 이거 죽이라고 시작한 음식이란다.

    가스 밸브를 잠그고 온 도란이가 숟가락을 가져오더니 한술 뜨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액체 괴물처럼 끈적거리는 점성을 자랑하며 쭉 솟아오르는 내 창조물.

    “봤냐. 내가 이 정도다.”

    그야말로 자포자기한 내 말에 도란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들리는 웃음소리에 참다못해 작작 웃으라며 한소리 하려 했는데, 녀석이 웃음을 멈추고는 그릇에 내가 만든 죽을 담는다. 그 모습에 놀라서 다급하게 녀석을 말렸다.

    “…야, 너 뭐해! 내가 만들긴 했지만, 이건 사람이 먹을 만한 게 아니야. 그냥 밥 조금 남은 거 줄게.”

    “됐어. 그냥 이거 먹을래. 좀… 메X몽 먹는 기분이 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네가 생각해서 만들어 준거잖아.”

    생긋 웃고는 식탁으로 가서 진짜로 먹기 시작하는 도란이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왠지 꼭 아픈 애 벌칙게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싹튼다.

    아, 몰라. 매도 같이 맞는 게 낫다고, 나도 먹어야겠다. 나도 그릇에 죽을 담고는 녀석의 맞은편에 앉아 죽을 먹기 시작했다. …으, 진짜. 내가 죽을 또다시 시도하면 사람이 아니다.

    말없이 죽을 먹고 있는데 도란이가 잘 먹었다고 인사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릇을 살펴보니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내가 협탁 위에 놓아둔 약을 가져온 건지, 정수기에서 물을 떠 와 약을 삼킨 도란이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왜 웃고 난리야?”

    “…아니, 너 매일 이상형이 요리 잘하는 남자라고 그랬잖아. 새삼 왜 그런지 알 거 같아서.”

    “너 그거 무슨 의미냐?”

    “뭐긴 뭐야. 남편까지 요리를 못 한다면 그 집안은 필수불가결 적으로 외식문화에 길들겠다는 소리지.”

    어쭈, 이게 골골거리던 게 좀 나아졌는지 기껏 간호해준 사람을 놀려? 죽을 먹다 말고 벌떡 식탁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녀석의 배를 주먹으로 연신 가격했다. 물론, 아픈 환자니까 아주 살살.

    “아, 뭐! 요리야 잘하는 남편 구하면 되는 거지! 내가 돈 벌어오고! 남편이 살림하고!”

    “그러니까 …나한테 시집올래?”

    도란이가 자기 배를 때리던 내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언제나 내뱉는 개드립이라 생각하고 넘기려는데, 아파서 그런 걸까. 평소와 달리, 반쯤 감긴 눈에서 장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잠깐 주춤했지만, 괜히 어색해질까 싶어 손을 빼는 나다.

    “웃기시네. 아프니까 별 헛소리를 하고 있어.”

    “응, 그러게. 진짜 아픈가 보다. 나 좀 누워있을게.”

    “…어.”

    도란이가 들어간 침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먹으면서도 아까 상황이 떠올라 기분이 이상하다. 경험상, 싱숭생숭할 때는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게 최고지. 대충 죽을 입안으로 쑤셔 넣고는 집 정리에 신경을 쏟는 나였다.

    ============================ 작품 후기 ============================

    간만에 엄청 많은 분량 :D 2부로 나눌까 하다가 끊으면 흐름도 끊길 것 같아 길게길게~ 올립니다. 만우절 개드립 외전을 올릴까했지만, 힘들어서 포기. (TㅅT) 오늘도 재밌게 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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