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10. 5년차 커플, 28년차 친구 =========================
잠깐 수다를 떨다 다시 청첩장 고르는 데에 열중한 우리는 세 가지 최종 후보 중에서 가장 깔끔한 디자인의 청첩장으로 결정했다.
참고로 도란이가 직접 제작한 청첩장은 친지 어른께 전하기에는 뭣한, 지나치게 해괴한 디자인이라 광탈.
성준이에게 얘기해줘야겠다며 다혜가 폰을 꺼내 들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액정을 바라본 다혜의 얼굴에서 꽃이 피는 것도 그렇고, 평소보다 더한 애교가 장착되는 걸 보니 딱 봐도 성준이 전화다.
전화를 받는 다혜의 목소리에서 성준이를 향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예쁘게 사랑한다 싶어 흐뭇한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응, 나 지금 이소 언니랑 같이 있어. 응? 여기가 어디냐면….”
장소를 얘기하던 다혜는 애교스럽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성준이도 여기로 올 건가 보다.
레모네이드는 이미 다 먹은 지 오래인데, 성준이도 오니까 마실 거 하나 더 사야겠다. 들어오면서 봤던 봄철 신메뉴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다혜가 웃으며 통화내용을 보고했다.
“성준 오빠 이쪽으로 온대. 도란 오빠도 같이 있다는데?”
다혜의 입에서 나온 인물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인간은 왜 심심하면 성준이랑 어울리는 거야. 가만 보면 성준이랑 다혜가 같이 있는 시간보다 둘이 노는 시간이 더 많아 보인다.
이러다 신혼집에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가서 놀자고 진상부리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정말.
“걔는 왜 또 거기 있는 거야?”
“오빠한테 야광봉이랑 부채 빌렸던 거 돌려주러 왔다나 봐.”
순간 도란이가 며칠 전에 야광봉을 쌍으로 들고 광분하는 셀카를 보냈던 게 떠올랐다. 웬 건가 했더니 역시나 성준이 거였네. 여러모로 둘 다 답이 없다니까. 저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말만 들어서는 금방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30분이 넘어서야 도착한 두 녀석.
카페 안으로 들어온 성준이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빨리해 다혜의 앞으로 왔다. 다혜도 예비신랑이 온 게 그리 좋은지 얼굴이 환해졌다. 귀여워.
“우리 다요미. 청첩장 고르느라 수고했어.”
“아냐, 이소 언니 덕분에 금세 골랐어. 이걸로 정했는데 괜찮아?”
“나야 우리 자기가 좋다면야 뭐든 상관없지.”
오자마자 닭털을 풀풀 날리네. 역시 간접적으로 목소리만 듣는 거랑 눈앞에서 3D로 보는 건 차원이 다르다. 왠지 모르게 옆구리가 시려 온다. 젠장.
안 보는 게 상책이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도란이가 인사를 건넸다.
“욥”
“왔냐.”
언제나 그렇듯 심플한 인사를 하고서 내 옆자리에 앉은 도란이는, 1년 만에 만난 견우와 직녀처럼 반가움에 겨운 애정행각 중인 두 사람을 영혼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도란이의 저 모습이 조금 전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측은함과 씁쓸함이 동시에 몰려온다.
한참을 닭털 날리던 커플은 이제야 우리 둘에게 인사를 건넨다.
“김성준, 암만 다혜가 좋다지만, 11년 지기 친구한테 도착한 지 10분이 넘어서야 인사를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똥 씹은 얼굴로 인사를 하는 나와는 달리, 도란이는 밝게 웃으며 다혜에게 인사했다.
“안녕, 4반 깜찍이. 6반 멋쟁이랑 인사는 끝났어?”
“아, 정말. 그만 놀려, 도란 오빠. 그렇게 부르지 마라니까.”
도란이 녀석의 인사에 장난스럽게 툴툴대는 다혜였다.
○반 ○○이는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유행했던 유행어인데, 도란이가 그걸로 두 사람에게 개드립을 치는 바람에 한동안 둘의 별명이 4반 깜찍이와 6반 멋쟁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두 사람을 종종 저렇게 부르는 도란이다.
깜찍이라고 할 때마다 부르지 말라고 투덜대는 다혜지만,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지, 정말 싫어하는 건 아니다. 순한 성격이기는 해도 싫으면 싫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게 다혜니까.
그러고 보니 녀석이 만든 청첩장에도 깜찍이 멋쟁이라고 적혀있었지.
나는 테이블 한쪽에 놓인 청첩장을 쳐다봤다. 80년대 순정만화 캐릭터와 복고풍 영화 포스터가 합쳐진 것 같은 병맛스러운 디자인. 일반적인 청첩장과는 한참 벗어난 녀석의 청첩장을 보니 저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넌 왜 청첩장을 저딴 디자인으로 만들어서 준 거야. 만들어줄 거면 좀 제대로 만들지.”
“왜, 딱 쟤네 같고 좋은데.”
그건 욕이냐 칭찬이냐. 무슨 의미야, 대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는 나와 달리 다혜는 도란이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더니 정말 마음에 드는지 도란이가 만든 청첩장을 따로 챙기며 말했다.
“오빠가 만들어준 청첩장은 어르신들께 돌리긴 좀 그럴 것 같아서 청첩장으론 못 쓸 거 같고, 대신 내가 따로 소장해도 돼?”
“너네 주려고 만든 건데 소장해도 상관없지. 아니면, 친한 지인한테는 내가 만든 청첩장으로 보내는 건 어때?”
“앗, 그러면 되겠다! 그럼 언니랑 오빠한테는 이걸로 보내줄게.”
“아니, 됐으니까 난 평범한 걸로 보내줘.”
눈을 반짝이는 다혜에게 양손으로 엑스자를 만들며 말했다. 단호박 같은 내 거절에 동시에 뾰로통해진 두 사람이었다.
미안, 다혜야. 난 저걸 받고 싶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단다.
그리고 도란이 너는 사랑이 식었다느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 좀 작작해줄래? 너를 향한 내 사랑의 온도는 처음부터 영하였거든? 애초에 식을 것도 없어.
하지만,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도란이의 되지도 않는 개드립이 이어질 것을 알기에 무관심으로 응대했다.
악플보다는 무플이 무서운 법이라고, 내가 헛소리에 반응하지 않자 다시 다혜와 얘기하는 도란이다.
"어쨌든 내가 청첩장도 제공했으니 커피 정도는 사줄 거지?"
“물론이지, 오빠. 뭐 마시고 싶어?”
“…음, 이 카페는 처음 와봐서 뭐가 맛있는지 모르는데.”
도란이는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입맛이 까다로워서, 자기 취향이 아니면 아무리 비싼 거라도 입에 대질 않는다. 괜히 이상한 걸 시켰다가 돈만 날리면 아까우니 대충 녀석의 입맛에 맞는 걸로 추천했다.
“키위 스무디 먹어. 딱 네 취향일걸.”
“오케이. 그걸로 결정.”
도란이가 뭘 마실지 정하자 성준이가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도란이가 내가 시킨 라떼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쓰던 빨대로 라떼를 약탈하는 녀석. 하여튼 이 자식은 내 거 뺏어 먹는데 도가 텄어요.
“뭐야, 평소처럼 새콤한 거 마시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신메뉴라길래 시켜 봤어.”
“오, 신여성. 근데 네가 좋아할 만한 맛은 아닌 것 같은데.”
“응, 좀 많이 단 거 같아.”
생각보다 신메뉴가 별로라며 도란이와 얘기를 나누는데,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혜의 시선이 느껴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의미심장한 눈빛이라서 왜 그러는지 물으려는데, 성준이가 주문한 음료를 들고 왔다.
도란이는 키위 스무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내 라떼와 자기 스무디의 위치를 바꿨다.
“이게 라떼보다 네 취향에 가깝네. 네가 이거 마셔.”
“응, 땡큐.”
확실히 라떼는 내 취향이 아니지만, 도란이 입맛에는 얼추 맞으니 괜찮은 교환이었다. 이 집 키위 스무디는 단맛이 강하긴 해도 라떼보다는 새콤하니까. 성공적인 교환에 만족하면서 키위 스무디를 마시는데 성준이가 내가 마시던 라떼에 호기심을 가졌다.
“왜. 이거 무슨 맛인데? 맛없냐?”
그러면서 내가 사용했던 빨대에 입을 갖다 대려고 하는 성준이를 보고 놀라서 다급하게 제지했다.
“미친놈아! 내가 썼던 빨대니까 마실 거면 빨대에 입대지 말고 종이컵 가져와서 덜어 마셔.”
“엉.”
내 말에 순순히 종이컵을 가지러 가는 성준이를 보고 한숨 돌렸다. 하여튼 저 인간은 무신경한 건지, 부주의한 건지. 고개를 저으며 키위 스무디를 드는데, 다혜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 보면 우리보다 더하다니까.”
“뭐가?”
“응? 아무것도 아냐, 언니.”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다혜. 이유 모를 다혜의 웃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키위 스무디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 작품 후기 ============================
쓸 때는 긴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까 분량이 짧네요, 오늘도 재밌게 봐 주세요 :)
짐승님, 매번 코멘트 달아주셔서 감사해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