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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6화 (6/97)
  • 00006 6. 잊지 못하는 나쁜 놈. =========================

    전 태권도 국가대표이자,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엄마와 경호원 출신으로 지금은 은퇴하고 교수로 일하고 있는 아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흔히들 말하는 여성스러움과는 태어나면서부터 거리가 멀었다.

    인형 옷을 입히며 노는 대신 태권도복을 입고 발차기를 했으며, 마법 소녀나 동화 속 공주님들을 보며 동경하는 대신 전대물이나 로봇이 나오는 만화를 보면서 부모님과 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여자애다운 놀이를 했던 적도 별로 없었다. 남자애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놀기 바빴고, 여자애들은 나와 잘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 장난이 심했던 남자애들과 나를 한 무리로 인식했기 때문인 듯했다.

    내가 소꿉놀이라든가, 인형 놀이 같은 걸 했던 건 도란이와 놀 때뿐이었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되지 않지만, 어렸을 적의 도란이는 작고, 여리고, 소심했다. 그래서 다른 남자애들에게 놀림당하기 일쑤였고, 나를 제외한 여자애들에게는 말도 못 건넬 정도였다.

    이웃사촌으로서, 소꿉친구로서 도란이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나는 도란이와 자주 놀았고, 주변에 또래들이 있으면 도란이가 주눅이 드는 탓에 서로의 집에서 노는 게 일상이었다. 집에서 놀만 한 것을 찾다 보니 하게 된 게 역할놀이나 인형 놀이였다.

    그때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여자애 같지 않다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도 없었던 데다 여자애들이랑 놀지 못하더라도 내 주변에는 언제나 같이 놀 애들이 넘쳤고, 태권도를 한다는 얘기가 퍼져 고학년도 쉽게 건들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태권도를 배웠던 것도, 내가 다른 여자애들과 다른 것도 전혀 싫지 않았다. 몇 번 시비에 휘말려 싸웠을 때마다 번번이 이겼고, 괴롭힘당하는 애들을 구해준 적도 있어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키가 점점 커질수록 그런 시선들이 나를 옭아맸다. 으레 사춘기 여자애들이 그렇듯, 나도 커가면서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들에 관심이 커지고, 추상적인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그래서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순정만화며, 잡지나 문학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새로운 세상이 내 눈 앞에 펼쳐지고, 다른 사람의 상상을 엿보는 것 같아 기분 좋았다. 잡지에 나오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눈을 즐겁게 해서 행복했다.

    나는 이런 새로운 세상이 마음에 들었지만, 타인은 새로운 내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머슴 같은 내 모습만을 원래의 내 모습이라고만 여기며, 프레임을 씌웠다. 내가 순정만화 같은 걸 읽으면 유치하다며 놀렸고, 원피스라도 입는 날이면 옆에서 여장했다며 놀려댔다. 그리고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연애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여자답지 않은 친구로만 좋아할 뿐, 이성으로 사랑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중학교를 여중으로만 입학 지원을 했다. 여자애들 틈에 있으면 그런 시선이 사그라들 것 같아서.

    확실히 내 예상은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졌지만, 겉으로는 어울리는 척해도, 뒤로는 내 성격과 안 어울린다며 뒷담을 하는 일이 잦았다.

    내게 씌워진 프레임을 벗겨내려 발버둥 치던 나는 결국은 세상의 눈에 패배하고 그들이 보는 대로 굴기로 했다. 좋아하는 순정만화도 다락방 위에 숨겨놓고, 예쁜 원피스나 액세서리도 손이 닿지 않는 수납장에만 넣어두고 입지 않았다.

    어렸을 때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취향을 숨기고 털털한 모습만 보여줬다. 남자친구는 꿈도 못 꿀 거로 생각했지만, 뜻밖에 생기긴 생겼다. 다만, 그들은 내가 꿈꾸던 달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인이 아니라 편한 친구로만 여기는 연애. 지내다 보면 나를 연인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자신을 이해해주는 동성 친구로 여기는 것 같아 금세 헤어졌다. 그들이 나를 동성 친구처럼 여겼다는 게 착각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내게 예쁘다, 사랑스럽다 같은 여자친구에게 할 만한 칭찬은 해주지 않았으니까.

    쑥스러워서 못한다는 느낌과는 달랐다. 나는 그런 수식어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선머슴처럼 굴던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긴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한 번쯤은 내 본연의 모습을 보고 예쁘다고 해주는 운명의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생 무렵, 그런 사람이 운명처럼 내게 나타났다.

    “이렇게 보내면 돼?”

    “이쏘?”

    “왜 대답이 없어, 이거 아냐? 다르게 말해? 더 붙여야 돼?”

    도란이가 이런 식으로 보내면 되냐고 내 폰으로 계속 메신저를 보냈다. 불현듯 떠오른 그 사람의 얼굴에 갑자기 모든 게 차게 식는 것 같았다. 급격히 피로감이 느껴져, 대충 그렇다고 대답해주고 상황극을 마무리했다.

    소개팅 시간과 장소까지 정하는 걸 보고 폰을 내려놓았다. 시간은 좀 이르지만, 그냥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었기에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누우면 금세 잠이 올 피로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가만히 있는데도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누웠더니 그 개자식 생각이 계속 아른거리는데.

    내가 운명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다고 생각했던 남자.

    그리고… 유학 간다고 해놓고선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긴 나쁜 개자식.

    처음에는 연락이 오지 않자 걱정이 앞섰다. 혹시 타국까지 나가 잘못된 건 아닐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어 초조했다. 개자식의 부모님이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되니 용기를 내어 전화했었다.

    답은 무사히 잘 있다는 것, 그리고 남의 아들 저주하느냐면서 따라오는 욕지거리는 덤이었다.

    욕은 좀 먹었지만,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욕은 좀 먹었지만, 내가 욕먹은 만큼 오빠가 미안함을 느끼며 잘해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저 갑작스러운 타국 생활에 바쁜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차분하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럴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연락이 끊겼을 당시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동안은 사람처럼 살지 않았던 것 같다. 술에 취해 오빠의 이름을 부르기 일쑤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지겹고 겁이 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하루하루 망가져 갔다. 모든 걸 놓아버릴 생각까지 했었다. 목숨이든, 사람 관계든 모두.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를 다독여주었고, 지금은 그럭저럭 평범하게 생활하게 되었다.

    여전히… 연애는 못 하겠지만.

    내가 연애를 못 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또다시 배신당할까 봐 겁이 나서가 아니다. 우습게도… 내가 다른 사람을 오빠만큼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오빠만큼 사랑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다.

    …나는 그렇게 당해놓고 아직도 오빠를 잊지 못하고 있다.

    더욱 심란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했다. 점점 몽롱해지는 정신,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나는 멍청하게 나를 버린 박원호의 이름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봄봄봄, 봄이 오네요. 꽃샘추위라는 말이 들리는 걸 보면요. 새로운 계절이 다가온다는 소식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날입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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