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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5화 (5/97)
  • 00005 5. 시작부터 까이고 싶냐? =========================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성준이와 나는 첫 만남을 어떤 식으로 시작하는 게 좋은지 의논했다. 그런 우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어느덧 다 식어버린 새우들을 주섬주섬 입에 넣던 도란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들 고민이야?”

    “중요하지, 이 자식아!”

    “첫인상이 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 거 모르냐?”

    “…흠, 아! 날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 이런 거?”

    나와 성준이의 타박에도 여전히 심드렁한 반응이던 도란이 녀석은 한참을 생각하다 깨달았다는 듯 유치찬란한 드라마나 순정만화에서 나올 법한 멘트를 꺼내 들었다. 세상천지에 어떤 인간이 맨정신으로 그딴 말을 하겠냐고.

    성준이와 나는 도란이의 말에 땅이 꺼지라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성준이는 눈앞에 있는 연애 고자에게 진지하게 충고하기 시작했다.

    “…아니, 얀마. 그건 M 성향이어야 가능한 멘트잖아. 어, 잠깐만. 어떻게 보면 상대가 M인지 알 수 있는 것도 첫인상 중 하나인가?”

    오, 신이시여. 이 답도 없는 생명체 둘을 어찌하면 좋나이까.

    늘 느끼는 거지만 성준이 저 자식도 사고회로가 좀 이상해. 저 자식이 대체 무슨 수로 여태껏 연애를 해왔는지 미스터리다. 게다가 몇 개월 후면 결혼하는 예비신랑이라는 사실이 더 기가 막힌다.

    다혜야, 넌 정말… 대단한 아이야. 아니면 취향이 상당히 마니악하거나.

    나는 저 준(準)또라이와 5년째 연애 중인 후배를 떠올리며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한 사이, 어느덧 대화주제가 ‘첫 만남의 중요성’에서 ‘효과적으로 호감을 살 수 있는 상대를 때리는 법’으로 바뀐 두 사람이었다.

    “미친놈들아, 제발 좀 딴 데로 새지 마. 첫인상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만났는지에 따라 연애의 초반 분위기가 달라지니까 첫 만남이 중요하다고. 예컨대 소개팅으로 만났나, 우연하게 만났나, 오래 알고 지내다 연인으로 이어졌나.”

    “우연하게 만나는 건 뭐 어떻게 만나는 거야. 식빵을 물고 가다가 부딪힌다든가, 서류더미를 들고 가다 부딪힌다든가 뭐 그런 거? 식빵 사올까?”

    다음에 저 자식 집 들리면 반드시 순정 만화책 싹 다 불태워버린다.

    “야! 순정만화도 아니고 그렇게 만나는 게 흔한 일이냐? 왜 아까부터 순정만화에서 벗어나질 못하는데!”

    “통계적으로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이니까 클리셰가 된 게 아닐까 싶어서. 근데 그게 그렇게 확률이 낮아? 외계인이 애인인 확률이랑 순정만화 같은 만남이 일어날 확률이랑 비슷해?”

    “븅신아, 그걸 굳이 말해야 아냐? 당연히 후자가 조금 더 높겠지. 외계인이 지구인이랑 사귀려고 하겠냐?”

    이제는 ‘외계인이 인간과 연애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회가 열렸다. 대체 김성준 저 자식은 도와주려고 하는 거냐, 방해하려고 하는 거냐. 이 자식들이랑 있다 보면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 같다.

    도란이 녀석한테 협조하다간, 물 없이 퍽퍽한 고구마 먹기 기네스북에 오를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내 윤택한 미래를 위한 거금이 걸려있기에 다시금 바스러진 멘탈을 추스르고는 상황을 정리했다.

    “아, 진짜 좀 닥쳐봐. 이것들아! 그냥 무난하게 소개팅으로 만나는 거로 하자. 지금 도란이 너한테 가장 가능성 있는 건 그거니까.”

    “왜 하필 재미없게 소개팅인데? 우연히 만나는 상황극 같은 거 해보고 싶은데!”

    “내가 봤을 때 넌 글렀어. 그나마 누가 주선해준다는 강제성이라도 있어야 네 연애에 그나마 개미 똥 같은 확률이라도 증가할 것 같다.”

    진심이 가득 담긴 묵직한 팩트 폭력에 체념한 듯 고개를 힘겹게 끄덕이는 도란이였다. 옆에서 성준이가 “잔인하다.”라고 중얼거렸지만, 이를 갈며 째려보자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척한다. 박쥐 같은 놈.

    결국, 첫 만남을 소개팅 상황극으로 결정한 우리였다. 소개팅을 하려면 사전에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중요하다는 핑계로 녀석들을 쫓아냈더니 집안이 조용해졌다.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나 혼자만의 달콤한 휴일을 맛보게 되다니.

    두 또라이에게 시달린 덕에 몸도, 정신도 피곤해서 이대로 자고 싶었지만, 조금 뒤에 상황극을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걸로 피곤을 풀기로 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자마자 노곤함이 녹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씻고 나와 도란이가 준 폰을 확인해봤더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준비 중인 건가 싶어 티비를 보면서 틈틈이 확인하는데도 여전히 답이 없다. 시계를 보니 상황극을 시작하기로 한 시간에서 20분이나 지나 있었다.

    “얘 대체 뭐하는 거야, 설마 내가 먼저 시작하길 바라는 건가?”

    잠시 고민하다가 먼저 메신저를 보냈다. 상대가 도란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기대감이 전혀 없는 것도 모자라, 28년 동안 단 한 번도 녀석에게 써본 적이 없는 존댓말을 쓰려니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차마 스마트폰 액정을 보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데, 메신저 알람이 들렸다.

    “네, 안녕하세요.”

    오, 스타트가 나쁘진 않은데? 시작부터 썩은 개드립 날릴 줄 알았는데. 짧은 인사 한마디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다니 녀석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바닥인지 새삼 알 수 있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이 자식…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저 인사 말고는 연락이 없다!

    뭐하자는 거야, 이 자식이 진짜!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아니면 저거 달랑 보내놓고 잠들어 버린 건가? 나는 자기 때문에 피곤한데도 이렇게 깨있는데? 내 폰으로 “너 설마 자고 있냐?”라며 분노에 차오른 메신저를 보내자, 자는 건 아닌지 칼답장이 왔다.

    “아니, 안 자는데?”

    “안자면 계속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거 아냐! 인사만 달랑하고 뭐하는 거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음. 성준이한테 물어봤더니 나에 대해 소개하라는데 자소서라도 써야 하나?”

    너 지금 연애가 아니라 취직 상황극 하냐? 구애가 아니라 구직이 목적인 거냐? 연애 고자라서 그러는 건지, 발상 자체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놈이라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전자든 후자든 터지는 건 내 속이라는 것.

    자소서는 필요 없으니까 대충 소개만 하라고 하자 “ㅇㅋ” 라고 빠른 답장을 하더니 소식이 없다. ‘이 자식이 또 무슨 헛짓거리를 하려고’ 라고 불안이 싹트기도 잠시, 메신저 음이 울렸다. 재빨리 확인해보니 장문의 메신저가 나를 반겨주었다.

    “이름은 도란, 나이는 28세. 직업은 작가고, 가족관계는 아버지랑 저 둘이 있고, 초등학교는 어디를 나오고, 중학교는 어디 남중을 나왔으며, 고등학교, 대학교는 어디 어디에 나왔습니다. 군대는 육군 ○○ 부대 출신으로…”

    보자마자 “미친놈아, 인생 회고록 쓰냐?”라고 메신저를 곧바로 보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서 다시 내 폰으로 분노에 가득 찬 조언을 보냈다.

    “그딴 쓸데없이 장황한 인생소개 말고, 직업이나 나이 정도만 보내라고! 그런 다음에 ‘주선자한테 소개 잘 받았습니다.’ 같은 식상한 인사 정도만 하면 간단하게 끝나잖아!”

    “오올, 알았어.”

    왠지 모르게 자신감에 가득 찬 도란이 녀석의 얼굴이 상상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내 조언대로 직업, 나이만 소개하고, 내가 말한 식상한 인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보냈다.

    아까보다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이건 뭐랄까.

    가상 연애가 아니라 마치 말 가르치기 프로그램이 내장된 가상의 존재와 채팅하는 것 같다. 골뱅이같이 생긴 머리칼 달고 있는 노란 뚱땡이, 코드 네임 심x이.

    그대로 따라 하지만 말고 뭐라고 덧붙이라고 할까도 싶었지만, 녀석의 또라이성이 덧붙여져 말짱 도루묵이 될까 봐 꾹 참은 나는 그다음에는 서로의 사진 공유를 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녀석에게 자연스럽게 유도하게 시킬까 싶었지만, 또 이상한 헛소리를 해댈까 봐 그냥 시범을 보였다.

    “그럼 저희 사진 공유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서로 얼굴도 모르면 만나는데 곤란하잖아요.”

    “아, 네. 잠시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도란이 녀석이 셀카를 올렸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 자식 셀카 하나만큼은 기막히게 잘 찍는다. 카메라가 만들어낸 미남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실물을 철저히 미화시킨 녀석의 셀카에 존경을 표하며, 어떤 사진을 올릴지 갤러리를 뒤지기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내 폰에 저장된 사진을 도란이 폰으로 전송해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잠시 고민한 나는 이런 상황극에 그런 성의를 굳이 발휘해야 하나 싶어 대충 셀카를 찍어 녀석에게 보냈다. 어차피 내 생얼이고, 뭐고 다 본 녀석인데 뭐가 문제람.

    “머리에 칭칭 감긴 촉촉하게 젖은 수건이 뜨거운 사막의 석유 재벌을 연상케 하네요. 부르주아의 귀티가 철철 흐름과 동시에, 오아시스 같은 물의 소중함까지 느끼게 해주는 연출이 뛰어난 셀카 같아요. 그대의 검은 석유 같은 진득한 눈동자에 치얼스.”

    …그리고 이건 내 셀카에 대한 녀석의 감상평 되시겠다.

    단언컨대 내 소개팅남이 이런 식으로 메신저를 보냈다면, 나는 주선자까지 한꺼번에 차단해버릴 거다. 왜 이 자식이 소개팅 경험이 제로인지 알 것 같다.

    소중한 인연을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은 주변인의 간절함 때문이었어.

    폰을 던져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꾹 눌러 담고, 제발 쓸모없는 헛소리랑 미사여구 좀 떼고 하고 싶은 말만 쓰라고 광속으로 메신저를 보냈다. 잠시 뒤, 녀석은 정말로 간결하게 한 문장만 보냈다.

    “예쁘다”

    그 짧은 세 음절의 말에, 불현듯 누군가가 떠올라 가슴이 시큰해진 나였다.

    ============================ 작품 후기 ============================

    확실히 1인칭 소설이 쓰기가 편한 것 같아요. 마왕의 남자보다 시간이 적게 걸려 좋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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