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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4화 (4/97)
  • 00004 4. 이딴 연애를 제가 합니다. =========================

    ‘권이소는 도란과 실전처럼 연애하며, 도란에게 연애에 대해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가르쳐줄 것을 맹세합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순식간에 작성한 계약서. 계약서에 내 사인과 서명을 받아낸 도란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성준이에게 계약서를 건넸다.

    “야, 문구점 가서 복사랑 코팅해와. 한 30장?”

    “뭘 그렇게 많이 복사해? 석 장 정도만 하면 되지.”

    “…네가 그렇게 말하고 각서며 계약서를 찢어발기고 무효라고 주장하는 게 한두 번이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째려보는 도란이.

    웃기시네, 진짜. 내가 살면서 몇 번을 그랬다고. 물론… 곰곰이 생각하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만. 왠지 녀석의 시선을 마주하자 가슴 한구석에서 죄책감이 느껴져서 시선을 회피했다.

    그사이에 성준이가 진짜로 30장을 복사 및 코팅하려는지 도란이의 체크카드를 강탈해서 밖으로 나갔다. 저 자식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행동이 빠른 거야? 30만 원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토록 무섭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성준이가 사라지자 도란이가 내 방으로 들어가 다시 빈 종이를 가지고 나왔다. 뭐하자는 거지? 영문 모를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녀석이 태연하게 “계약 조건 작성해야지.” 라고 말한다. 아니, 그거 보통 계약서 쓸 때 쓰는 거 아니냐?

    어이없다는 투로 묻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도란이다.

    “아, 그런가. 그렇지만 조건이라는 게 바뀔지도 모르니까 코팅까지 해버리면 30장 수정하기 번거로울 것 같아서.”

    “….”

    녀석이 웬일로 제대로 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싶은 것도 잠시, 30장을 다 수정하려고 하는 병신 같은 철두철미함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뭔가 태클을 걸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러기도 지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쏘, 뭐 이것만큼은 지켜줬으면 좋겠다 하는 거 있어?”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아직 계약서만 작성하고 실전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자고로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워야 괜한 고생을 하지 않는 법. 어떻게든 고생을 덜하는 쪽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또라이처럼 굴지 마.”

    “뭐래, 나 정도면 정상… 아, 넵.”

    내 주먹이 불끈하지 않았더라면 희대의 개소리를 라이브로 들을 뻔했다.

    도란이는 빠른 속도로 빈 종이에 ‘또라이처럼 굴지 말 것.’을 기재했다. 사실 자기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모르는 녀석이니만큼 저 조항이 얼마나 효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또 뭐가 있으려나.

    실전처럼 하는 가상 연애. 연애는 몇 번 해본 적 있지만, 가상 연애는 난생처음이고, 해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와 닿지 않는 걸로 고민할 바에 그냥 일반 연애처럼 생각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연애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데이트도 하고, 닭털 날리면서 깨도 볶고, 설레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서로에게 하고. 아, 만약에라도 닭살 돋는 말을 들으면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데 저 녀석이 그런 멘트를 날릴 리가 없지.

    왠지 모르게 녀석이 연애 고자라 조금 다행스러웠다.

    또 뭐가 있더라. 연애하면… 스킨십도….

    잠깐만, 저 새끼랑? 비비적대고 쪽쪽 대고? 어우, 그건 소름 끼칠 정도로 싫다.

    “이것도 넣어. 스킨십 절대 금지.”

    “야, 그건 아니지. 나름 실전처럼 하는 가상연애인데 닿지도 못하는 건 무슨 모니터 속 여친이냐? 3D 미연시야?”

    웬일로 묘하게 그럴듯한 반박을 하는 도란이였다. 도란이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래 붙어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들러붙는 건 일상다반사고, 가족처럼 편한 사이니 뭐, 확실히 키스 이상만 안 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친구끼리만 가능한 선까지 스킨십하는 걸로. 키스 이상은 절대 금지.”

    “오케이.”

    녀석과 나는 평소처럼 티격태격하면서 조항을 만들어나갔다. 하나둘 쌓여가는 조항들을 보고 문득 이 녀석은 바라는 게 없나 의문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계속 나만 종이를 채워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란아, 넌 뭐 바라는 거 없어?”

    “…아니, 뭐. 연애를 해봤어야 알지.”

    목소리에서 짙은 씁쓸함이 묻어져 나왔다. 뭔가 우리 사이로 찬바람이 쌩하니 지나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크흑, 내가 미안하다! 의도치 않게 아픈 곳을 건드려버렸다!

    “그럼 이걸로 끝?”

    나는 조항이 적힌 종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또라이짓 금지, 개인 프라이버시 존중, 친구 이상 스킨십 금지. 가르침을 새겨들을 것. 나한테 필요한 건 일단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도란이도 내 옆에서 조항을 빤히 보더니 이내 뭔가 생각났다며 쌩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저 녀석이 돌발행동을 하는 건 일상다반사니 금세 그러려니 하며 조항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30장을 복사, 코팅해온 성준이가 들어왔다. 가만 보면 상대적으로 도란이한테 묻혀서 그렇지, 얘도 상당한 또라이라니까.

    “도란이는.”

    “뭔가 생각났다면서 밖에 나갔는데.”

    내 말에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던 성준이는 내 손에 들린 종이를 가로채고선 내용을 훑어봤다. 보면서 뭔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좀 허전한데.”라고 중얼거린다.

    그야 연애 고자께서 뭘 적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고 하시니까 그렇지.

    또라이, 아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도어락 소리가 들리더니 때마침 도란이가 들어왔다. 아무래도 조항에 남의 집 도어락 따고 쳐들어오지 말기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도란이는 들어오면서 나에게 받으라며 뭔가를 던졌다. 아직 건재한 운동신경으로 잽싸게 잡았다. 보니까 처음 보는 스마트폰이다.

    “뭔데 이게?”

    “내 서브폰.”

    “웬 서브폰? 지금 쓰는 스마트폰도 게임기나 시계로 쓰면서.”

    “게임 계정 돌리려고 사뒀다가 태블릿 사면서 안 쓰게 된 거.”

    어쩐지 화면을 보니 게임만 수두룩하다 했다. 나는 비밀번호도 걸리지 않은 폰을 이리저리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대체 이걸 왜 나한테 준 거지? 도란이에게 이유를 묻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가상 연애를 할 땐 이 폰으로 연락하고, 친구나 코치로서 연락할 때는 네 원래 연락처로 연락할 것.”

    “오오, 네가 웬일이야? 그런 식으로 머리를 굴리고? 제법인데.”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했다. 확실히 한 연락처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선 정신분열증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까. 연애 감정을 알려다가 정신분열증 소재로 소설을 쓸지도 몰라.

    별의별 것 가지고 소설 소재로 삼는 녀석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암만 그래도 내가 모티브인 소설이 정신분열증으로 빠지는 건 사양이다.

    “사실… 내 인생 첫 여친과 잠깐이지만 연락을 주고받았던 의미 깊은 폰이니까. 조심히 써주길 바라.”

    도란이는 마치 떠나버린 연인을 추억하듯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이 자식 모태솔로가 아니었어? 나는 놀라서 연락처며, 메신저를 확인해보았다. 그와 동시에 다급하게 성준이가 다가왔다.

    설마….

    혹시나 싶어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확인해보니 할로윈 분장 뺨치게 괴이한 화장을 한, 긴 가발을 착용한 성준이가 윙크하고 있었다. 충격적이고 웃긴 모습에 빵 터져 나는 그 자리에서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성준이는 내게서 스마트폰을 가로채 확인하더니 얼굴이 빨개져선 도란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공을 바라보며 아련하게 중얼거리는 도란이였다.

    “성순아, 잘 지내지? 내 첫 여친. 너의 무성한 사자 갈기 같은 시커먼 다리털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미친놈아! 지우겠다며! 지운다며!”

    “나도 지우려고 했는데… 너와 함께한 끔찍했던 추억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다고 발악을 하는 바람에.”

    그래도 너와의 추억을 나만 간직하려고 퍼트리진 않았어. 도란이 녀석이 상큼한 표정으로 윙크하며 말하자 여러 가지가 맞물려 고통스러운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성준이였다.

    불쌍한 놈. 층간소음으로 민원 들어오니까 데시벨 줄여줄래?

    “어쨌든 내 조건은 일단 이걸로 끝. 잘 부탁해, 연애 사부.”

    나를 쳐다보며 씩 웃는 도란이였다. 이렇게 황당하고 어설프게 우리들의 가상연애가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마왕의 남자와 달리 3-4000 자 전후로 쓸 계획입니다 :D 왜 두 작품의 분량과 주기 차이가 나는지는 조만간 따로 공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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