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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2화 (2/97)
  • 00002 2. 나랑 연애할래? =========================

    아까까지만 해도 내 손에 곱게 들려있었지만, 어느새 식탁 밑에 나동그라진 젓가락 두 짝처럼, 두 쪽으로 쪼개져 반은 우주 너머로 날아가 버린 내 정신줄.

    28년 인생에서 들어본 고백 중에 가장 얼척 없고, 무드도 없는 또라이스럽기만 한 고백. 정작 그 고백을 꺼낸 또라이는 날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다.

    나는 기가 차서 영혼 나간 헛웃음만 내뱉다가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서 한마디 내뱉었다.

    “야, 이 정신 나간 또라이야. 로맨스 쓰겠다고 연애를 하는 것 같으면, 추리를 쓰면 연쇄 살인마라도 될 거냐?”

    “에잉, 그건 철창신세잖아. 암만 나라도 그런 짓은 안 한다.”

    …그거 태클 걸어야 할 부분 아니거든? 자신이 한 멍청한 망언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야 할 부분이거든? 이 와중에 순간적으로 ‘아, 그래도 쟤가 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었구나.’ 하고 안도했다는 게 제일 자괴감이 느껴져.

    그래도 자의든, 타의든 이 또라이의 평생을 옆에 있는 사람으로서, 녀석을 정상인으로 교화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나였다. 사고뭉치 학생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의 심정으로, 말 안 듣는 미운 다섯 살을 키우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이성적으로 녀석에게 가르침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란아. 나도 물론 네 심정을 2% 정도는 이해하는 바이지만, 암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니?”

    “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짜로 궁금하다는 듯 묻는 도란이 녀석. 그 모습이 꼭 파란 해달 나오는 만화에 출연하는 캐릭터를 보는 것 같다. 실컷 까불어놓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때릴 거야?” 라고 말하는 분홍 다람쥐.

    물론 나는 거기서 이마에 빡친 표시를 가득 달고서 그 다람쥐에게 분노의 맴매를 실현하는 너구리 같은 모습이겠지. 하지만 나는 이성적인 인간, 순간적으로 치솟은 내 안의 분노를 억누르고 다시금 녀석과 대화를 시도한다.

    “…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우리. 일단 사람과 사람이 사귀려면 이성적인 감정이 있어야….”

    “너 예전에 중딩 때, 분명히 일단 사귀고 보면 이성적인 감정이 생긴다느니 하면서 우리 학교 선배한테 몇 번이나 대시…읍”

    “셧더 마우스! 남의 흑역사 함부로 꺼내지 마라.”

    나는 도란이 녀석의 입에 칠리새우를 한가득 처넣어 입을 봉쇄했다. 지금도 순정만화에 꽂혀서 연애 한 번 해보겠다고 발악했던 중딩 때의 내가 생각나면 자다가도 천장에 하이킥을 하는데! 저 자식 때문에 오늘도 잠들기 전에 끔찍한 흑역사의 늪에 빠져 버둥대게 생겼다. 아니, 오늘 있었던 일까지 합쳐져 끔찍한 악몽을 꿀 것 같다.

    “그건 어릴 때 얘기고 지금은 아니지! 그리고 상식적으로 어떤 미친놈이 이딴 식으로 무드 없이 고백을 하냐? 역사상 가장 무드 없는 고백 랭킹에 등재되고도 남겠다!”

    “그러면 무드 있게 고백하면 연애해주는 거야? 그대의 펭귄 등짝 같은 시커먼 눈동자에 건ㅂ…”

    “악! 이 또라이가 진짜. 펭귄 등짝은 또 뭐고, 뒤에 붙는 손발 오그라드는 식상한 멘트는 또 뭐야! 뭘 보고 와서 그딴 걸 무드 있다고 들이대는지 모르겠네!”

    “중딩 땐가 너네 집에 놀러 갔다가 네 방에서 발견했던 순정만화 각색 버전.”

    오, 신이시여. 제 참을성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나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식탁 의자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있던 도란이 녀석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삼키면서 허벅지를 문지르는 녀석, 꼴좋다.

    “정신 나간 헛소리도 작작해, 이 또라이야. 애초에 널 연애대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고! 세상에 남자가 너 하나밖에 없다고 해도 너랑은 절대 연애 안 해! 네버! 에버! 포레버!”

    “아아, 그럼 하지 말고 가르쳐만 주던가.”

    “…그건 또 무슨 신종 미친 소리래?”

    녀석에게 뭔가 따지려는 찰나, 삐리릭 하며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 성준이였다.

    아니, 이 사내놈들은 왜 태연하게 남의 집 문을 따고 들어오는 거야?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겠지만 나도 일단 XX 염색체를 가진 생물학적 여성인데.

    언젠가 나의 안전을 위해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나였다. 그래 봤자 며칠 만에 뚫릴 게 뻔하지만. 흑, 우리 집의 보안 상태는 어찌도 이리 처참할 정도로 최악인가.

    남의 집 성스러운 도어락을 따고 들어온 성준이를 눈이 시뻘게지도록 노려봤지만, 성준이는 그저 어깨를 한번 들썩일 뿐이었다. 그러고는 식탁 위에 놓인 크림새우 하나를 입에 넣으며, 아직도 허벅지를 문지르는 도란이에게 다가갔다.

    “야, 말했냐?”

    “응, 방금 했는데 한 대 얻어맞음.”

    “쯧쯧, 이소 심기를 건드릴 때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어야지.”

    근데 둘의 얘기를 듣다 보니 뭔가 아까 고백을 말하는 것 같다. 뭐야, 성준이도 알고 있었던 거야? 성준이 녀석에게 확인 차 묻자, 알고 있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거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녔나? 뭔 상황이지, 대체.

    상황의 흐름이 이해가 안 돼서 둘을 멍하니 쳐다만 보는데 갑자기 성준이가 나를 보더니 허리를 90도로 숙인다. 응? 뭐야?

    “이소야, 내가 부탁 하나만 하자. 진짜 이 자식 연애 좀 가르쳐주면 안 되겠냐?”

    “…하?”

    겨우 집으로 돌아온 정신이 “엄마, 나 또 가요!” 라는 인사를 하며, 사라진 지 10초. 간신히 가출하려는 정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되돌려 놓은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흐름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결론은 ‘저 두 또라이들이 무슨 미친 짓을 계획한 거지.’였다.

    오랜 사회생활로 인해 성준이에게 내장된 또라이성이 많이 사그라졌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또라이는 영원한 또라이라는 건가. 그래도 꽤 절박해 보이는 성준이의 표정에 변명할 여지는 줘야겠다고 생각해 이유를 물었다.

    “그러니까… 이소 너도 저 녀석이 로맨스 쓰고 싶다면서 연애하자고 한 거 맞지?”

    “어.”

    “…근데 너한테 얘기하기 전에…, 나한테 먼저 그랬거든. 연애하자고.”

    “…뭐냐? 너희 설마….”

    한 놈은 평생, 한 놈은 10년간 알고 지냈는데도 몰랐던 둘의 성적 취향을 알게 될 줄은…. 이걸 존중해줘야 하나, 자리를 비켜줘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라며 다급하게 부인하는 성준이였다.

    근데 왜 도란이 너는 부정을 안 하냐? 자세히 보니 지 허벅지에 정신이 팔려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말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가 너무 세게 때렸나? 살짝 미안하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왜 성준이가 이렇게 남의 연애사 아닌 연애사에 길길이 날뛰는지가 더 궁금해 사정을 들어보기로 했다.

    ***

    때는 바야흐로 지난주 주말, 성준은 주말마다 도란의 집에서 노는 게 일상이었기에 아침 댓바람부터 도란의 집에 쳐들어갔다.

    성준은 문을 열자마자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는 도란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깨어있다는 거였고, 두 번째는 거실이며, 방이며, 화장실이며 ‘연애’, ‘러브’, ‘사랑’이란 단어들이 제목에 적힌 책들이 바닥에 널려있다는 것.

    작가이면서도, 평소에 만화책 빼고는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도란이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도란은 성준이 온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건지 ‘연애의 정석 part. 3’이라는 책을 뚫어질 듯이 읽고 있었다.

    ‘쟤가 드디어 맛이 갔나.’

    성준은 자신의 11년 지기 친구이자, 모자라긴 해도 착한 녀석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도란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성준을 실성한 사람처럼 쳐다보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나도! 로맨스! 쓸 거야!”

    도란과 함께한 11년 동안 그의 또라이 짓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파악한 성준이었다. 성준은 부엌에 있는 유자청을 찬물에 타 도란에게 내밀었다.

    도란은 유자차를 신경질적으로 째려보더니 한 번에 원샷했다. 건더기를 살벌한 얼굴로 으적으적 씹어 먹는 도란의 기세에, 성준은 필시 ‘그저께 할머니 집 간다더니 거기서 무슨 일이 있긴 했구나.’ 하고 직감했다.

    성준이 달래듯 무슨 일이냐고 묻자, 진정했는지 할머니 집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 도란이었다.

    “…아니, 그저께 할머니 집에 간다고 했잖아. 우리 할머니야 이따금 잔소리를 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예상 범위 내니까 언제나처럼 미리 멘탈을 단련해두고 갔지. 근데… 예상치 못한 걸로 크리티컬 먹었어.”

    “왜, 결혼은 언제 하냐, 애인은 있냐 물어보시기라도 하셨냐?”

    도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거였다면 예상 범위 내아냐? 10년 넘게 여친은 있냐고 묻는 걸 들어왔는데?” 라고 말했다. 성준 역시 자신이 실언했다고 생각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쉰 도란은 이내 진정이 안 되는지 울컥하며 소리쳤다.

    “근데 뜬금없이 할머니가 저녁에 티비 드라마를 보면서 이러시잖아! ‘뒷집 손녀 뭐시기는 니처럼 작간데 글이 잘돼가 테레비 드라마로도 나오던데…. 니는 어째 가보다는 좀… 못 한기쟤….’ 라면서! 나도 나름 잘나가는 베셀 작간데! 드라마로 나오기 미묘한 장르라 안 나왔다뿐이지, 영화화는 됐는데!”

    “그럼 영화라도 다운받아서 보여드리지 그랬냐?”

    “…야, 우리 할머니한테 그거 보여드렸다간 질겁하면서 정신감정 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고 날 병원에 끌고 갔을걸.”

    확실히 유혈도 낭자하고, 심히 그로테스크하긴 하지…. 소설의 으스스한 괴기함을 소름 끼칠 정도로 뛰어나게 영상화시켰던 영화. 적절하게 시기를 맞춰, 한여름에 상영했던 영화는 특유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덕에 19금치고는 나름 흥행했었다.

    그도 그럴게, 공포영화를 잘 보는 성준도 영화관에서 벌벌 떤 걸로 모자라, 그날 밤 영화와 관련된 악몽을 꿨으니까. 오죽하면 그런 소설을 쓴 원작자의 정신상태가 평소보다 3배로 궁금해질 정도였다. 악몽으로 식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 성준이었다.

    근데 그 말 한마디 들었다고 로맨스를 쓰기로 마음먹었다는 건가? 혹시나 해 물어본 의심 어린 성준의 말에 도란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 쓸 거야. 까짓것 어차피 다 허구인데, 늘 쓰던 것처럼 하면 되지, 그게 뭐 별거냐고 생각했지. 그래도 어느 정도 이론은 확립해둬야 할 것 같아서 눈에 보이는 연애 관련 책들은 모조리 사 왔는데… 하나도 모르겠어. 이해가 안 돼.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아.”

    “그러니까 병신처럼 그러지 말고 진작….”

    “아, 몰라! 실전이다! 야, 나랑 연애할래?”

    “뭐? 미친놈아?”

    ***

    지난주 있었던 자초지종을 성준에게서 듣고 나니 그저 한숨이 나왔다. 저 또라이는 진짜 주변 사람한테 민폐 말고는 영향을 끼치는 게 없구나. 나는 성준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그를 위로했다.

    “…그냥 개소리 집어치우고 정신병동에나 들어가라고 그러지 그랬니.”

    “아니, 그…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유혹에 이기지를 못해서….”

    “네? 뭐요? 유혹?”

    흡사 바람피우는 남편의 변명을 듣고 있는 듯한 기분. 믿고 있던 도끼에 발등이 아니라 뒤통수를 찍힌 것 같은 배신감. 어이가 없어서 실소만 터트리는 나를 보던 성준이는 다급하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유혹이 아니라! 아, 그러니까 저 자식이 뇌물로 나를 꼬드겨서… 그 말도 안 되는 썸타는 상황극에 협조하긴 했거든.”

    “아, 예 예. 그러시겠…. 아니, 잠깐만. 남자들끼리 징그럽게 썸타는 상황극은 또 뭐야?”

    내 의문에 나한테 주는 뇌물이라고 안 먹겠다던 칠리새우를 어느새 오물오물 먹고 있던 도란이가 끼어들었다.

    “내 말이! 이쏘 너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내가 성준이를 성순이로 큐티하고 프리티하게….”

    “넌 좀 빠져!”

    성순…? 큐티, 프리…티? 썸타는 상황극?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래. 둘이서 티격태격하고 있는 걸 잠시 내버려 두고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생각하다 머릿속에서 내려진 결론.

    설마 이것들, 한 놈, 그러니까 성준이가 여장을 하고… 여자인 척하면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내 안의 경계경보가 이 미친놈들 사이에서 빨리 떨어지라는 경고를 보냈다. 내가 멀찍이 떨어지자 둘이 나한테로 다가왔다. 오지 마! 이 미친놈들아!

    “야! 나도 하다가 30분도 못 버티고 나가떨어졌어! 소름 끼쳐서!”

    “나가떨어진 것보다 그 미친 짓에 가담했다는 게 더 중요한 거거든? 야, 김성준 너 진짜….”

    “확실히 나의 손길이 거쳐 갔는데도 성순이의 매력지수는 기대 이하이긴 했어.”

    “진짜 넌 좀 닥쳐라, 제발!”

    한참을 빽빽거리고 나서야 겨우 지쳐서 진정한 우리 세 사람은 거실에 앉아 삼자대면을 나누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마왕의 남자와 달리 최소 주 2회 연재를 할지 아니면 분량을 3000자 내외로 해서 자주 연재할지 고민중입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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