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完)
“마, 말도 안 돼…….”
황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분명 거의 죽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의 뒤에서 은근히 알아본 결과 실제로 혼수상태에 빠져 지금 체내에 번진 독을 빼내기 위한 치료를 계속 이어 가고 있다고 했다.
“황태자 전하께 쓰려고 했다니…… 설마……!”
눈치가 빠른 귀족 하나가 외쳤다. 아스릴은 사람들을 시켜 무언가를 가져오게 했다. 시녀 하나가 달려 나와 아까 자백을 한 시녀 앞에 양손을 펼쳐 보였다.
“이 중에 독이 담겨 있던 병이 무엇이냐.”
“아…….”
달달 떨고 있는 하녀는 작은 병들 중 하나를 골라냈다. 동그랗고 길게 생긴 병을 쥐어 올린 하녀는 아스릴에게 보이며 외쳤다.
“여기에…… 초록색 물약이 담겨 있었어요!”
레나드는 미간을 굳혔다. 아스릴이 쓰러져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스릴을 붙들고 오열하고 있을 때였다.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숨이 멎을 뻔했다.
자신이 빨리 돌아오기 위해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노력에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혹여 잘못되더라도 충분히 몰아세울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이 이번에 아스릴을 해하려 했던 것이라면…….”
레나드는 세드룬을 향해 눈짓을 했다. 저 안쪽에서 시종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시종은 황태자의 손에 아주 작은 물건 하나를 넘겼다.
“이것이 약 4개월 전, 나를 해하기 위해 시녀의 손에 넘긴 독약의 병이다. 이 독약의 정체를 확인해 준 것은 의사이니 궁금하거든 물어보도록 하자.”
“어쩐지 멀쩡하더라니……!”
클로이는 레나드의 손에 들린 작은 병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생각보다 작지 않았다. 작은 병에 집중하느라 모두가 고요히 숨을 죽이던 그때 회의장 공기를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세상에……!”
“황태자 전하는 드시지 않았죠. 저는 알면서도 마셨습니다.”
“말도 안 돼! 그 독약은 빠르게 몸에 퍼지면서도 빨리 죽지 않는 약이야. 무슨 수로 그걸 먹고 멀쩡할 수가 있어, 그것도 닷새 만에!”
황후의 외침에 장내는 싸늘하게 식었다. 이제껏 아닌 척 발뺌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순한 눈매도, 황제의 간병을 하느라 살짝 지친 얼굴도 전부 사라진 클로이는 표독스럽기 그지없었다.
“황후…… 폐하…….”
넋이 나간 누군가의 부름에도 그녀는 눈을 돌리지 않고 아스릴을 바라보았다.
“제가 신성력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모르셨나 봅니다. 일전에 데모트 백작을 통해서 보내셨던 암살자도…… 제가 신성력으로 공격해서 시간을 벌었었는데 말이죠.”
암살자 이야기가 더해져서 나오자 장내는 시끄러워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한 자와 이해하지 못한 자가 나뉘어, 황후를 비난하는 목소리와, 모르는 이들에게 설명하는 목소리로 소란스러웠다.
클로이는 끝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라면 응당 욕심낼 수밖에 없는 것을 욕심냈다. 자신이 탐내지 못할 것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나는 아그로드 황제의 부인, 황후이고 심지어 아들도 낳았는데……!
레나드는 아스릴의 손을 잡아 곁에서 다독여 주었다. 아직도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는 두 눈이 있었으나 레나드도 아스릴도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처분에 대해선 경들과 논의할 생각이다. 황후 클로이와 황자 로나르드는 감옥에서 기다리도록.”
기사들이 각각 두 사람을 잡아끌고 회의장을 나섰다. 끝까지 앙칼진 목소리로 회의장을 압도한 클로이였지만 그 외침은 길게 가지 못했다.
“황태자 전하와 아스릴 영애 모두 이 사태와 맞서고 수습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희는 최대한 신중히 논의하여 알맞은 처벌 방법을 찾아 놓겠습니다.”
귀족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황태자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그녀가 철저히 숨겨 오기는 했지만, 너무 아무것도 모른 채 태평했던 자신들에 대한 사죄와 두 사람에 대한 존경을 담은 인사였다.
레나드와 아스릴은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회의장을 나섰다. 오늘은 아직 두 사람 모두 지쳐 있는 상태였다.
회의장을 나오자마자 아스릴이 휘청거렸다. 레나드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아스릴의 몸을 가볍게 받쳐 주었다.
허리를 끌어안아 올린 레나드는 이를 악물고 조심히 아스릴을 끌어안아 주었다. 저만이 그녀를 지켜 주고 있단 오만한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정작 이렇게 몸을 바쳐 저를 지켜 주고 있었던 그녀의 닷새를 생각하니 울컥하는 마음에 눈가가 시큰해졌다.
“수고했다……. 너무 수고 많았다.”
“오랜만에 하려니까 잘 안 됐어서 그래요……. 남한테 해 주는 것보다 나한테 하는 게 더 힘들더라고요.”
아스릴은 복도 한가운데서 자신을 끌어안고 울 것만 같은 레나드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스릴은 황후가 자신을 만났을 때를 노리지 않고 그 이후를 노릴 것을 간파하고 리프네와 씨씨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었다.
황후가 주는 독을 일부러 마셔서 완벽하게 드러나는 그녀의 죄를 만들어 놓고, 닷새 동안의 안전도 확보하겠노라고.
이전 생에서 레나드의 독을 빼내 주었던 기억은 큰 도움이 됐다. 아니었으면 그런 모험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 가지 문제는 남에게 해 주는 것보다 자신에게 하는 것이 훨씬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는 것. 아픈 몸으로 신성력을 써야 하다 보니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장에서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빨리 그대에게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아무래도 아스릴의 위험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
“돌아와서 소식 들었을 때 너무 놀랐죠. 미안해요. 황후가 분명 레나드의 반응부터 살필 거라고 생각했어요.”
두 시녀와 의사까지 모두 끌어들여 일을 꾸몄지만 단 한 명, 레나드에게만큼은 절대 말해선 안 될 일이었다.
미리 알았다면 분명히 대비한 반응을 낼 수 있었겠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제대로 반응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한 판단이었다.
진실을 알리기까지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을지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스릴은 그를 밀어내지 않고 팔을 둘러서 더 꽉 끌어안아 주었다.
“이제 다 된 거죠?”
“물론이다. 이제 다 끝났다.”
이제는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은 레나드의 품에서 아스릴은 정말 행복하게 웃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는데…… 레나드, 나 정말 태어나길 잘한 것 같아요.”
20년을 데모트가에서 살아오면서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솔직히 이전 삶에서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 생각한 적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련 속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을 구해 내지 못한 적 없는 이 남자의 단단한 팔 안에서 아스릴은 심장이 녹을 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도 내가 그대의 삶의 이유가 되겠다. 그러니까 위험한 황태자 곁이라고 떠나지 말고 싫어하지 말고…… 곁에 있어 다오.”
황후로 인하여 벌어진 일을 두고 레나드는 자신의 탓을 하기도 했다. 정확하게는 황궁 안에 있는 한 이런 위협은 언제 어디서든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잘됐네요, 레나드. 제가 살아가는 데에…… 레나드 말고는 필요한 게 없거든요.”
이 삶에 반복된 두 번의 시간이 어째서 필요했는지는 눈앞의 레나드가 증명해 주었다.
확실히 제 삶을 챙기고 자신의 능력을 발현하는 것이 아스릴을 올바르게 성장하게 해 주고 눈앞의 사람에게서 진실한 사랑까지 찾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계속 이러고 계실 거예요?”
“조금만…….”
슬슬 진정이 돼 가고 있나 싶어서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허리를 감싼 팔에 더 강하게 힘을 줄 뿐이었다. 강하게 밀착한 몸의 감각은 물론 아스릴도 기분 좋은 것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그의 몸을 끌어안아 줄 힘이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쉬고 싶어요.”
“……아!”
레나드는 그제야 힘이 빠진 그녀의 몸을 인식하고 빠르게 떨어져 나가다가 휘청이는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어쩔 줄 모르며 허둥대다 번쩍 안아 들어 버리는 그의 행동에 기운은 없지만 꺄르르 즐겁게 웃어 버린 아스릴은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레나드는 그녀가 안정적으로 품에 안기도록 하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가 정말 제집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
“이제…… 레나드가 제 남자가 되는 거예요?”
“그건 원래 그랬다.”
“하아…… 좋아요. 그럼…… 확실하게 확인했어요.”
살짝 까무러지는 그녀를 품에 안고 레나드는 그녀의 몸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전하의 방 침실을 따뜻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수프도 준비해 두어라. 깨어나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식더라도 뭐라도 좀 먹어야지…….”
준비해 두겠습니다.
아스릴은 까무러지듯 잠이 드는 사이에도 자신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소곤소곤 말을 나누는 레나드와 씨씨의 목소리를 들었다. 황태자가 자신을 침실로 옮기는 발걸음을 따라 움직이는 몸이 마치 공중을 날아올라 있는 것만 같았다.
불안했던 마음 모두 싹 가시고, 아스릴은 기분 좋게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 일어나거든 제일 먼저 눈앞에 레나드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그럼 가장 먼저 얼굴에 입을 맞춰 주어 잠을 깨워 줘야지. 그도 깨어나면 제일 먼저 나를 보도록…….
아스릴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더 널찍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 번째는 확실하게, 본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