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괜찮으십니까?”
본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리프네가 아스릴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황후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고 금방 끝이 났다. 둘 다 살 수 있지 않겠냐는 아스릴의 말이 정말 모두의 목숨을 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인 것을 알면서도 뒤에 있던 씨씨와 리프네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적당히 하라는 협박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황후는 결국 표현하지 못한 분노에 못 이겨 급히 아스릴을 돌려보내고 말았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불 두 채를 선물이랍시고 낑낑 들어 옮긴 시녀 둘은 그때까지 황후의 반응을 모두 두 눈에 담았다.
아스릴 별궁에서 유지하고 있던 것보다 살짝 입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아까보다 덜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쪽이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이 사람은 감정을 잘 감출 줄 아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부족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까 황후께서 매우 당황한 듯 보이던데요.”
본궁의 응접실로 들어온 아스릴은 긴 소파 제일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혼자 있어도 한 번도 상석을 차지하고 앉는 법이 없는 그녀의 곁으로 시녀 두 사람이 다가와 섰다.
그녀의 말에 뒤에서 황후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 두 사람이 차례로 대답을 꺼냈다.
“아가씨 얼굴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어쩔 줄 몰랐던 건…… 아마 아가씨 표정을 못 읽어서이지 않을까요.”
“본래 신경질을 내서 기를 죽이려고 했을 겁니다. 자기 얼굴을 드러낸 사람에게는 아주 신경질적인 분이거든요.”
시녀들이 곁에서 관찰했던 것들을 각각 말해 주었다. 아스릴은 그들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비슷한 걸 느꼈기 때문이다.
무서운 사람이지만 굉장히 잘 휩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에 차라리 결정을 못 내리는 사람이었으면 나았을 텐데, 또 불같은 성정 탓에 오히려 더 큰 일을 저질러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선 마구 저질러 버릴지도 모릅니다. 간혹 자기 분을 참지 못해서 물건들에 화를 풀기도 하고 그런다고…… 별궁에서 일하는 시녀에게 한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어린 시녀들이 부지런히 움직여 응접실 테이블 위에 차와 쿠키들을 차리기 시작했다.
황후에게 가서 티타임을 가지고 온 길이긴 했지만, 그녀는 워낙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거기 가서 차 한 잔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나왔기 때문에 그걸 굳이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았다.
“음, 고마워요.”
아스릴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는 시녀에게 감사를 전했다. 잠깐의 시선과 감사 인사를 들은 시녀는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물러났다.
아스릴은 물러나는 어린 시녀를 바라보다가 리프네와 눈을 맞췄다. 그러곤 찻잔을 들고 마시며 다시 씨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이다음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씨씨는 그녀가 하는 말에, 저를 보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아들은 듯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앞으로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씨씨의 목소리는 굉장히 신중해졌다. 이미 그녀에게 힘들고 슬픈 일들은 데모트를 떠나며 모두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후를 상대로 싸우고 온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스릴은 씨씨의 말에 공감하며 차를 한 모금 또 한 모금 마셨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릴의 눈동자가 또르르 아래로 굴러 찻잔 안에 담긴 예쁜 수색의 차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그 차가 맛있긴 맛있었……는…….”
하지만 그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점차 느려지는 목소리에 시녀들이 모두 아스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아무래도 아스릴의 상태가 이상했다. 휘둥그렇게 뜬 두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 이마에 약하게 핏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 끝에 찻잔의 손잡이가 걸렸다.
“커흑!”
차를 조금씩 마시던 아스릴의 손이 갑자기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아스릴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기침을 터뜨렸다.
쨍그랑-
“아가씨!”
이내 그녀의 손에서 힘을 잃고 미끄러진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몇 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 * *
“아스릴!”
그녀에게 인사를 남기고 떠난 지 정확하게 닷새가 지났다.
레나드는 황급히 본궁으로 달려 들어와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스릴의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쩐지 이상하게 불안한 기운이 찾아들어 불길처럼 달려가 아도피트와 싸우고 있는 레나드의 군대를 신나게 몰아붙이고 있던 로나르드의 군대의 뒤꽁무니와 맞닥뜨렸다.
거기서부터는 봐줄 것도 없었다. 부부- 하고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에 힘이 달리는 척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던 주둔군들이 함성과 함께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동쪽의 아도피트군을 강으로 몰아넣어 버리고는 바로 뒤돌아 레나드가 이끄는 군대와 싸우고 있던 로나르드군을 양쪽에서 공격해 댔다.
전략 따위 없이 그저 몰아붙이고 있던 로나르드와 그 병력들은 양쪽에서 몰아붙이는 군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상황을 정리하고 로나르드를 포획하자마자 뒷정리는 대장들에게 맡기고 레나드는 세드룬과 함께 황궁으로 귀환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규모가 규모인지라 완전히 제압하는 것에 시간이 걸린 것이다.
“내가 늦어서…… 늦어서 미안하다, 아스릴……!”
하지만 그 단 며칠 만에 이렇게 될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레나드는 포효하듯 그녀를 부르다가 목소리를 죽이고 사과했다. 침대 위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잡으며 얼굴을 묻었다.
두 손으로 감싼 그녀의 손은 차갑고 힘이 없었다.
레나드는 그 손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더 이상의 소란을 부리는 대신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중간중간 숨을 그러모으는 소리,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와 두 손, 그리고 시뻘겋게 터져 버린 눈이 그의 분노와 슬픔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누구인가……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황태자가 먼저 방으로 들어온 뒤, 황급히 시녀 둘과 의사가 들어왔다. 누가 먼저 대답해야 하는지 서로를 바라보다가 우선 의사가 그의 뒤로 가까이 다가섰다.
“차에 녹인 독을 드셨습니다. 소량이지만 증상은 빠르게 나타나는 독으로, 제가 마침 근처에 있어서 빠르게 조치를 취해 목숨은 붙잡으셨으나 회복이……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의사의 설명이 시작되자 무섭도록 떨리던 그의 어깨는 진정되었으나, 분노에 가득 찬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는 레나드가 훨씬 무서웠다.
그의 시선이 뒤에 있던 시녀들에게로 향했다. 무시무시하게 불타오르는 눈동자로 천천히,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았다.
먼저 리프네가 한 발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출정하신 뒤에 바로 황후 폐하께서 아가씨를 호출하셨습니다. 저희 둘은 아가씨와 함께 황후 폐하를 뵈러 가서 간단히 차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는데…… 본궁으로 돌아오신 후에 차를 드시고는 바로…….”
리프네조차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 만큼 턱을 덜덜 떨고 있는 리프네의 반응이 그 뒤의 내용을 말해 주었다.
레나드는 초인적인 힘으로 분노를 누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체온으로 조금 따듯해질 법도 한데, 그녀의 손은 여전히 온기를 찾지 못하고 차가웠다. 분노하는 와중에도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문지르고 주물렀다. 그의 손이 간혹 덜덜 떨렸다.
황궁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마주친 시종장의 얼굴에서 이미 먹구름을 감지했던 레나드는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 들어온 길이었다.
항상 자신의 마중을 가장 먼저 나오던 리프네가 보이지 않자 그의 불안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렇게 신신당부했거늘…… 그래서 그렇게 전광석화같이 전쟁을 정리하고 돌아왔거늘…….
뭘 더 어떻게 했어야 했느냔 말이다!
레나드는 작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포효를 했다. 지금 목숨을 구했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의식을 계속해서 찾지 못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아스릴! 일어나 보아라……. 아스릴!”
“전하. 송구하지만, 전하의 몸부터 챙기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빨리 회복하시고 곁에 있어 주십시오. 아가씨께서는…… 곁에 전하께서 계기면 더 빨리 의식을 찾으실지도 모릅니다.”
씨씨는 아스릴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버릴 레나드의 기세에 눌려 얼른 앞으로 가려다 잠깐 발을 흠칫거리고는 목소리를 크게 내었다.
“…….”
“전하…….”
레나드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미동이 없었다. 떨리고 있던 어깨도 멈추고 그의 푸른 눈동자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혼자 있고 싶다. 나가 있어라.”
“하지만 전하…….”
“나가거라! 세드룬!”
“예, 전하.”
“내가 말했던 것 준비시켜. 내일 처리한다.”
세드룬은 그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바로 응접실을 나섰고 시녀들도 의사를 끌고 고요히 응접실에서 물러났다.
모두가 나가 고요해진 응접실에는 정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여인은 창백하게 질린 안색만 제외하면 그저 편안히 잠이 든 듯이 보일 뿐이었다. 색색 숨을 쉬는 소리가 사랑스럽기도 했는데…… 그런 소리조차 없이 그녀는 고요하기만 했다.
레나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방황하던 레나드는 그녀의 손을 붙든 채 그녀의 몸 위로 조용히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가슴 위로 가만히 얼굴을 기대어 누운 레나드는 두 눈을 굳게 내리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