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서두르지 못해!”
평소 고요하기 그지없는 별궁이 소란스러웠다. 그동안 조용조용히 지내던 클로이에게 더 이상의 여유가 없어 보였다.
황제가 누워 있는 2층이 아닌 1층으로 사람들 몇몇이 현관을 넘어 들어왔다.
별채 중에서도 서재로 꾸며 놓은 방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클로이를 위시한 모임으로 나흘 전 본궁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던 상태였다.
“다들 뭐 그렇게 심각한 거야. 우중충하니까 얼굴들 펴라고.”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신경을 긁어 댔다. 모두들 입을 꾹 다문 채로 조용히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예언이 있었다 하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진짜 아도피트의 군대가 쳐들어오면 지난번처럼 아스릴이라는 영애만 칭송받고 끝나지 않겠습니까.”
처음 어디서 엉망인 영애 하나를 데려와 자신의 반려 삼겠다고 설치는 레나드를 가소롭게 여겼다. 황태자비는 가볍게 아무나 앉힐 수 없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관심도 없었던 레나드였으니 대충 백작저의 영애 하나를 구색 맞추기로 데리고 온 것이 가소로웠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던 그 사람이 레나드에게 황제위로 가는 직접적인 지름길이 되어 버렸다. 그 여자 하나로 지금 황궁은 분위기가 어마어마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이거야. 전쟁을 멈추든 그 공을 황태자에게서 뺏어 오든.”
그녀가 예언을 듣는다는 말만으로도 동요를 보이는 이들은 뒤늦게 깨달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됐어. 남편이 사라지고 난 뒤에 부인을 모시려고도 해 봐야 한계가 있는 법이지.”
남편이 사라지고 난 뒤……. 클로이는 입 모양으로 그 말을 다시 한번 읊어 보았다.
위층의 황제가 아직 멀쩡했을 때 클로이를 함부로 보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를 우러르는 만큼 그들은 클로이를 하늘과 같이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패는 단 하나였다. 이왕이면 자신의 이미지까지 잃고 싶지 않아서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제대로 뒤집어 줄 이를.
“지난번과 같다면, 궁에는 많은 이들이 남지 않았을 거예요. 그때가…… 3만이었죠. 우리는?”
클로이가 눈길을 돌렸다. 기사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저희도 얼추 그 정도 됩니다.”
“지금 바로 출정 가능해요?”
아스릴이 했던 첫 번째 예언 때, 그는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듯 행동했다.
하지만 레나드는 곧바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바로 출정을 마쳤고 그녀의 예언이 적중하기까지 해서 큰 성과를 얻었다.
아스릴의 두 번째 예언을 듣고 이미 출정을 시켰다곤 하지만, 예언은 장소를 예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게도 아직 승산은 있다.
“저어…….”
그때 문득 기사 측에서 그녀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기사가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출정을 하신다면…… 역시 선두에는 우리 황자 저하께서 계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건네는 제안은 사실 클로이도 생각했었다. 저쪽은 황태자가 애초에 진두지휘할 수 있으니 누가 이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출처를 찾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쪽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쪽의 업적을 크게 부풀려서 어느 정도라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아도피트에게는 침략할 날짜와 시간까지 별도로 지시해 주었기 때문에 아무리 그가 촉이 좋다고 한들 그것까지 딱 맞춰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움직이는 사이, 그 기회를 로나르드가 잡아 주어야 했다.
“문제는…… 황자가 하필 아스테리아 영애에게 연심을 품었던지라, 지금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아, 진작 좀 치워 놓을걸. 이렇게 사고를 많이 일으켜서 틀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
클로이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는 있었지만 볼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고는 했다.
대외적으로는 매일매일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병환을 보살피고 간병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지고지순한 여인으로 알려지며 그녀에게는 이렐린과는 또 다른 의미로 여성들의 성전을 얻어 내야만 했다. 그래서 클로이는 매우 수수하고 항상 수발에 지친 여인을 연기해야 했다.
“하…… 정말 끝까지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이 없네.”
“황자 저하는 맡겨 주십시오.”
답답한 마음에 클로이가 식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재무대신으로 로나르드의 공부를 돕고 있는 이였다.
“그 군대는 필히 황자 저하께서 끌고 나가셔야 합니다. 그러니 제가 나서겠습니다.”
그와 함께 공부를 도와서 황태자가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낸 것처럼 보이게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레나드가 황자는 믿지 않았지만 그의 신하는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대는 믿는다만…… 아스테리아를 담았던 마음이 아무래도 좀 깊었던 모양이야. 그게 쉽지 않다는데 도대체 어떡해야 좋은가 말이야.”
가짜 예언이네 어쩌네 하면서 일을 꾸미게 된 것도 결국은 로나르드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준비를 시작하자마자 그깟 감정 때문에 일을 시작도 못 하게 될까 염려되었다.
“영애의 일은 자신의 탓은 할 줄 모르는 게. 혼자 땅을 파고 있을 것이 뻔해요. 황자 저하는 제가 딱 붙들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하와 함께 출정을 나가셔야 한다는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사가 살짝 비웃는 듯한 말을 꺼내자 그는 피식 웃었다.
“내가 싸우러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그의 다짐에 기사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