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째는 확실하게-100화 (100/106)

100화

“잘 지냈어요?”

정신을 차리고도 씨씨와 헤르딘은 떡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이 천사나 여신이 아닌 것은 알았는데, 그들이 알고 있던 사람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고운 그 목소리와 온화한 미소에는 여유로움이 넘쳤다.

“아가씨…….”

“내가 좀 많이 변했죠?”

막 변하기 시작할 때쯤 이 집을 떠났다. 열심히 빗질을 하기는 했지만 머리카락은 아직 윤기가 나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거나 때가 잘 지지 않아 얼룩덜룩하던 드레스에서 벗어나긴 했어도 어딘가 만들다 만 것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씨씨가 드레스도 만들어 주고, 헤르딘이 빗도 만들어 줘서 그때도 굉장히 예쁘게 꾸밀 수 있었어요.”

그 이전을 생각한다면 그것도 굉장히 감지덕지였다. 적어도 어디 귀족가의 영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까.

살짝 예전의 일을 생각하며 꺼낸 말이 그들을 각성시켰다. 씨씨가 만들어 준 드레스와 헤르딘이 만들어 준 빗은 이 집을 나갈 때 가장 먼저 챙긴 것이었고, 아직도 그녀의 짐 어딘가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아가씨, 이제 그런 허접한 것은 버려 주세요. 정말,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던 것을…….”

드레스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씨씨였다. 씨씨는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드레스가 생각나자, 창피해졌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정말 엉망일 것이다.

기본 바탕은 아스테리아의 드레스라 재질이 고급이었지만 말이다.

“씨씨. 누군가 제게 새 드레스를 사 준 적도 없지만……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옷이라니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신전에 들어갔을 때 신녀복을 만들어 주는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씨씨가 떠올랐어요.”

아스릴은 애틋한 눈으로 씨씨를 바라보았다.

데모트에서의 일은 새까맣게 잊고 싶은 것들 천지였지만, 단 하나 자꾸 가슴을 건드린 것은 씨씨였다.

리프네도 모자라 레나드에게까지 직접 씨씨를 데려올 방법이 없나 상담을 했을 만큼.

“아, 저…… 아가씨, 저희는 스튜로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함께 드시겠어요?”

“헤르딘……!”

헤르딘이 배고픔을 못 이기고 그렇게 말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씨씨가 만든 음식을 그녀도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씨씨는 화들짝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기 때문에.

“좋아요. 주방장이 아직 남아 있어요?”

존대를 쓰는 것도 여전했다. 아스릴은 부엌 쪽을 기웃거렸다. 안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스튜는 씨씨가 만들었어요, 아가씨. 대부분 어제까지 다 나갔고, 지금 저택에는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아스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명령을 내리도록 제가 레나드에게 부탁한 내용이었다. 데모트 일가의 목숨을 구제할 길을 마련해 주고 보니 여기서 일하던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채 날벼락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도 씨씨였다.

씨씨가 선택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갈 곳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씨씨는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혹은 가고 싶은 데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그래서 나흘이 지난 오늘 이곳을 방문했다.

씨씨는 마지못해 부엌으로 가서 스튜 세 그릇을 펐다. 그나마 남아 있던 호밀빵이 있어서 그것도 대충 썰어 구색을 맞춰 보았다. 신선한 샐러드용 채소가 없어서 한동안 주변을 배회하다가 오렌지를 발견해 그것도 같이 챙겼다.

씨씨가 커다란 쟁반에 음식들을 받쳐 나오자 헤르딘이 냉큼 달려가 그것을 받아 왔다.

데모트가에 와서 따뜻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 나한테 먹다 남은 식은 거 말고 새로운 음식 내놓으라고 막 큰소리 내고 그랬는데, 주방장 많이 당황했겠죠? 주눅 들지 않으려고 괜히 센 척하고 그랬어요.”

웃음 띤 아스릴의 목소리가 들려 두 사람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숟가락으로 큼직한 브로콜리를 뜨곤 아련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스릴이 제법 아가씨답게 살았던 몇 개월 전에는 어떤 생활을 했는지 두 사람 다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들의 뜻이니 거스를 수도 없어 몰래몰래 곁눈질로 확인하고 챙겨 주고 하던 나날들이 살얼음판 같았으니까.

“주방장도 아가씨에게 따뜻한 음식을 드릴 수 있어 기쁘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아가씨가 왜 큰소리를 내야 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다른 이들은 그저 생각 없이 주인이 하는 대로 아스릴을 대했지만, 두 사람은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접점이 별로 없었던 헤르딘은 아스릴을 도울 수 있게 된 지 얼마 안 됐었지만, 씨씨는 아가씨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은근슬쩍 돌보고 큰일이 나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다.

그나마 저택을 떠나기 전 아스릴이 태도를 바꿔 준 덕에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어서 그걸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때 아가씨께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변화해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했어요. 정말…… 너무 감사했어요.”

아무도 음식을 챙겨 주지 않아 굶어 죽을 뻔했던 일이 생각났다. 하필 그때 자신은 휴가를 받아 이틀 정도 밖으로 나가 있던 때였다.

혹시나 싶은 불길함에 제일 먼저 들어와 아스릴의 식사부터 챙겼는데…….

‘씨씨, 나 아스릴 아가씨 식사로 뭔가 올라가는 걸 못 본 것 같아. 확인 좀 해 줘.’

주방장이 4층까지 올라가는 것은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라 눈치를 보고 있던 주방장 덕에 씨씨는 아무도 아스릴의 식사를 챙겨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스릴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주방장도 그녀의 변화를 굉장히 달가워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아스릴은 진심으로 자신의 변화를 반가워해 주는 사람들이 이 저택에 셋씩이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렐린은 그 시간 동안에도 완벽하게 저를 버린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제가 스스로 원하고 행동했다면, 도와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왜 여기로 왔냐면…….”

그래서 이제는 말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씨씨가 진짜 원하는 게 아님에도 자신이 꺼낸 말이라고 냉큼 따라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꺼내길 망설이고 있던 말이었지만.

이제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씨씨가 있었으면 했어요. 이곳이 씨씨에게도 편한 거라면 굳이 데려갈 필요 없으니 그냥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요.”

하려는 말이 무엇일까. 씨씨는 아직 아스릴이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헤르딘도 살짝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스릴을 지켜보았다.

“모두들 갈 길 찾아 가라고 하고 시간을 준 것도, 바로 안 오고 나흘 지나서 온 것도 다 그거 때문이에요. 씨씨한테 선택의 시간을 주고 싶었어요.”

“아…….”

씨씨의 눈동자가 잠시 일렁였다. 그제야 아스릴이 하고 싶어 했던 말을 알아차린 헤르딘도 옆에서 입을 떡하니 벌렸다.

“씨씨, 갈 곳이 없다면,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다면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가지 않을래요? 가서 내 시녀가 되어 줘요.”

엉망이었을 때에도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지켜 주었던 씨씨가 옆에 있어 준다면……. 아스릴은 레나드에게도 하지 않은 청혼을 하는 느낌으로 씨씨에게 제안을 했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씨씨의 대답을 기다렸다. 길어지는 침묵에 애타 하며 레나드가 혹여 결혼하자는 프러포즈를 해 온다면 애태우지 말고 바로바로 대답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씨씨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런 아스릴을 바라보았다.

데모트를 떠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아스릴이었다. 좀 나아지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건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연히 떠나 버렸으니까.

신전으로 가셨으니 물론 여기보다야 훨씬 대접받고 사시겠지만…… 씨씨가 알기로 명예 신녀에는 기간이 있었다. 다신 이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을 아스릴임을 알았기에…… 더 걱정이 컸었다.

“아가씨, 저보다 젊고 유능한 시녀들도 많이 있을 거예요.”

“응. 황궁에는 시녀가 많아요. 황태자 전하의 곁에 있는 시녀장은 더더욱 씨씨를 떠오르게 할 만큼 닮았어요.”

리프네와 함께 황태자 궁을 둘러보다 씨씨 생각이 났던 걸 떠올렸다. 떠오를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다짐했다. 씨씨를 데려오겠다고.

“아, 헤르딘, 헤르딘은 갈 곳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갈 곳이 없어서 남아 있는 거예요?”

아스릴은 말할 땐 거침없었다. 사샤의 대답 앞에 잠시 환기를 시킨 그녀는 헤르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갈 곳이 없습니다. 목공 실력은 있지만 뛰어나지 않아 어디서 써 줄지 잘 모르겠습니다.”

멋쩍게 웃는 그를 보던 아스릴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헤르딘도 함께 가요. 황궁에 가면 분명 일할 자리가 있을 거예요.”

“……예?”

헤르딘은 두 여인의 애틋한 우정과 애정을 바라보고 있다가 찾아온 날벼락에 두 눈을 끔벅거렸다. 지금…… 아스릴 아가씨가 하신 말씀이 뭐였더라?

“아가씨,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겠어요?”

“씨씨, 헤르딘,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가요. 가서 거기서 일해요. 헤르딘은 자리를 알아봐 줄게요. 씨씨는…… 내 시녀가 되어 줘요.”

아스릴의 제안에는 물러섬이 없었다. 똑똑하게 전해 들은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황궁이라고 해 봐야 결국 아가씨의 곁이라는 것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씨씨의 얼굴에 약간의 물줄기와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