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데모트 백작가의 일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고……. 전하, 그렇다면 아도피트가 또 쳐들어온다는 예언이 가짜라는 말이 되니, 더 신경 쓸 일은 없는 것입니까?”
쥬페타가 한마디 더 꺼냈다. 기사들이 들어와 데모트가를 인계해 간 뒤 퍼진 그의 목소리에 귀족들은 오늘 모인 진짜 이유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레나드는 귀족들을 바라보고는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황후를 돌아보았다.
아직 모든 것을 말해 줄 필요는 없겠으나, 뒤통수를 쳐 줄 생각은 있었다.
“사실, 저 가짜 예언 때문에 잠시 알리는 것을 미루었으나…… 가짜 예언에 대한 소문이 돌기 전, 진짜 예언이 한 번 더 있었다.”
레나드는 뒤를 돌아보아 아스릴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보았다.
“이렐린께서 말씀하시길, 동쪽에서 한 번 더 파도가 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움직이려거든 지금 움직여야 한다고. 저는 예언을 들은 그날 황태자 전하께 알렸고, 이미 동쪽에 군대를 보내셨습니다.”
“오오.”
“역시, 예언자…….”
이제 그들은 아스릴을 완벽하게 이렐린의 아이로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마치 이렐린 동상을 바라보듯 보며 두 손을 모으기도 했다.
황후는 조곤조곤 읊조리는 아스릴을 매우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레나드는 놓치지 않았다.
아도피트의 침략은 황후의 계략이었다. 아마 증명 때문에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며칠 후 진짜 아도피트의 침략이 이루어져 그녀의 예언에 힘을 보탰을 것이다.
계획이 틀어진 것을 인지한 지금은 황제가 있는 별궁에 박혀 두문불출하고 있지만, 거기가 끝이 아닐 터였다.
‘무엇인가. 무엇을 준비한 것인가.’
입을 열기를, 어떤 단서라도 흘려 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신중했다. 가만히 입을 닫고 눈을 내리깐 채, 경청하는 척 자신의 생각에 빠진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 결국 눈을 거두었다.
“예언의 힘으로 벌써 두 번이나 동쪽의 영지를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체벌이라 하지만 인력을 신전에 보내었고, 그 외에도 이렐린의 신전에 소소한 감사를 보내고자 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번 신전 행사가 다가오는데, 저희들끼리 조금씩 기부금을 모아 볼까 합니다.”
“이렐린이 감사히 받고 모두 그대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그보다 신전에 자주 들르는 것을 더 좋아할 테지만. 모두들 수고했다. 조심히 돌아가도록.”
레나드가 친근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고, 아스릴이 그들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아름다운 선남선녀가 나간 뒤로 한동안 자신들이 방금 보고 들은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하나둘 회의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 *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데모트 백작저는 순식간에 제국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도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씨씨는 저택을 둘러보았다. 이 저택은 이제 제국의 재산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남겨진 고용인들에게 시간을 좀 주겠다고 했다.
돌아갈 집이 있는 자들은 돌아가고, 갈 곳이 없는 자들도 갈 곳을 찾아 나갈 수 있도록 최대 한 달의 시간이 주어졌다.
데모트 일가가 모두 신전으로 보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고용인들은 전부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러한 배려의 말을 듣고는 오히려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이미 떠날 사람들은 전부 다 떠났습니다. 씨씨는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헤르딘이 그렇게 물었다. 건장한 그는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느낌을 주는 하인이었다.
아스릴이 저택을 떠나기 전 몇 달 사이 그녀와 매우 친해져서 그녀를 위해 이거저거 챙겨 주던 이였다.
“나는…… 돌아갈 집도 없고, 나이도 있어서 어디 하녀로 들어가기도 어려울 테고…….”
“그렇습니까? 어느 귀족가든 씨씨를 하녀로 들이면 참 좋을 텐데요. 보물을 알아봐 주는 곳이 분명 있을 겁니다.”
씨씨는 그저 고요히 웃으며 손사래를 쳤지만 헤르딘은 전혀 아부를 떠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고용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래서 그녀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떠났을 것이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 잘 살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너무나도 심각하게 허무함에 휩싸여 있었다.
데모트가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고 하녀장까지 올라왔다. 무뚝뚝한 백작님이야 고용인들에게 크게 참견하지 않았지만, 극성인 백작 부인과 더 극성인 영애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애착이 있는 곳이었다. 데모트가 어렸을 시절 그 부모님이 워낙 좋은 분들이었기 때문에 데모트에 대한 애정은 대부분 그때 생긴 것들이었다.
지금의 데모트가 백작이 되고 부인을 들이고 아이를 낳으면서, 새로운 데모트 일가가 형성되어 가는 것도 모두 제 눈으로 보았다. 마치 아그로드에 이렐린이 있듯이, 자신이 이렐린이 된 것 같은.
이런, 이렐린에 대한 모독을 할 뻔했다. 씨씨는 조용히 손을 휘저어 이제까지의 생각을 떨쳐 버렸다.
“데모트는 내 일생이야. 너무 갑작스럽게 다 사라져 버려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어.”
그녀의 착잡한 목소리를 듣고 있던 헤르딘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떤 느낌인지,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도 꽤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서 일해 온지라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일할 곳을 구하는 것도 설렁설렁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하하하, 시원스럽게 웃으며 씨씨에게 공감해 주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저택에 퍼지자 그나마 어딘지 예전 같은 느낌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헤르딘, 얼른 일할 곳을 구하는 게 좋아. 한 달이 길 것 같지만 금방 끝날 거라고.”
이제 나흘이 됐을 뿐이다. 한 달은 한참이지만 그것만 믿고 게으름을 부렸다간 길에 나앉게 될지도 모른다.
“씨씨,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고 본인한테 하는 말이죠?”
하지만 헤르딘은 지지 않고 그렇게 응수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씨씨는 그를 데리고 걷기 시작했다.
“따라와. 같이 밥이나 먹자.”
“주방장 아저씨는 오늘 아침에 나가셨잖아요.”
“주방장 없다고 굶어 죽을 거야? 그럴 거면 네가 나가기 전까지 주방장을 붙들어 놨었어야지.”
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다행히 식재료는 가득 차 있었다.
어차피 재산은 모두 제국에게 넘어가고 데모트 일가는 그런 재산이 필요 없는 신전으로 갔기 때문에 거의 모든 물건이 저택에 남아 있었다. 장을 본 지 얼마 안 됐던 것도 그들에게는 천운이었다.
씨씨는 능숙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함께 부엌으로 들어가 씨씨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헤르딘이 넋두리를 했다.
“씨씨는 할 줄 아는 게 정말 많으시네요. 이러다 목공 일도 하시는 거 아닙니까?”
“목공이야말로 전문적인 일이야. 헤르딘은 좋은 일을 구할 수 있을 테니 열심히 알아보라고.”
이제 와 빵을 구울 수는 없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간단한 스튜였다. 몇 시간이고 뭉근히 끓이는 것은 할 수 없어서 각종 재료와 향신료를 듬뿍 넣은 스튜가 될 것이었다.
“자, 이제 푹 끓으면 돼.”
“스튜 한참 끓인 게 맛있는데.”
“지금은 그냥 먹고, 저녁때 다시 끓여 먹으면 훨씬 맛있을 거야.”
그녀의 모습이 마치 엄마 같아서 헤르딘은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용인들이 거의 다 떠난 백작저에 그녀만 혼자 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가 가장 주인 삼고 싶어 했던 아스릴 영애가 씨씨를 가장 좋아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녀장이었던 만큼 하인들과도 교류가 많아서 그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후를 알고서 떠나고 싶었다.
헤르딘은 스튜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항상 바쁘게 일하다가 나흘째 멍하니 앉아 있는 것도…… 사실 나쁘지 않았다.
부엌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계단을 오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가 돌아다니는 모양이네요.”
헤르딘의 말에 씨씨도 귀를 잠깐 기울여 보았다. 스튜 끓는 소리 중간중간 발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음, 점심 먹을 때 됐을 텐데. 음식 냄새 나니까 이쪽으로 오겠지?”
“배고프면 알아서 올 겁니다. 식재료 많이 있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요.”
씨씨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내리감기는 눈이 꼭 잠들 것처럼 평온해 보이는 그때.
“스튜 냄새…… 여기서는 처음 맡아 보는 냄새인 것 같은데?”
씨씨와 헤르딘은 어느새 잠이 들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소리뿐 아니라 눈앞에 실체가 나타났을 때, 분명 이건 꿈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인데, 어디서 천사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눈부신 금발과 투명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수수한 하얀 드레스.
“안 줄 거예요?”
마침내 그 천사가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말을 걸었을 때 두 사람 모두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씨씨는 심장이 멎을 듯 뛰는 것도 잊은 채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아 보았다.
“아스릴……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씨씨. 아, 헤르딘도.”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짓고 눈을 마주치며 씨씨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리고 있는 헤르딘에게도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 주었다.
마치 여신의 은총이 내린 듯, 그대로 얼어붙은 헤르딘은 목소리도 못 내고 있었다.
아스릴이 데모트의 저택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를 제외한 데모트 일가가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또 다른 데모트 하나가 이곳에 방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