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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98화 (98/106)

98화

본인들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막상 단죄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섯의 귀족들은 신기한 경험을 한 것에 대해 저택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나 신나게 이야기했을 뿐 정작 회의장에 나와 자신들을 훔쳐보는 귀족들을 보면서도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신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입이 근질근질해 옆에 있던 이에게 말을 꺼내려는 이가 있었으나 입구가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들을 보고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소리를 꾸울꺽 삼켜 냈다.

지난번엔 귀족들과 나란히 앉아서 회의장 한가운데를 내려다보던 데모트 백작이 오늘은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아스테리아를 부축한 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들어온 여인은 쭈뼛거리는 걸음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함께 회의장 가운데로 들어옴과 동시에 뒤쪽의 문도 열렸다. 그 문을 열고 들어오던 황후는 백작과 두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클로이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데모트가 원망의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발을 뺐으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데모트 백작은 그렇게 생각했으며.

‘결국 자기가 선택한 일인 것을. 영애는 신나서 해 대던데.’

클로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침묵 속에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누른 채 각자의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알렸는지, 제일 안쪽 문이 열리고 황태자 레나드와 아스릴이 등장했다.

“어제 우리와 함께 신전에 다녀온 이들은 수고 많았다. 그리고 그 소식을 기다리느라 다들 고생했다.”

레나드는 자리를 잡기도 전에 그렇게 말했다. 의자에 앉지 않은 그는 단상 한가운데에 서서 장내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들어온 아스릴은 그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정면에 그녀의 가족들이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데모트 백작, 한껏 힘이 빠져 버린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 뒤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눈물만 흘리고 있는 백작 부인.

“우리가 보고 온 것에 대해 누가 이야기를 해 주면 좋겠군.”

레나드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던 다섯 명의 귀족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쥬페타 후작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제가 설명을 드리죠. 신전 건물 뒤편으로는 큰 숲이 자리하고 있는 걸 아실 겁니다. 대체로 평탄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면…… 아, 아무도 그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기 때문에 시간을 재거나 고려해 본 자가 없어서 얼마나 걸렸는지는 정확하게 말씀을 못 드리겠군요. 아무튼 숨이 가빠질 만큼은 걸어 들어갔습니다.”

마치 이야기꾼의 말 같았다. 준비한 것도 아닌데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쥬페타의 이야기에 다들 귀를 기울였다.

“그만큼 걸어 들어가면 평탄한 숲 한가운데에 깜짝 놀랄 만큼 깎아지른 폭포가 나옵니다. 물줄기가 부서지듯 쏟아지는 곳으로 마치 실타래를 늘어뜨려 놓은 듯이 하얗고 촘촘한 폭포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였습니다.”

살짝 목을 가다듬은 그는 시선을 돌려 황태자의 뒤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매우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풍요의 상징인 이렐린의 아이는 오히려 자신에게 붙이는 것을 덜어 내어 본연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저기 황태자 전하의 뒤에 서 있는 아스릴 영애가 먼저 시범을 보였습니다. 폭포수 앞으로 갈 수 있게 놓여 있는 받침돌을 밟고 영애는 폭포수 앞 한가운데로, 그리고 대신관님께서는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걸 보이기 위해 그 옆으로 자리하셨지요.”

대신관의 부정이라는 말을 듣자 사람들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렸다. 그 소란이 살짝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쥬페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영애는 그저 손을 한 번 놀렸을 뿐입니다. 이렇게.”

‘이렇게’라고 말하며 그는 아스릴이 했던 그대로 팔을 움직여 보았다. 무언가를 걷어 내는 듯도 한 그 손놀림을 바라보는 귀족들은 눈앞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영애가 폭포수 앞에서 손을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촘촘한 실타래 같았던 폭포수가 이렇게 걷혀 올라가고 동굴 안으로 어떤 공간이 나타났습니다. 동굴은 매우 깊이가 깊었는데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아, 대신관님께서 그곳을 이렐린의 신전이라 했지요.”

‘이렐린의 신전’. 사람들이 또 웅성웅성하며 그 이름을 입으로 곱씹었다.

“저기 저 아스릴 영애는 그곳을 자주 오가며 안쪽 동굴을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눈을 맞춰 오자 아스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은…… 저 앞에 있는 데모트의 영애 차례였습니다. 영애는 아스릴 영애와 마찬가지로 그 앞에 서서 손을 움직였지만…… 폭포수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어떻게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설명은 그렇게 끝이 났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이야기가 끝나 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의 눈동자는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그 증명은 대신관이 알려 준 것이며, 아스릴은 증명에 그치지 않고 수시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레나드가 정리에 들어가자 쥬페타는 자리에 앉으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희 다섯 명은 보았습니다. 아스릴 영애의 능력은 예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성력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신성력이요?”

“그럼 한 번에 두 가지 능력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제국의 번영을 돕는 신전, 그중에서도 이렐린의 능력을 받은 이렐린의 아이는 많은 도움을 주곤 했었다. 아스릴만 해도 이번에 아도피트의 침략을 예언해 주지 않았던가. 직접적인 부와 명예를 올리는 역할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하는 일들은 두루두루 좋은 일들이었다.

“증명에 실패한 데모트의 영애가 돌 위에서 미끄러져 폭포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을, 아스릴 영애가 신성력으로 잡아 주었습니다. 밧줄도 없었고,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명백히 그녀의 힘이었습니다.”

“대신관님께서도 신성력을 사용할 줄 아십니다!”

저 구석에서 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반문에도 쥬페타는 동요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린 어디쯤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먼저 데모트의 영애를 잡아서 버티고 있는 와중에 대신관님께서 움직이셨다네. 위에서 잡아당기는 아스릴 영애의 힘 외에 밑에서부터 데모트 영애의 등을 올리는 힘을 쓰셨고.”

그 외의 네 명이 곳곳에서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제 모두들 아스릴을 거의 신을 보듯이 우러러보았다.

“그렇다면 저 영애는 가짜로 예언을 말한 것이 되겠군요!”

“어떻게 그런 망발을!”

고요가 지나가자 비난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23년을 살면서 한 번도 손가락질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여인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점점 움츠러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와중에 어쩜 이렇게 처참할 수 있을까 마음이 착잡해졌다. 아스릴은 똑똑히 두 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아 버렸다.

“이자들을 당장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전하!”

그들은 그 와중에도 황후를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똑똑했다. 괜히 진실을 밝히겠답시고 황후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려다가 되레 깊은 수렁으로 빠져 버릴 테니까.

황후야 발뺌을 하면 그만이고, 만난 적 없다 빠져 버리면 끝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믿어 줄 것인가. 아무런 혐의도 없고 이유도 없는 황후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나드는 조용히 눈앞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처벌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아스릴과.

그녀에게 물었다. 그들에게 어떤 벌을 내리고 싶냐고 말이다. 하지만 아스릴은 큰 벌을 내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자신과 상관없이 어디서든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게 전부였다.

‘그들이 나에게 나쁘게 했던 걸 상기시키는 건 기분이 별로예요. 그냥 제가 신경 안 쓰이도록 살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벌을 내리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었다. 그때 신을 기만하고 황태자 전하를 기만하려던 영애 때문에 가문이 망했다, 얼마나 처참하게 죽었는지 모른다, 하면서.

그것은 그들을 영원히 살게 하는 일이었다.

변방 어딘가로 보내 버릴까도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그들의 눈앞에서 아주 치워 버리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문제없이 살고 있음을 믿을 수 있게 하고, 맘만 먹으면 제대로 살고 있는지 확인까지 가능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처벌에 대해 이미 결정한 바가 있다. 데모트 백작과 그 식솔은 들어라.”

레나드는 장내의 소란을 가라앉히고 바로 그들을 불렀다. 힘없는 눈동자들이 그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이미 깊이 체념한 듯한 반응을 보면서 레나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쩜 그대들은 신과도 같은 아량을 베푸는 자식을 낳아 놓고도 이렇게 힘들게 사는 길을 택했는가. 이 사람 하나만 잘 보듬었다면 그냥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워 봤자 이제는 다 의미가 없었다. 자신들의 욕심을 멈출 줄 몰랐던 대가에는 지금 이 결론이 아주 적절하다 생각했다.

“데모트 백작과 그 식솔들은 이렐린 신전으로 가서 허드렛일을 하며 평생 보통 신관의 신분으로 살 것을 명한다. 그들에게서 지위는 없어질 것이며, 신분은 보통 신관이되 신전의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이렐린의 베풂을 스스로 느끼고 사는 것으로 벌을 내리겠다.”

“하…… 하지만 그것은…….”

“나와 아스릴과 그리고 대신관이 함께 내린 결정이다.”

레나드는 묵직한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일축했다. 데모트 일가는 바로 사흘 후, 그렇게 바로 황궁에서 나와 신전으로 보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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