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짧게 왔다 간다니 아쉽구나.”
“우리 불과 며칠 전에 황궁에서 만났었는걸요.”
황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의 침울한 분위기와 다르게 정작 아스릴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는 대신관과 경쾌한 대화를 나눈 후에 마차에 올랐다.
“바로 처리해 버릴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황후와 엮인 일까지 드러나거든 복잡해질지도 모르지만.”
예언이라는 거짓말로 황실을 모독한 데모트가는 엄벌에 처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황후와의 연관성을 밝힐 수밖에 없게 된다면 그땐 또 뭐가 더 가중될지 알 수 없었다.
“그쪽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쪽이라 함은 황후도 되지만 동쪽에 보낸 군사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소문으로는 숲이 무성하다 하는데, 보기에는 꽤나 쌩쌩한 나무들이 많았다. 조금 강해지면 그때 움직일 것이었다.
“우선 돌아가면 열심히 산책할래요. 너무 앉아 있기만 해서 정말 돌아보고 싶은 곳이 많아요.”
그와 함께하고 싶으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생각하려니 얼굴이 조금 빨개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예언은 철회될 것이다. 다만 그것 대신 그대가 얼마 전에 들었던 예언을 내세워 데모트가의 처분을 요청한 다음에 그로 인하여 군대를 이미 보내 놓았다는 말부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 이후는…… 생각해 보아야겠군.”
이미 그곳에서 아스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군대를 움직이기를 자처했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알콩달콩했다. 부드러운 미소와 간담이 얽히고 웃음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천장이 높은 마차 안에서도 따스함이 넘쳤다.
“저, 레나드. 유리 온실에 가고 싶어요.”
레나드는 문득 아스릴이 꺼낸 이야기에 살짝 놀라 돌아보았다. 다시는 못 가게 된 것은 아니니까 천천히 때를 노려 보자 싶었던 것이다.
“괜찮겠는가.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레나드는 그 뒤로도 몇 번 그녀를 달래 가며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마차가 황궁에 당도할 깨까지만 조금만 더 마음을 다잡아 보아라. 그리하자.”
두 사람은 유리 온실로 향했다. 그때 이후로 바쁜 레나드 대신 그녀가 항상 찾던 곳이기도 했고. 그의 윗세대, 부모님과의 일이 연관되어 있다 보니 애틋한 마음이 더 자극을 받는 것만 같았다.
“관리를 아주 잘해 놨군. 여전히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보면.”
레나드의 말대로였다.
여전히 아름다운 곳에 이 사람과 올 수 있어서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스릴은 이렐린의 신전이라 불렸던 동굴에 갔던 때처럼 기도를 하였다.
그녀가 저를 어둠의 구덩이에서 구해 주었고, 황태자를 도울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다행이에요……. 사실 여길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라 너무너무 마음을 졸이고 있었어요. 꼭 다시 오고 싶었는데 뭔가 발전이 없는 거 같고, 이 의미 있는 공간을 버려두고 싶지도 않고요.”
레나드는 아스릴이 유심히 유리 온실 곳곳을 들여다보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혹여 그날의 충격적인 장면을 다시 떠올린다거나 해서 상태가 안 좋아진다면 얼른 보듬어 줄 생각이었다. 지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니 기억을 온전히 받아들이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그건 조금 아직 어려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 온실 안에 앉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부터가…… 큰 가능성을 보이는 것 같아요.”
레나드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의 이야기가 담긴 온실은 아까의 신기했던 마음에 더하여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이곳을 첫 데이트 장소로 삼아 준 것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과거의 기억도 모두 공유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를 붙들고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나누면서 둘이 손잡고 한 발 더 앞으로 내딛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다 털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난다면, 이제는 앞을 바라보며 온전하게 오늘을, 내일을, 그리고 먼 훗날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될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가 차올랐다.
아스릴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레나드의 손을 톡톡 건드리다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렸다.
그 손을 꽉 쥐고 웃어 주는 레나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그 웃음에 환하게 마주 웃어 주기 위해서.
그는 아스릴이 유리 온실에 간다고 하면 무조건 따라나섰다. 함께 그 긴 길을 걸으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좋아하는 날씨, 싫어하는 날씨부터 책 이야기, 호수 이야기, 제국의 지형과 지역들의 특색 등 뭔가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배운 거 없이 그저 책 한 권 통째로 외우는 것밖에 장기가 없었던 아스릴이었지만, 도서관에서 살았던 시간만큼 이렇게 레나드와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갈 수 있는 지식이 생겨서 너무너무 다행이었다.
“이렇게만 하면 된다. 앞으로도.”
“아마…… 여기가 레나드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곳이라서인가 봐요. 계속해서 그 생각을 하거든요. 소중한 사람과의 중요한 기억이 있었던 곳으로 말이죠.”
물론 자신이 습격을 당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레나드의 깊은 추억이 담긴 공간이었다.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말만 하지.”
“레나드에게 그만큼 사랑을 듬뿍 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있다는 것부터가 크나큰 행복이라는 것을 또 하나 배워 간다. 그에게서는 항상 배워 가는 것이 많아서 도서관보다도 더 광활한 사람인 것 같았다.
“좋아. 내가 주는 사랑은 한도 끝도 없을 테니, 그대는 나날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겠군.”
아스릴은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국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게요.”
유리 온실 안에는 따스한 공기만큼이나 따뜻한 말과 웃음소리가 가득 울리고 있었다. 그날의 비명은 한순간의 기억일 뿐이었다.
이제부터는 이 청량하고 맑은 웃음소리가 여기저기 심어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