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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96화 (96/106)

96화

겨우 걸음을 떼는 아스테리아를 데리고 돌아가는 길은 느리고 또한 고요했다. 숨소리마저 고요해진 일행을 뒤에서 바라보며 아스릴은 낮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힘들게 끝낼 일일 줄은 몰랐네요.”

한숨을 쉬었더니 몸에서 빠져나가는 숨을 따라 힘도 같이 흘러나가는 것만 같았다. 레나드가 당장 업히라고 할 것만 같아서 가까스로 버티며 발을 놀리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레나드는 그녀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업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꾸욱 참으며 그녀를 부축해 주는 것으로 겨우 마음을 다졌다. 업는 순간 매우 창피해할 것을 알고 있으니까.

“너무 힘들면 얘기해라. 업은 채로 한참 뒤처져서 가면 되니까.”

레나드의 세심한 배려에 아스릴은 그 와중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까는……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던데.”

아스릴이 아스테리아를 붙잡기 위해 받침돌 위로 올라갈 때만 해도 참 대단하다 생각했다. 그 위험한 순간에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순식간에 힘을 썼다는 것에서 그녀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 저렇게 구해 주면 아스테리아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에 레나드가 오히려 놀랐다.

“내가…… 구해 주러 올라간 나를, 마치 살인자를 보듯이 바라봤어요. 당장이라도 자기를 죽일 사람을 보는 것처럼 보는데…… 그게 너무 충격이었어요.”

살리고자 하는 사람한테 그런 시선을 받는다면…… 당연한 감상이라고 여겨졌다.

“그래도…… 알긴 아나 봐요. 자기가 한 일이 살의를 품을 만큼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요.”

개인적인 복수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인 것이다. 제 손을 더럽혀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저들에게 폭력을 쓰고 싶지도 않고 살인자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그래, 그래서 그냥 백작저를 훌쩍 떠났던 것인데 말이지.”

방금 폭포 앞에서 그녀가 한 말, 그 말이 찰떡이었다. 그저 떠나고 싶을 뿐이었는데.

“한 번만 더 다 버리고 훌쩍 떠나 보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저들이 내 발목을 잡는다면 그땐 주저 없이…… 해 버릴래요. 그들을 내 인생에서 적극적으로 없애는 것.”

얼핏 순화된 표현인 듯하지만 말투가 더해져 무척이나 살벌한 말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단호한 다짐에 레나드도 응원의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 뒤로는 지친 몸 때문에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신전으로 돌아왔다. 피로감이 잔뜩 쌓인 귀족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안내를 따라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아스테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신녀 한 명이 달려와 기진맥진한 그녀를 부축해 갔다. 비척거리는 걸음걸이가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레나드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아스릴의 어깨를 도닥여서는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을 위한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리로 향하고 있었다.

“이렐린의 사랑마저 받지 않았다면 참 슬플 만한 삶이로군.”

“음…… 그래도 저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분명 많을 거예요. 굶어 죽을 뻔한 적은 있지만 그럴 때마다……. 아, 맞다.”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밤을 보낼 방 안으로 들어오자 조곤조곤 말을 시작하던 아스릴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를, 부드럽게 미소 지은 레나드가 조심히 옮겨 푹신한 소파에 앉혀 주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생각난 것을 말할 것 같은 기색이었지만, 문을 닫고 들어와서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어 내고 있을 때까지도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스릴?”

“아…….”

레나드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아스릴이 문득 소리를 냈다. 마주 바라보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 그녀의 기분이 잠시라도 좋아질까 걱정하고 있던 레나드는 겨우 나온 그녀의 미소에 살짝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미소와는 별개로 그녀가 멈칫대며 고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저어기…… 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아스릴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레나드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는 돌아다니던 발걸음을 돌려 그녀의 바로 곁에 자리를 잡았다.

갑자기 가까워지는 그에게서 움츠러들면서 조금 물러나려고 하자 레나드는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잡고는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그대가 부탁이라는 말을 꺼낼 줄은 생각도 못 했어서 잠시 흥분했다. 얼마든지 해 다오, 부탁.”

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레나드는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부탁하고 싶은 걸까. 드레스나 보석 같은 물질적인 것일까? 혹시 안아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닐 테고.

어차피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는 것도 아닌 그의 머릿속에서 나올 말에도 한계가 있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대신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데모트 백작가에 씨씨라는 하녀장이 있거든요. 그 집안에서 제게 음식 가져다주는 것마저도 깜빡해서 하늘이 핑글 돌 정도로 허기가 져 있을 때도 씨씨가 먹을 것을 사흘 내내 제때제때 챙겨 줘서 아픈 게 나을 수 있었어요. 항상 제가 연명할 수 있게 도와주고 하녀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저를 아가씨로 대해 준 분이었거든요.”

어떤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말이 장황하게 길어지는 것일까. 레나드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채 그녀의 입 모양에 집중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궁으로 들어오면 어떤 어려운 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곳에서는 하녀장을 하고 있으니까 그대로 둬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데모트가의 평판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서…… 혹여 이번 일로 가문이 잘못되기 전에 거기서 데리고 나오고 싶어요. 혹시…… 그 하녀장을 황궁에서 거둬 주실 수 없나요? 황궁의 시녀로요. 그리고 웬만하면…… 제 시녀가 될 수 있다면 더 좋겠고요.”

조곤조곤 설명을 늘어놓는 아스릴은 눈치를 보며 레나드를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제가 이런 부탁을 한 것 때문에 조금이라도 화가 나거나 귀찮은 기색을 보인다면 대번에 부탁을 철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나드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아스릴이, 그가 제 부탁에 대한 대답을 한 게 맞나 의심을 할 정도로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신 거예요?”

“그렇다.”

“제가 데모트가의 하녀장을 시녀로…… 그것도 제 시녀로 들일 수 있는지를 여쭤본 것이었어요.”

“제대로 이해했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신 거라고요?”

아스릴의 질문은 끝도 없었다. 레나드는 뭐 그리 어려운 부탁을 한다고 이렇게나 걱정하고 있는지 이해를 잘 못했다.

“그래. 데모트가의 하녀장 씨씨를 아스릴의 전속 시녀로 들이는 것을 부탁한 것이다. 맞지?”

레나드가 또박또박 다시 말하자 아스릴은 그제야 마음이 시원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숙원 사업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아스릴에게 그런 소중한 인연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꿈에 그대가 와 주어서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해.”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어디서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인지 그는 방 안 테이블 위로 종이 하나를 꺼내 놓고 빠르게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저도 그래서 잊고 싶지 않아서 종종 떠올리고 있어요. 그러면서 항상 데리고 나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혹시 나오라고 했는데 나오기 싫어하는 것은 아닌가 항상 생각하고 고민했었죠.”

“지금은, 고민에 대한 답은 찾았는가?”

아스릴은 그의 질문에 고개를 살살 저었다. 아직 그녀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 서툰 편이었다.

“뭐 하기도 전에 정답부터 찾겠노라 머리만 굴리고 있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듯하군. 하고자 하는 일이 있고 내 허락도 받았으니, 다음엔 언제 그 이야기를 전할지를 정하면 되는 것인가.”

씨익 웃는 레나드의 미소에 아스릴이 씨익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아, 오늘 잠은 여기서 같이 잔다고요?”

아스릴은 그제야 자신이 그와 들어온 방이 어떤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싫은 것인가.”

레나드는 대놓고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가 싫을 리가 당연히 없다. 다만 완전한 황태자의 공간이던 본궁과는 다르게 여기는 신전이라는 것 때문에 조금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싫을 리가요…….”

아스릴은 자신이 황궁을 매우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안에서 레나드는 어떤 상황이든 다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제가 누리고 싶은 것을 누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레나드, 안아 주세요.”

아스릴이 조심히 꺼낸 목소리에 그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향해 팔을 벌리자, 그는 그저 작은 몸을 끌어안을 뿐 아니라 번쩍 위로 들어 올렸다.

“꺅! 이게 아니라아…… 하하!”

빙글빙글 턴을 도는 그의 품 안에서 아스릴이 즐거운 웃음소리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가 함께 있는 신전의 어느 방에서 밤을 보내다니,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기가 너무나도 아쉬웠다.

“기대하는 만큼 부응해 주지.”

그의 목소리에 아스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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