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턱!
그 순간 마치 누군가 팔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며 아스테리아의 몸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 느낌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발끝은 아슬아슬하게 돌을 디디고 있었다.
“세상에!”
“데모트 영애!”
“오, 신이시여! 이게 무슨 일이람!”
아스테리아가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 추락하려던 그 자세 그대로 공중에 멈춰 버렸다. 아스테리아의 두 팔이 앞으로 뻗어 나간 채라 굉장히 기이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바들바들 떨며 공중에 매달린 아스테리아를 보던 레나드는 시선을 옮겼다. 왠지 저 힘의 출처가 어딘지 알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스테리아를 향해 손을 뻗은 아스릴이 온몸에 힘을 주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스릴!”
레나드가 급히 아스릴을 불렀다. 마치 추락하려는 아스테리아를 붙잡고 있는 듯한 모습에 붙잡아 주기 위해 팔을 뻗으려다가 흠칫 멈추었다.
아스릴은 지금 근육에 의한 물리적인 힘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칫 바깥에서 잘못 건드렸다가 그 힘이 잘못되면 큰일이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잡으면 안 돼, 멈춰.”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아스테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도 기이한 자세로 공중에 떠 있는 그녀의 등 쪽이 살짝 위로 들리는 것이 보였다.
대신관이 등 뒤에서부터 힘으로 밀어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힘을 받침 삼아 힘을 좀 나누어 쓰고 있는 것인지 아스릴이 점점 받침돌 위로 올라갔다. 서두르지 않고 신중히 내딛는 걸음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쯤 되니 다들 그녀를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서 끔찍한 걸 볼 뻔했던 이들이 안도하는 사이 아스릴은 아스테리아의 정면에까지 올라갔다.
이제 팔을 끌어 올리면 되었다.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거지?”
아스릴은 자신을 마주 보는 아스테리아의 눈빛에 질문을 던졌다. 분명 추락할 뻔한 아스테리아의 몸을 붙잡아 주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거기다 대신관까지 아스테리아를 올려 주기 위해서 등을 아래에서 위로 받치는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저를 바라보는 아스테리아의 눈은 본인을 구해 줄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사…… 살려 줘.”
아스릴은 겨우 열린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지금 어째서, 나를 그렇게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는 거지……?
그 얼굴을 더 보기 싫어서 아스릴은 힘을 담은 채로 아스테리아의 팔을 붙들었다. 신성력을 풀지 않은 채 천천히 끌어 올리는 그 모습이 공중에 떠 있는 것만큼이나 이상했다.
아스테리아가 아스릴처럼 똑바로 안정감 있게 받침돌 위에 두 발을 디디는 순간 당기고 받쳐 주던 이상한 힘이 훅 사라지고 아스테리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아, 신이시여.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네!”
“거기, 미끄럽다면 어서 내려오게!”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아스테리아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스테리아를 지켜보듯 내려다보고 있는 아스릴 또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왜 살려 달라고 했어? 내가…… 죽이기라도 할까 봐?”
아스릴은 방금 보았던 아스테리아의 눈빛과 살려 달라 말하는 떨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제가 살인마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뒤통수를 후려쳐서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스테리아는 바닥에 완전히 널브러지듯이 주저앉아선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두 사람의 기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입을 다문 채 지켜보고 있었다. 놀란 것이야 이 두 사람만 하겠느냐마는 묵직하게 흐르는 긴장감 때문에 마른침을 겨우 삼켰다.
“그, 그야…… 내가 널…….”
아스테리아는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땅을 짚은 어깨가 들썩이고 시선은 아직도 바닥에 고정된 채였다.
“아, 언니가 날 괴롭혔다고? 얼마나 괴롭혔길래…… 내가 언니를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스릴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차분하게 나오는 목소리에는 동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면 바닥에서 떨고 있는 아스테리아의 모습은 처참할 지경이었다.
얼핏 보면 마치 세상 여리고 공격을 받고 있는 쪽이 아스테리아고, 아스릴은 위에서 찍어 눌러 내려다보며 아스테리아를 괴롭히고 있는 듯이 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의 대화가 귀족들에게도 들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은 없었다.
그중 두 사람이 자매인지도 몰랐던 사람들은 자매의 이야기에 두 눈을 크게 뜨고,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중엔 서로 같은 상황임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건…… 그러니까…….”
“네, 그 집안에서 드러내 놓지를 않았다고, 아스테리아 영애가 이렐린의 꽃이 되도록 아스릴 영애가 뒤에서 뭔가를 막 했다는데요?”
“에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니!”
귀족들은 듣든지 말든지 자기들끼리 말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스테리아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듯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살짝 들었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아스릴에게서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겨를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언닐 죽이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나 보지…….”
처음엔 두 사람이 자매였다는 사실만으로 가볍게 입을 놀리던 이들은 자매의 대화가 왠지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자 서서히 자신들의 볼륨을 줄였다.
바깥에서 보기에도 아직 아스테리아가 불쌍한 듯이 보였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차분하던 아스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온갖 고통을 담고 있는 것 같은 그 찌푸린 얼굴에 일동 전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지, 지금…… 뭡니까, 괴롭히다니, 아스테리아 영애가…… 지금 어렸을 때 아스릴 영애를 괴롭혔다는 말입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스릴 영애를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요?”
“으이그, 제대로 집중 안 할래! 이러다 바깥에서 헛소리하거나 하면 전부 목숨 내놓는 거다!”
“아니, 그럼…… 저 아스테리아 영애가 그런 생각이 들게끔 못살게 굴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오, 이렐린이시여…….”
귀족들은 괜히 귀족들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머리를 굴려 가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파악해 내고 있었다.
“세상에, 데모트가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그 이야기가 궁금한가.”
곁에서 레나드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두 여인을 바라보며 쑥덕대고 있던 이들은 황태자가 꺼낸 말에 어깨를 흠칫거렸다.
레나드의 시선 또한 여인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떠들고 있는 귀족들과 다르게 레나드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못해도 일부를 목격한 사람이었다.
이 곱디고운 영애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백작저 4층에 가면 다락을 이어 놓은 듯이 연결된 방이 하나 있다. 천장은 낮고…… 먼지가 굴러다니고 벽지고 뭐고 없이 휑한 방. 방이라기보다 창고와 같은 곳. 그곳에서 그녀는 얇은 이불이 깔려 있는 침대에서 잠이 든다. 다 떨어져 가는 실내화를 직직 끌고 다니면서 3층까지 겨우 내려와도 그녀에게 허락된 장소는 도서관밖에 없다.”
레나드는 마치 무언가를 읊조리듯이 제가 본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입을 열었다. 점차 그 뒤로는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을 따라잡으며, 귀족들은 마치 자신이 다 떨어져 가는 실내화에 발을 조심스럽게 끼워 넣고 살금살금 복도를 나서는 모습을 상상했다.
“도서관이라니…… 설마, 이렐린의 노래……?”
귀족 중의 한 사람이 도서관이라는 말을 듣더니 뭔가를 하나 떠올렸다. 이렐린의 노래, 아스테리아가 모두 외우고 있다던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스릴이 그녀를 도왔다고 한다면 역시…….
레나드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잠시 멈추는 듯했던 레나드의 이야기는 조곤조곤 이어졌다.
“그녀에게 도서관이 허락된 이유는 단 하나. 언니를 돋보이는 이렐린의 꽃으로 만들기 위해 이렐린의 노래를 전부 외우는 것. 처음 몇 달은 제대로 외우지 못해 매를 맞아 가며 배워야 했고, 그 책을 낑낑거리며 들고 외출을 나가야 하기도 했다.”
레나드는 그녀에게서 그 말을 듣고 난 이후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자신이 보고 온 게 있었기 때문에 더 실감이 난 것일지도 모른다. 잿빛 방에서 생활하며 도서관을 벗 삼아야 했던 어린 영애를 저도 모르게 떠올리는 것이었다.
“이렐린은 참으로 공평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하…….”
귀족들은 함부로 그에 대해 입에 담지 못했다. 겨우 꺼낸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직도 대치 중인 두 자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고 싶은 말이 점점 쌓이고 쌓였지만 지금, 여기는 그것을 터뜨릴 때도 장소도 아니었다.
“나더러 죽이고 싶도록 원망하라고 그렇게 무시하고 부려 먹고 방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그게 내가 그 안에서 침묵했던 이유이고, 내가 신전에서 사람이 나왔을 때 다른 거 생각할 겨를 없이 냉큼 따라나섰던 이유였어. 그냥, 모르는 사람이 되어 사는 것. 그거면 족했으니까.”
그렇게만 했어도 그냥저냥 살아갔을 것이다. 아픈 과거는 지우고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든 거기서 멈춰 있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런데…… 그 기회를 버린 건 아버지와 언니야. 나로선 이제 그냥 무시할 수가 없게 돼 버렸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폭포수의 굉음을 이기고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