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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93화 (93/106)

93화

“아스릴, 그렇게 오랜만도 아닌데 반갑구나. 잘 지냈느냐.”

심지어 아스릴뿐만 아니라 대신관까지 그녀를 친근하게 대하자 보고 있는 이들은 넋을 놓았다.

예언자는 드물지만 신성력을 쓰는 이렐린의 아이는 꽤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대신관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이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정말 단 한 명도 없겠느냐마는……. 어쨌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아스릴이라는 영애가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었다.

모여 있는 귀족들에게는 그저 황태자가 어디 아무 데서나 데려온 것 같았던 아스릴이라는 아가씨가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신전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경들. 확인할 것이 있어 오겠다 했으니 필요한 것을 말하시게. 아, 우선은 안으로 들어. 피곤할 테니 차나 한 잔씩 하면서 쉬었다 가지.”

이렐린의 신전은 손님 대접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았다.

신관 하나가 나와 그들을 안내하는 사이 대신관은 자연스럽게 레나드와 아스릴 두 사람과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족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던 아스테리아가 아쉬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황태자와 대신관이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뒤에 끼어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스릴은 황태자와 있을 때보다도 더욱 친근하게 웃으며 대신관과 황태자 사이에서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제가 알던 아스릴은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꾀죄죄하고, 머리카락은 항상 엉켜 있으며, 하녀들 앞에서도 눈을 들어 마주 보지도 못하던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황태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관에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아스테리아는 미친 척 저기에 끼어 보고 싶은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놀라운 일이구나. 그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대신관은 귀족들의 뒤꽁무니에서 이쪽을 힐끔거리며 아쉬움 뚝뚝 흐르는 눈빛을 거두지 못하던 그녀를 알아채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누구인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 내가 대신관에게 알려서 이렐린의 꽃도 잠정적으로 박탈된 상황인데, 어찌 예언자를 자처할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이용을 당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스스로도 뻔뻔하던걸.”

데모트에 대해 말하는 레나드는 굉장히 살벌했다. 비아냥거리는 것이 듣고 있는 제가 다 서늘할 지경이었다.

“바로 데려와서 증명하자 하려고 했는데, 마침 안 계신다는 걸 알아서…….”

“그래도 내 외출이 길지 않아 다행이었구나. 자, 안으로 들자. 황태자 전하와 아스릴도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이렐린의 신전은 어두울 때 더욱 극적으로 보이니 그때까지 시간을 좀 끌어 볼까.”

대신관의 얼굴 주름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레나드는 이렐린의 신전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해졌지만, 아스릴은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레나드가 그런 반응을 하는 것도 이해돼요. 저도 그 이름 듣고는 의아했거든요.”

세 사람도 먼저 안으로 들어간 귀족들이 걸어간 길로 걸음을 옮겼다.

아늑하게 꾸며진 다이닝 룸에 티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귀족들을 안내한 이들이 갑작스러운 방문에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는 양해의 말을 구했지만, 티 테이블 위에는 향긋한 티와 각종 디저트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확실히 풍요와 나눔의 여신 이렐린의 신전다웠다.

한발 늦게 도착한 대신관과 황태자, 그리고 그의 여인이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이번에도 예언이 들렸다고. 그런데 다른 사람이 들었다 하던데 사실인가?”

이곳은 신전이었기 때문에 가장 상석에는 대신관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그의 시선이 대번에 아스테리아에게로 향했다.

방금 아스릴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다르게 아스테리아를 바라보는 대신관은 평소 귀족들이 알고 있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주름은 인자한 미소를 그리되 목소리와 눈빛은 꽤 근엄한 모습이었다.

풍요와 나눔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듯한 이였다. 신전이 뭐든지 다 퍼 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대신관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잠깐 그에 대한 긴장을 놓고 있던 이들도 다시금 긴장시키는 목소리인데, 아스테리아는 오죽하겠는가.

그녀는 공교롭게도 아스릴의 옆에 앉아 있어서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의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예, 예. 제가…… 들었습니다.”

“으흠.”

이렐린의 아이가 나타나면 누구든 대신관의 축복을 받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증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더 냉랭해진 것 같은 대신관의 모습에 괜히 동행한 귀족들이 더더욱 긴장하게 돼 버리는 것 같았다.

“예언자는 나오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듯한데 아닐 수도 있나 보군.”

레나드는 그런 긴장 속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음, 역사상으로는 한 번도 없었다네. 예언자가 같은 시대에 나타나는 일 말이야.”

황태자와 대신관의 말투는 매우 편했으나 그 내용은 모두를 한껏 더 긴장시켰다.

귀족들은 대체적으로 예언을 들었다는 아스테리아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저 절차로 필요한 일이니 함께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혹여 예언자가 한꺼번에 나오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면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왔고, 증명한 것을 아무도 보지 못한 아스릴 쪽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신전에 와서 두 사람을 대하는 대신관의 태도를 본 이후에야 일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슬슬 새로운 두려움이 일고 있었다.

만약…… 아스테리아 쪽이 가짜라면, 이라는 생각이 다섯 명의 귀족들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 쪽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2년째 이렐린의 꽃을 맡은 이라서였다. 당연히 신전 쪽으로도 연관이 깊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이렐린의 사랑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예언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이 데모트는 한마디도 제지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긍정이라 했던가. 회의장의 귀족들은 그래서 그녀의 말을 찰떡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 예언이 진짜인지 증명하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함께 목격해 증인이 되기 위해 왔고요. 그러니까…… 그 증명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방법이 무엇인지, 언제 할 것이기에 이렇게 한담이나 하면서 앉아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대신관은 귀족을 바라보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스릴이 자주 보았던 한없이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미소가 아니었다.

좌중을 압도하는 그의 미소 끝에 귀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기가 눌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증명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네. 다만 밤이 되면 조금 더 운치가 있고 보기에도 확실해서 말이야. 조용히 이야기나 나누다 천천히 움직여 보자고.”

쉬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했다 했지만, 대신관의 기에 눌린 귀족들은 그의 말에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릴은 잘 몰랐던 대신관의 카리스마에 놀라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항상 부드럽게 웃어 주던 이여서 마음 불편한 적 없이 정말 할아버지처럼 생각했는데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니, 아스릴? 증명 때 이후로도 그곳을 자주 이용했다고 들었는데.”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대신관은 확실히 자신의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넌지시 던진 이 질문에 그녀가 확실한 예언자라는 뉘앙스를 담뿍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대신관님. 신성력을 사용하시는 분들은 다 바깥에서 좋은 일들 하고 계시니 거길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자주 찾아가곤 했어요. 거기 가면 왠지 마음이 편해져서요.”

대신관의 물음에 아스릴은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귀족들은 점점 자신들이 예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가는 것을 보며 정말 기적처럼 두 사람 모두 이렐린의 아이라는 것이 증명되길 바라야만 했다.

그들이 벌을 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침에도, 낮에도 가 봤지만…… 증명을 위해선 확실히 해가 진 다음이 좋겠습니다.”

“그대들을 위한 방도 다 마련해 두었으니 증명을 확인하고 편안히 즐기다 돌아가시면 되겠군.”

그때에야 대신관의 미소가 부드럽게 변했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귀족들은 편안히 즐기다 가라는 대신관의 말에 오늘 이곳에 온 본질을 찾아 가는 듯했다.

일이 예상한 대로 되지 않는다면 책임은 전적으로 데모트가에 있는 것이었다. 물론 매우 불편한 분위기가 생기고 처벌당하는 데모트를 바라보는 것이 편치는 않겠지만 다른 것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

그냥 원래대로 예언자는 지금 레나드의 곁에 있는 아스릴이 되는 것이고, 아스테리아는 자리에서 물러나 주면 그만이었다.

간단한 해결책을 얻은 귀족들은 점차 긴장을 풀고 우선 눈앞의 디저트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점차 긴장을 푼 귀족들도 간간이 참여하는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이제 그 사이에 앉아 혼자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아스테리아만이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둥둥 떠다녔다.

시간은 점점 가까워져만 갔다. 이쯤에서 도망가야 하나, 여기를 빠져나간다고 해서 해결은 되는 것일까.

애간장이 녹을 듯이 고민하고 있는 아스테리아의 마음도 모르고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 버리고 말았다.

“자아, 이제 슬슬 일어나 볼까.”

테이블에 집중하고 있던 이들 중 몇몇은 그 말에 흠칫 놀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스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제 정말 증명을 위해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대신관의 말에 바로 반응하여 일어나는 아스릴과 다르게 아스테리아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돌이킬 수 없이 달리기 시작한 수레는 멈추지 못하고 절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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