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레나드는 은밀한 움직임을 모두 지휘한 후 아스릴과 목욕재계 후 함께 회의장으로 걸음 했다. 지난번처럼 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들어간다는 것은 꽤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회의장에는 이미 귀족들이 모두 자리를 하고 있었고, 지난번처럼 아스테리아가 회의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황태자가 나타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오늘 등장부터 그와 함께한 아스릴을 보고는 또다시 저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넓은 공간 한가운데 홀로 서 있던 아스테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턱과 보라색 눈동자가 아스릴의 눈에도 보였다.
아스릴은 화려하지 않은 신녀복을 입고 있었다. 명예 신녀로 들어갔을 때 에밀라가 만들어 주었던 그것이었다.
오히려 그런 신녀복을 입고 있는 그녀가 더욱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대들에게 통보를 하면서 말했듯이, 데모트가의 영애가 예언을 들었다고 한 지도 시간이 꽤 지났고, 그 이야기가 바깥에서부터 퍼져 나갔던 만큼 진위 여부를 빠르게 파악하고 대처를 시작해야겠다 여겼다. 그리하여 오늘 검증된 이렐린의 아이인 아스릴과 그리고 검증을 보증해 줄 귀족 대표와 함께 신전으로 떠나고자 한다.”
레나드는 등장하자마자 본론부터 치고 들어갔다.
그들에게는 오늘 회의장에 나오자마자 검증을 위한 인원을 뽑아 달라고 했다. 한꺼번에 간들 장소가 좁아 거짓 없이 한꺼번에 목격할 수 있는 인원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저희는 이렇게 다섯 명으로, 무작위로 정했습니다.”
공작과 백작, 후작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진 다섯 명의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관심 없었다. 데모트 백작이 빠져 있다는 부분에서 무작위로 정했다는 말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지체할 것 없이 떠나겠다. 데모트가의 영애는 준비가 되었는가.”
그녀는 회의장 한가운데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서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몸의 힘을 풀면 다리의 힘이 풀려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도망갈 길이 없다면 끝까지 가 봐야 했다. 이렐린께서 자신을 조금이나마 불쌍히 여겨 주신다면 기적을 보여 주지 않을까?
어리석은 기대인 것도 모르는 채 아스테리아는 당당하기 위해 애썼다.
정말 무작위로 동행인을 뽑는 바람에 아빠도 함께할 수 없는 자리. 눈을 돌리자 귀족들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턱을 살짝 잡아당기는 것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의지를 다지는 아스테리아였다.
남는 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들은 황궁을 떠났다. 마차의 행렬은 마치 신전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신전으로 향하는 귀족들의 행렬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다.
“데모트가 없는데도 뻔뻔하더군.”
레나드는 아까 회의장에서 보았던 아스테리아를 회상하고 있었다. 증명을 하러 간다는데도 당당히 그 자리에 나타난 것도 웃겼고, 데모트 백작이 함께 가지 못한다고 하는데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마저 가소로웠다.
아스테리아가 진짜로 이렐린의 아이였다면 아스릴의 예언 내용에 예언을 듣는 또 하나의 ‘이렐린의 아이’가 등장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어야 맞았다.
그녀가 이렐린의 아이가 되는 순간,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황후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렐린은 그들을 이렐린의 아이를 노리는 자들이라고 규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혀 고려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뻔뻔하죠? 이렐린의 꽃이 되고도 그랬어요. 이렐린의 노래를 외우지 못하는 건 흠이 아닌데도, 한 번 했던 거짓말을 실현시키기 위해 절 데리고 다녔어요. 하녀처럼 보이게 하고서.”
신전에 올 때마다 그녀를 데모트 백작 영애로 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쳐다보는 눈길이나 대하는 태도 모든 것이 하녀를 대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이 험하게 다루었다는 뜻은 아니었으니 신전에 억하심정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이 아스테리아의 뻔뻔함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너를 엄청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어째서 그런 미움을 받게 되었지?”
데모트 백작은 아스릴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첫째를 빛나게 해 줄 이로 또 다른 자신의 딸을 이용한 매정한 부모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난번 신전에서 설전이 오갔을 때를 생각해 보자면 그랬다. 아스테리아는 뼛속 깊이 아스릴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던 것 같았다.
“그건…… 사실 저도 모르겠어요. 언니가 왜 그렇게 저를 싫어했는지.”
사실 그녀에게 기억나는 그 어느 때부터 언니는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어여쁜 아이였고, 그녀는 그때부터 이미 천덕꾸러기였다.
그 시기에는 제가 이 집안에서 예쁨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따라가지 못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을 밀어내고 방치하는 것이 노골적이고 당연시되어 갔다.
어린 아스릴은 그것에 얌전하게 적응했다. 그들은 제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이었고 제일 먼저 사랑을 주는 사람도 언니로 정해져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와 왜 그랬냐고 물으면 부모님들은 그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기억도 못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살다 보니 네가 미워지더라, 하는 성의도 없고 기억도 없는 대답을 듣게 될까 봐 두려울 지경이었다.
애정 한 줌 없기로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너무도 당연하다 생각해 왔지만…… 그들에 대한 가족 같은 애정 혹은 애틋함이 없어서 너무도 다행이었다.
“……저 방금 너무 울컥했어요, 레나드.”
그의 질문에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아스릴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생각을 뚝 멈추었다. 그녀의 말대로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마주 앉은 채 그녀를 보고 있던 레나드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눈물에 손을 끌어다 부드럽게 잡아 주었다. 자신의 온기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그녀에게 안정을 주고 싶어서.
“그 사람들에게 가족이라는 애정과 애틋함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당연하게…….”
“그래, 그것이 맞는 생각 같다. 그들은 너를 해하려 했어. 괜히 가족이란 애정이 족쇄가 되어 끝까지 그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봤을 때 그의 말이 맞았다. 같은 맥락으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만…….
“그런데 그 가장 기본적인 사랑도 못 받고 자란 제가 가족을 꾸려도…… 괜찮은 걸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무서워졌어요.”
레나드와의 평생을 꿈꾼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었다. 그의 곁에 오래 함께하려면 결혼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아이를 낳게 될 것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이를 사랑해 주지 못하거나 혹은 둘 이상 태어난 아이들을 서로 차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스릴은 그런 것들이 두려워졌다.
“아스릴.”
한껏 시무룩해진 그녀를 바라보다가 레나드는 그녀의 이름을 나긋하게 불러 주었다. 따스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길 잃고 떠돌고 있던 그녀의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 사뿐히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경험들이 아프고 힘들겠지만 잊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들을 생각하며 그들과 같아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어떻겠나.”
레나드는 진지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그런 인간들 때문에 자신을 걱정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레나드도 비슷하게 자신을 몰아붙여 왔던 시간이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길어져 봤자 도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함께할 것이니까. 내가 잘못된 길을 가면 옆에서 지적해 줘. 아스릴이 잘못된 길을 간다면 내가 사뿐히 안아다 옳은 길로 옮겨 주겠다. 언제고, 몇 번이고 그렇게 해 주겠다.”
덜컹이는 마차 안이라는 것도 잊은 채 레나드와 아스릴은 서로에게 깊이 집중해 있었다.
맞잡은 손과 마주하는 눈빛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나누었다.
그때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스테리아를 태운 데모트가의 마차를 위시한 귀족들의 행렬이 신전에 도착했는지 일정하게 이어지던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 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웅성거리는 소리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다 왔나 보군.”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 있던 황실의 마차마저 움직임을 멈추자 레나드가 말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스릴이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네. 다 왔어요.”
아스릴은 레나드의 위로로 따스해졌던 마음이 신전에 도착했다는 말에 더없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진짜 제가 이렐린의 아이는 맞나 봐요. 신전에 얼마나 있었다고, 그새 제게 편안한 공간이 된 것 같아요.”
이게 바로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라는 것일까.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이 모든 게 다 편안할 것만 같았다.
마차 문이 열리자 먼저 레나드가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내려서 모여 있던 귀족들과 아스테리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레나드가 안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신녀복을 입고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리는 아스릴은 신전 앞에서 보자니 더더욱 눈이 부시는 것 같았다.
“아, 저기 오는군. 아주 다정한 한 쌍이 따로 없네.”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가 울렸다.
황태자와 이렐린의 아이가 연출하는 다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가 있던 이들은 생각지도 못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 화들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대신관님!”
레나드의 손을 잡고 바닥에 내려선 아스릴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신전의 정문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진 얼굴로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는 대신관이었다.
아스릴은 그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발을 놀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거의 달리듯이 그에게 향하는 아스릴의 모습은 할아버지를 찾아온 손녀 같은 친근한 모습이라 다들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