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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91화 (91/106)

91화

“뭐라고? 증명?”

회의가 끝나고 그 소식이 전해지자 별궁에 있던 황후는 열린 방문 안에 황제가 있다는 것도 잊고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소식을 전하러 온 이는 시녀장이 아니라 귀족 남자였다. 데모트와는 황궁에서 직접적으로 접촉할 일 없도록 다른 이를 포섭했던 것이다.

그는 황후의 일갈에 살짝 움찔했던 이는 눈치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스릴 영애는 이미 예언을 들은 날 신전에 있었기에 그 절차를 거쳤고, 그렇게 증명을 마친 예언을 전달하기 위해서 대신관께서 황태자 전하를 신전으로 불렀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증명할 준비를 하라고요.”

그래. 사실 따지고 보면 예언이라는 것은 아무나 아무렇게나 떠들어 댈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이날 이때까지 이렐린의 힘을 받은 것이라며 존중받을 수 있었을까, 거기에 의문이 생길 법도 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예언을 들었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두고 이렐린의 아이라 불렀으니 의심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뭐 하나 쉽게 풀리는 일이 없어!”

이렐린의 꽃이자, 이렐린의 아이라 불리는 아스릴의 언니이며 레나드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는 영애가 있는 집안이라 이러저러한 계획에 유용하게 써먹으려 했는데, 하려는 일들마다 자꾸 뭔가 어긋나기만 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면 그냥 안 맞는 게 맞았다.

“계획에 조금 써먹어 보려고 했더니. 그것도 잘해 줘야 자기 몫이 떨어지는 건데, 자기 몫은커녕 내 계획까지 무너지겠어.”

신경질적인 황후의 모습을 처음 봐서 잔뜩 기가 죽어 있는 귀족을 앞에 두고, 심지어 방 안에 황제가 있음에도 황후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마구 토해 냈다.

그녀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황태자가 지휘하는 군대가 동쪽으로 이동을 해 주어야 했다.

혼자 할 수도 있는 일임에도 그들을 끌어들인 것은 제의 움직임을 감추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로나르드가 아직도 아스테리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한 번도 말썽을 부린 적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이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이리도 철없이 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름뿐인 이렐린의 꽃이 아니라 진정한 이렐린의 아이로 만들어 힘을 실어 줄 계획이었는데…….

“어차피 아스테리아가 없어도 실행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일은 그대로 진행해 버려.”

쯧. 그게 그녀의, 그 집안의 한계인 모양이지.

이 이상을 신경 써 줄 의리는 없었다. 그만큼 해 주는 거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로나르드야 눌러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가 황태자가 되는 일이 먼저지, 황태자비는 그다음 일이었다.

아스테리아가 현재 제국에서 제일 예쁘다고는 하지만, 예쁜 사람이 그녀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인사할 타이밍을 못 잡고 있던 남자는 겨우 떨리는 목소리를 꺼냈다. 대꾸는커녕 아직도 거기 있었냐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을 받고서야 그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언제까지고 이 상태로 갈 수는 없었다. 거슬리는 것을 안고 가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이제 반려를 맞이하고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할 시기가 되었으니 결정을 내릴 때가 되었다.

어쩌면 시기에 맞춰 쓰러져 준 황제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전까지는 생각만 한가득이었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일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녀는 살벌하게 치켜떴던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괜찮아요, 폐하. 단지 황태자가 바뀌는 일일 뿐이니까.”

표독스러웠던 눈동자는 어느새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시 지친 기색의 얼굴로 돌아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서신이 오간 흔적은 발견했으나 그 내용까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회의가 있었던 그저께 오후에도 서신이 하나 아도피트로 향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침부터 침대 바깥에서는 보고하는 세드룬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스릴은 커튼이 내려온 침대 안에 누워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우리 군은 잘 도착했는가.”

“먼저 보낸 2만은 무사히 주둔을 마쳤습니다. 건너편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고, 강줄기를 따라 계속해서 정찰 중이라고 합니다.”

레나드의 목소리도 커튼 밖에서 울리고 있었다.

누워 있던 아스릴은 살며시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아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와 같은 침실에서 이 아침에 나란히 앉아 보고를 받는 것은 아직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녀는 인기척도 내지 않고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머지도 여차하면 출전할 준비를 하되 티 안 나게 조심히 준비하라. 지난번 일도 있어서 군대가 이만큼 비면 눈치챌 수도 있어.”

“아직까지는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어제부터 어딘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

“예. 로나르드 황자께서 어제 별궁으로 들어가 하루 종일 있다가 나오셨습니다.”

최근 아스테리아와 관련해서 두 모자의 사이가 조금 벌어진 상태였다. 그런 그가 황후와 함께 하루 종일 별궁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

“그러고서 나오는 길에 로나르드 황자님의 얼굴이 매우 복잡해 보였다고 합니다. 비장해 보이기도 하고요. 뭔가 어려운 일을 결정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고 전했습니다.”

레나드가 죽음으로써 어부지리로 로나르드에게 황태자 자리가 넘어오는 것이 제일 간편하겠지만, 그보다는 로나르드가 쟁취를 하거나 레나드와 엇비슷한 능력을 증명해 놓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자리를 꿰차는 것만큼 그 이후의 일도 중요하니까.

그런 만큼 로나르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녀가 이번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것일지도.

“좋아. 나는 할 일을 마치고 군대를 이끌고 가는 것으로 해 두겠다. 그녀의 예언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난 뒤에야 아스릴의 예언이 있었다는 것을 말할 생각이라.”

아스릴은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했다. 다행히 2만이 움직인 것은 또 다른 예언자가 있다는 소문이 황궁으로까지 들어오기 전이었다.

그의 발 빠른 판단에 감탄하면서 아스릴은 다시 귀를 기울였다.

“저는 그럼 다시 가 보겠습니다.”

세드룬이 그렇게 말하고는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나가고 나면 바로 나가서 오늘 할 일에 대해 말하려던 아스릴은 다음 순간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스릴 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기척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향해 인사를 남긴 것이다.

척척, 하고 옮기는 발소리를 듣다가 아스릴은 두 손에 고개를 파묻고 말았다.

“응? 왜 그러고 있지? 울고 있는 건가?”

그러고 있는 그녀를 향해 레나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이 걷히고 그가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아흐…… 제가 안에 있는 걸 어떻게 안 거죠……?”

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레나드는 그녀가 창피해하고 있는 걸 알아채고는 오히려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으잇, 그게 그렇게 웃긴가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자 아직도 소리 내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웃긴 거냐고 물어도 웃음이 사그라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우리는 전쟁까지 나가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 고요한 방에서 사람 기척 하나 느끼지 못한다면 더 이상 싸우러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얼굴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숨어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에 있는 것 자체를 숨길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우선 부끄러워하는 것부터가 너무 귀여웠다.

“우, 웃긴 일이었네요.”

고개를 팩 돌리며 부끄러워하던 아스릴은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밤새 그의 품에서 잘 잤더니 그를 보기가 더 창피해졌다.

이제는 레나드까지 부끄러워지려고 했다.

“하하하. 세드룬은 나를 더 신기해했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도망가는 듯한 자세로 뒤를 슥 쳐다본 아스릴은 그대로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왜 레나드를 신기해하나요?”

궁금하기는 한 모양인지 도망가던 걸음을 멈추고 질문을 던지는 그녀의 모습에 레나드는 또 한 차례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나 누군가를 옆에 두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거라는 걸 상상도 못 했겠지. 어머니 일찍 돌아가시고부터 밤엔 누구도 가까이 두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것도.”

감정이 메마른 채 살아왔던 것은 그나 저나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그나마 씨씨가 비쩍 마르지 않도록 지켜 주었던 감정이 레나드를 만나고부터 아주 폭풍 성장을 이루었다.

아스릴도 자신이 이렇게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도……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일까? 같은 마음이라면 너무너무 행복할 것 같은데.

“아버지…… 폐하께선 전 황후인 나의 어머니도, 지금 황후인 그 사람도 사랑했던 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사랑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 그런 나조차도 내가 신기할 정도로…… 그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온통 빠져 있었다. 싫다는 사람을 매일 보러 갈 정도로.”

아스릴은 도망가던 발걸음을 돌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제가 뭘 하러 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마치 안기라는 듯이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아스릴은 머뭇거림도 없이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크고 단단한 품에 그녀를 온전하게 품어 주었다. 이 온기가 기적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닿아 있는 순간순간 모두 다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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