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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90화 (90/106)

90화

한바탕 난리가 날 줄 알았던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귀족들은 아직 그 예언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말에 더더욱 혼란에 빠져 버렸다.

할 말을 잃은 아스테리아를 향해 증명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말만 남긴 채 레나드와 아스릴은 함께 돌아서서 회의장을 나섰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저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웅성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정말…….”

곁에서 분노에 찬 레나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릴은 오히려 그의 그러한 반응에 쿡 웃었다.

“아도피트를 이용한다고 생각했을 땐 다시 저 영애가 등장할 거라고도 생각 못 했지만, 이런 방법을 떠올릴 거라고도 전혀 예상 못 했다.”

레나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안에서는 태연하게, 조금은 귀찮은 척 아스테리아의 뻔뻔함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질문을 했지만, 곱씹고 생각할수록 기가 찼다. 어떻게 감히 신의 이름을 사칭할 생각을 했을까.

“분명 그들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닐 거예요. 백작이 저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대범한 사람은 아니에요.”

아스릴은 분노한 그의 손을 들어 올려 두 손으로 꼭 잡아 주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녀의 손길을 느낀 레나드는 곧바로 구겨졌던 미간을 풀었다.

“나도 참……. 그렇게 화가 났는데, 아스릴이 손 한 번 잡아 줬다고 다 풀려 버리고 밀이야.”

자조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안심한 아스릴도 그의 손을 더 꽈악 감싸 주었다.

“생각 같아선 지금 당장 그 데모트의 부녀를 끌어가 마차에 태우고 같이 신전으로 달려가고 싶었거늘.”

예언을 증명하는 데에는 성대한 준비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가서 손을 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하필 이 시기에 대신관은 어딜 간 것인지.”

애석하게도 그것을 공신력 있게 만들어 줄 대신관이 신전을 비운 상태였다. 그저 데려가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스릴이 직접 안내해도 무방했지만, 그렇게 한다면 뒷말이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말은 잘해 주었다. 대신관이 다른 데에 있어서 못 한단 말을 했으면 대신관에게까지 손을 댈 사람이야.”

“방법에 대한 힌트는 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저 단순히 준비할 것이 많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주면 좋을 텐데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을까? 영애의 얼굴만 해도 패닉에 빠졌던데. 백작의 얼굴은 못 봤지? 하얗게 질려 있던데.”

분노를 가라앉힌 레나드는 어쩐지 살짝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함께 긴 복도를 걸어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레나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회의가 끝났다고 그의 일이 전부 끝나는 것은 아니니까. 오늘은 잠들 때까지 그의 곁에 있기로 했다.

“그래, 그의 반응으로 보아선 아스릴의 말이 맞다. 그들은 이용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집무실로 들어오자 그는 별안간 다시 진지해졌다. 아쉬운 듯 그녀의 손을 놓고 책상 앞에 자리 잡는 그의 옆에 아스릴은 스툴 하나를 가져다 놓고 살포시 자리를 잡았다.

“어쩌면 그분이 최종적으로 하려는 일은 전쟁일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식으로 레나드를 곤란하게 만들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전의 전쟁에서도 아도피트의 침략 뒤에 황후가 걸려 있었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공격하도록 돕는다니, 아스릴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부분이지만 이미 그것을 해낸 사람이다. 더한 걸 한다고 상상한들 이상하지 않았다.

“새로운 첩자도 심어 두었고, 세드룬도 열심히 정보를 캐고 다니고 있으니 걱정 말고 기다려라. 그들이 생각보다도 더 유능하거든.”

자신의 부하들을 믿고 기다리는 그에게선 크게 걱정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일을 진짜로 배우고 싶은 것인가. 나 일하는 거 옆에서 봐서 무엇이 재미있다고.”

집무실에서 일할 땐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그저 편안하게 쉬거나 놀면 좋을 텐데, 그녀는 대부분 그의 곁에 이렇게 앉아 자신이 하는 일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이렇게 앉아서 하시는 일을 들여다보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일을 배워 보고 싶은 생각에 자꾸 보고 싶어져요.”

그가 하는 일은 제국 통치에 관한 것이었다. 아직 황궁의 입장에서 외부인인 그녀가 내용을 접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그냥 읽는 것만으로 며칠 정도는 외워서 기억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가 하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다 보니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감이 올 것 같았다.

“그리고 우선 곁에 있는 게 좋아요.”

일이 생기면 언제 나갈지 모르니까 최대한 오래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예쁜 말을 하는 그녀를 돌아보던 레나드는 돌연 은근한 눈빛을 지었다. 서류들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그녀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그렇게 나와 떨어지기 싫다면, 밤에도 함께하는 게 어떻겠나.”

갑자기 나온 말에 아스릴은 서류를 살피던 눈을 멈추고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볼이 따끔따끔한 것이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분명했지만,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빨갛게 익어 버린 귓바퀴가 드러나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한 채 말이다.

“그, 어, 저…….”

말을 더듬으며 긍정도 부정도 못 하는 아스릴을 바라보던 레나드의 손이 슬쩍 그녀의 가슴께로 향했다. 그대로 내려앉을까 봐 잔뜩 겁을 먹었던 아스릴은 그의 손이 그대로 더 위로 올라오자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뭘 그렇게 긴장했던 거지?”

그의 웃음 섞인 말과 함께 손이 안착한 곳은 그녀의 목덜미, 정확하게는 귀밑이었다. 지그시 그곳을 누르는 손길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알아채 버렸다.

“이렇게나 심장이 뛰고 있는 걸 보면…… 내 제안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군.”

심장의 박동을 짚고 있는 그의 손가락 감촉에 아스릴은 기어이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말았다.

“그, 그건…… 결혼한 다음에…….”

겨우 밀어내는 말을 꺼낸 아스릴이었지만, 레나드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곤 눈높이를 맞추었다.

코앞에는 깊고 푸른 그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 나도 아스릴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 밤에 특히나 많이 보고 싶어지더라고.”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어깨를 움츠렸다. 언제고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그와 같았지만…… 왠지 그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아스릴도…… 그게 뭔지 대충 짐작을 하고 있어서…….

“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게 빨리 익숙해지면 좋겠어.”

그녀가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도 그는 꿰뚫고 있는 듯했다. 그는 목을 감싼 손의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좋아요!”

마냥 부끄러워하고 시선을 피하던 아스릴이 갑자기 단호하게 외쳤다. 하필 귀가 가까이에 있던 바람에 레나드의 고막이 공격을 당해 버렸지만, 그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는 아스릴이 굳게 결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더 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그러니까…….”

대단하던 기세가 잠시 수그러졌다. 설명을 하려는데, 제대로 안 되는지 말끝을 흐리며 파란 눈동자가 떨렸다. 그마저도 사랑스러운 레나드는 웃는 얼굴로 그녀의 행동, 표정 하나하나를 살폈다.

“손대지 말라는 뜻이군.”

“으음…… 네.”

“어째서?”

그는 짓궂게 나오기로 작정을 한 듯이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호기롭게 ‘좋아요’를 외쳤던 아스릴은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키…… 키스까지는 봐줄게요.”

“하하. 그럼 차라리 밤에 내 방으로 오지 말아 줘. 그 약속은 지키기 힘들 것 같으니까.”

밀고 당기는 그의 말에 아스릴은 정신을 못 차렸다. 그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까지는 비슷하지만, 그 이상은 아직 무서웠다. 글로도 배울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울상이 되어 버린 그녀를 보고 있던 레나드는 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이 상태로 밤이 찾아온다면 그녀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당겨 가슴에 품은 레나드는 그녀의 떨리는 등을 도닥여 주었다.

“뭐든지 내 멋대로 앞서 나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밤에도 그대와 함께 있고 싶다. 내게 빨리 익숙해졌으면 좋겠어.”

짓궂게 굴어도 결국 그녀를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레나드였다. 그의 품에 안기면 그것이 제일 잘 느껴졌다.

그래서 좋아요, 하고 당당하게 대답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하다 보면 분명 스스로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조건 그렇게 될 것 같아서.

그에게만 걸어오라 하지 말고 자신도 그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싶었다. 자신으로선 어쩔 수 없이 그를 피했었지만, 그를 애태우게 만들었던 시간을 돌려주고 싶었으니까.

“저도요. 얼른 다가가고 싶어요. 더는 틈이 없도록 가까이.”

그녀에게서 나오는 말이 의외로 달콤해서 레나드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역시 제 심장을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건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녀뿐일 것이다.

“마치 이렐린이 내게 그대를 보내 준 것 같군. 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적 같아.”

오두막에서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은 신의 도움인 것 같았다. 도망가려던 이 여자를 끈질기게 따라간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을 정도였다.

진짜 신이 당신에게 나를 보낸 게 맞아요. 4개월의 ‘기회’를 주신 건 이렐린의 힘이었을 테니까.

끝내 그에겐 말하지 못할 그 사실은 가슴에 묻은 채로 사랑을 속삭이는 그에게 살포시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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