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수도의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는 상점들이 즐비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니 시장이 나왔다.
자원이 풍부한 아그로드에서도 수도의 시장은 상인들이 드나들기 쉽도록 접근성이 뛰어나 온갖 식재료와 옷감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만큼 몰려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아 귀족가의 하인들뿐 아니라 평민들도 자주 이용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최근엔 잘 보이지도 않더니. 뭐 먹고 살았대요!”
풍성하게 과일과 채소를 쌓아 놓고 팔고 있는 가게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가게에 접근하고 있던 여인도 그가 반겨 주는 목소리에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의 뒤로 수레를 끌고 있는 남자 두 명이 따라오는 것으로 보아 어느 귀족가에서 나온 하녀와 하인인 듯이 보였다.
상점 주인이 반길 만한 사람이긴 했지만 유독 반갑게 맞이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아가씨가 최근에 시집을 가셨지 않아? 식구가 줄었다고 주인님들도 식사를 잘 안 하시고 소식하시는 통에 이전에 사다 놨던 것을 소진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지 뭐야.”
“아하! 그 소식 저도 들었죠! 먼 곳으로 가셨다 들었는데, 상심이 크실 만하죠.”
물건들을 사면서 한마디씩 오가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시장은 정보가 떠도는 곳이기도 했다.
하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저장성이 좋은 작물들 위주로 물건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댁 아가씨께서 황태자비를 간택하는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알아차리질 못했다고 비관하는 통에 한동안 결혼 생각도 안 하고 사실 줄 알았더니.”
주인이 좋은 감자를 같이 골라 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목청껏 떠들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다행히 주인마님께서 주선해 준 영식이 마음에 드셨나 보더라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시데?”
하녀는 한 보따리 고른 감자를 수레에 싣고는 다시 돌아와 또 감자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황태자비 간택에 참여 안 한 게 다행 아닙니까? 헛꿈만 꾸고 돌아온 영애님들도 있다는데.”
상점 주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하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알음알음 준비했다는 황태자비 간택에 참여한 이들은 확실히 권력과 돈이 있어 이런 움직임을 빠르게 잡아낸 자들이었다.
실제로 최종 후보까지 갔다고 소문이 난 영애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더했다.
우선 벨파인 공작가의 영애나 데모트 백작가의 영애가 거론이 되는 것을 듣고 모두들 벨파인파와 데모트파로 나뉘어 누가 미래의 황후가 될지를 내기하고는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황태자비 후보도 데모트 영애라는 소문이 있던뎁쇼?”
감자 하나를 더 쌓아 주며 점원이 말을 꺼내자 그녀는 눈을 반짝 빛냈다.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에 사족을 못 쓰는 그녀의 성향을 잘 알고 있던 그였다.
“데모트 영애라니. 그 백작가에는 딸이 하나밖에 없지 않았나?”
“그게 바깥에 드러내지 않았던 딸이 하나 더 있었다잖습니까? 그때 왜, 올해 첫 신전 행사에서 이렐린의 꽃이 아파서 낭독 실수를 했을 때 대신 나와서 낭독했던 영애님이 그 둘째 딸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호오…….”
감자 두 보따리째를 수레에 실은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한참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채소 몇 가지를 더 집어 들며 주인에게 말을 시켰다.
“그럼 잘난 듯이 살고 있던 언니가 집안 구박데기한테 황태자비 자리를 뺏긴 모양이로군.”
“그런데 그 둘째 영애가 예언을 했다 하니, 그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죠.”
“그래그래. 데모트가에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 들었다. 최근에 아가씨 결혼 때문에 정신없이 살았더니 중요한 이야기들을 놓치고 있었네.”
그녀는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 데에 매우 흥미가 많은 모양이었다. 주인은 능숙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녀의 품에 양배추와 로메인 그리고 허브 같은 것들을 차곡차곡 안겨 주었다.
“아! 그 예언 말인데 말이죠. 이렐린의 아이라고 신성력 쓰는 사람은 몇 분 계신다 들었는데, 예언을 하는 분도 막 많이 나오고 그러는 모양이죠?”
하녀의 품이 또 한 번 가득 찼다. 이제 수레에 그만 싣고 계산을 하려던 그녀는 또 다른 채소를 들고 건네는 주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얼른 수레에 그것들을 싣고 다시 돌아온 그녀는 아직 주인이 들고 있던 양파를 챙기면서 대답했다.
“신전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예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한 시대에 둘은커녕 몇백 년 동안 한 사람밖에 없었던 적도 있다더라고.”
어서 이야기를 꺼내라는 듯 주인을 바라보며 하녀는 매대를 확인했다. 더 필요한 것이 없나 둘러보던 그녀는 과일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데모트의 둘째 영애에 이어서 이렐린의 꽃도 예언을 들었다던데요?”
“뭐어?”
과일을 하나 집어 들려던 하녀의 손이 멈추었다. 앞서 그녀가 말했던 대로 이렐린의 아이는 항상 있어 왔지만, 예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렐린의 아이’는 신성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쪽이었다.
제가 알고 있던 상식을 벗어나는 이야기에 기어이 하녀의 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미간을 모은 채 정말 심각하게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한 세대에 하나 나타나기도 어려운, 예언하는 사람이 둘씩이나? 그것도 한 가문의 자매한테서?”
“그러니까 더 신기한 것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아도피트가 다시 한번 침략해 올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다들 신기해하는 한편 불안해하고 있죠. 지난번엔 병력 파악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번엔 엄청난 대군이 몰려올 거다, 하니까.”
주인은 멈춰 버린 그녀의 곁에서 사과 하나를 더 얹어 주었다.
진지해진 하녀를 따라 그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예언을 둘이서 하든 셋이서 하든, 그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현재 황태자비에 유력한 후보가 둘이 되는 것인가, 하는 작은 의문 하나는 들었다.
“좋은 이야기를 들었어. 주인마님께서도 이 이야기를 좋아하실 게야.”
“시장 바닥에서는 쫙 소문이 나 있습니다요. 그 댁에도 조만간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을까요? 백작님께서 워낙 경황이 없으셔서 아직 못 들으신 거 아닐까요?”
하녀는 그의 말에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가야 할 때였다. 먹을 사람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만큼 덜 사야 했는데, 그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수레가 반 가까이 차 버렸다.
“주인장 말이 맞아. 곧 우리 주인님께서도 아시게 되겠지. 참 희한한 일일세.”
그녀는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는 가게를 나섰다. 수다도 떨고 물건도 잔뜩 판 주인은 떠나는 그녀에게 크게 팔을 휘둘러 인사해 주었다.
* * *
이야기는 시장을 중심으로 퍼지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그것에 미간을 찌푸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씨익 미소를 짓는 이가 있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던 백작 부인이 그를 향해 말했다.
“아이 이름을 그렇게 팔아서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래요?”
딸아이가 잘됐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마음은 그와 같았지만, 격한 방법에 적응을 하지 못한 그녀는 자꾸만 급격하게 앞으로 내달리려는 데모트가 미심쩍어졌다.
“이름 팔리면 좋은 거 아닌가. 유일한 예언자로서 칭송을 받는다면 그중의 하나를 무너뜨려 줘야지.”
데모트는 자신 있는 척 세게 말했지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아스테리아를 예언자로 만들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언자는 어느 것도 증명할 수가 없어 속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당장 그 자리에선 싫다고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아스릴에게 빼앗겼던 사람들의 관심을, 특히나 황태자의 관심을 가져오기엔 너무너무 적절한 방법이었다.
하여간 그 여자는 표독한 눈빛 뒤에 너무나도 교활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적으로 만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왕이면 아예 모르고 살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테리아는 뭐래?”
한 가지,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아스테리아의 반응이었다. 딸아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백작 부인은 좀 더 안색이 어두워졌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미 아스테리아는 잔뜩 들떠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아무도 모를 거라면서 좋아하는 그녀를 보기가 괴로웠다. 어쩌다가 저 아이가 이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들의 위치를 보고 있지도 않은 두 부녀의 행보에 백작 부인은 입 안이 씁쓸해졌다.
“아스테리아는 좋아해요. 전에 진짜 예언을 들을 것처럼 갔다가 아무것도 안 나와 가지고…… 속상해했었는데.”
그랬는데 갑자기 그녀가 예언을 들었고, 그녀가 들은 예언에 따르면 매우 심각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백작 부인은 그런 이야기가 떠돈다는 것에 식겁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반색하는 딸아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보…… 이렇게 해도 정말 괜찮은 거예요?”
백작은 시종일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부인의 말에도 한곳을 응시하면서 한숨을 조용히 내쉬던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와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때……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어.”
아스테리아를 위한다는 마음, 데모트를 쓸모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그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말았다. 단 한 번 피해 갈 수 있었을 기회를 제가 제 발로 차 버렸기 때문에 수습을 하는 것도 제 몫이었다.
몰아치고 있는 것은 황후였지만 믿을 것도 황후뿐이었다. 체념하는 부인을 바라보고 있던 데모트 백작은 올라오려는 한숨을 꾸욱 눌러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