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본궁으로 넘어오기 전까지 그가 사용했던 방이 그녀가 예언을 들은 두 번째 장소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왠지 모르게 그와 자신의 사이에 긍정적인 신호인 것 같아 아스릴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레나드는 도착하자마자 리프네의 말을 들었는지 헐레벌떡 아스릴에게로 달려왔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혹여 그런 이유로 말하지 않는 일이 생긴다면 더더욱 속상할 거다.”
알고 있었다. 그런 걸 숨겼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더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딱히 상상이 안 되는 감각은 내가 그 입장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 대충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데 제게 말하지 않고 어영부영 넘어갔다가 나중에 알게 됐다면……? 당연히 속상할 것 같았다. 서운하고 속상하고……. 그래서 아스릴은 덥석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응. 말 안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제가 레나드를 속여 가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언제가 그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럴 때마저도 신중하고 진실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은 평생 그의 곁에 있을 예정이니까.
“정말인가?”
“물론이에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팔을 도닥여 주었다. 아직도 그는 허리를 수그려 소파에 앉은 아스릴을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
“허리 안 아파요? 이제 그만 안아 줘도 돼요.”
아스릴이 분위기를 조금 풀어 보고자 그렇게 말을 꺼내자, 레나드는 어깨를 감쌌던 손을 슬쩍 허리로 내리더니 그녀를 끌어안은 채로 허리를 폈다.
“앗!”
“그럼, 이렇게 하면 되지.”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짓궂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음…… 바로 들어야 하는 내용인가.”
똑바로 서서도 몸을 살짝 수그려서 그녀를 안고 있는 레나드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스릴은 그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 잠깐 고요에 빠져 있었다.
“식사 다 하고, 그러고 나서 이야기해요.”
껄끄러운 이야기일수록 빠르게 공유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이제 막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잠깐의 휴식 시간은 주고 싶었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니 매우 긴장이 되겠지만, 듣고 나면 신경이 쓰여서 식사마저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럼 지금 바로 식사를 하러 가야겠군. 옷만 갈아입고 오겠다. 식당으로 가 있어.”
레나드는 오늘 종일 못 봤던 아쉬움에 더해 불안했을 그녀를 달래 주는 의미로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는 그대로 물러났다.
아스릴이 해석하기에 그것은 그들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이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좀 더 싱숭생숭해졌다.
마음을 좀 다잡아 보려고 책을 펼쳤던 아스릴은 조용히 책을 덮고 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책은 참 질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방금 읽었던 책의 글자들이 머릿속에 떠다니는 바람에 복잡했던 마음을 잠시나마 가라앉힐 수 있었다.
식사 자리에서도 두 사람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나드는 오늘 어디를 다녀왔고 무슨 일을 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언젠가 더 큰 세상을 보여 주겠다 약속했던 것처럼, 지금 당장은 함께 다니지 못하는 바깥의 일들을 상세하게 전해 주었다.
오늘 다녀온 곳은 수도 외곽의 마을이었다. 그 이야기는 아스릴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나중에 저도 데리고 가 주실 수 있나요? 물론 레나드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한 곳에요.”
위험한 곳이어도 상관없었지만, 그런 곳에선 자신을 신경 쓰느라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으니까, 그건 상관있었다.
“물론이지. 지금은 아직 시기가 이른 것 같고. 조금만 기다려, 어디든 데려가 줄 테니까.”
레나드는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어 주며 약속했다. 그가 말을 꺼내 주면 왠지 다 이루어질 것 같았다.
이전 생에서 그가 어땠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조심스럽게 만났고, 묻지 말아야 할 것 같아서 그에 대해서 묻지도 않았다. 그런 제게 그 또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4개월을 거슬러 올라 아스릴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듯이 그 또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도대체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점잖은 움직임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시간만 거스른 줄 알았는데, 그 또한 달라져 있었다.
그가 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눈앞에 있는 이 존재가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마음을 좀 더 굳게 먹어야 해. 나 하나만 지키면 될 일이 아니니까. 이 사람을, 이 사람이 지키고 있는 많은 사람을 함께 지켜야 해.
그저 백작가의 다락방에서 숨죽여 지내던 제게 갑자기 엄청난 무게가 지워지는 것도 같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제게 중요한 것은 레나드였고, 그의 곁에 있기 위해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들이었으니까. 예언이나 신성력은 그것을 수월하게 하라고 이렐린이 준 선물인 것 같았다.
‘사랑받는 아이’라고 부르는 데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제게 유난히 몰린 것 같은 이 사랑도 그냥 다 감사했다.
“이제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하겠군.”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레나드의 방으로 들어왔다. 황태자의 개인적인 공간이니만큼 제일 보안이 좋은 곳이었으니까.
고요하고 넓은 방 한가운데, 소파에 마주 앉은 아스릴은 부드럽게 화제를 꺼냈다.
“아침에 레나드가 나가고 나서 황태자 궁 구경에 나섰어요. 아, 리프네가 따라와 줘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이런,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겠군. 조금 창피해해야 하나?”
“아니요? 귀엽기만 하던걸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가벼운 주제로 조금 더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쉽게 툭 꺼내기가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아스릴은 자신이 이야기를 미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렇게 한가롭게 자신의 마음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레나드가 썼다는 침실로 갈 차례였는데…… 바람이 부는 거예요. 그때 신전 홀에 앉아 있다가…… 느꼈던 것처럼.”
그녀가 이야기를 진전시키자 레나드의 몸도 살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예언 내용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를 보며 아스릴은 그대로 전달했다. 이렐린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이렐린의 아이를 노린다는 표현을 쓰다니, 그것들이 역시 작정하고 아스릴을 해하려 했던 게 분명하군.”
가장 확실한 방법은 레나드가 잘못되는 것이었지만, 본인부터가 매우 강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차에 그 옆에 약점 하나를 스스로 만들어 놓았으니 얼마나 반겼을까.
눈살을 찌푸리고 기분 나쁜 티를 역력하게 내는 게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위해 화를 내 주고 있는 셈이니까.
“아도피트가 또다시 쳐들어오는 이유가 그 인간들 때문이라는 얘기겠군. 내가 보기엔 인간‘들’도 아니야. 악은 하나지.”
아스릴에게는 누구보다 무서운 이였을지 모르겠지만, 데모트 백작이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이용하기에 아주 좋은 도구를 가지고 있을 뿐.
“데모트는 이용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 딸이 이렐린의 꽃인 데다가…… 나를 원하고 있어서.”
황태자비 후보로 클로이가 거론했던 두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아스테리아 데모트였다. 귀족 세력으로 보나 회의장에서의 참여도로 보나 크게 돋보이지 않던 데모트가의 이름을 들먹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딸이 매우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데다 이렐린의 꽃을 두 번이나 도맡았다는 이력 덕분이었다.
적어도 머리는 좋은 남자였다.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는 아주 현명한 방법을 찾았으니까.
뒷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현명함 뒤에 아스릴의 희생이 있었다는 게 아주 화가 날 포인트였지만 말이다.
“내가 없어진다고…… 레나드가 언니를 선택하지도 않을 텐데 그걸 모르는 거죠.”
아스테리아는 매우 집착적인 성격을 가진 여자였다. 아스릴이야말로 그런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가장 집착할 만한 건 역시 레나드겠지.
“다행히 준비하고 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군. 내가 좀 잘 짚은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일어나게 될 전쟁을 걱정했던 아스릴과 다르게 그는 꽤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황후를 밀착하여 살필 것을 당부해 두었다. 심지어 이전의 일로 아도피트와의 연결성을 찾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었다.
“어쩌면 현장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당하는 척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쳐 없앨 수도 있겠고.”
계획을 말하는 그의 분위기가 차갑게 변했다. 격한 언사에 점점 표정도 사늘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매우 냉철한 사람이었다. 앞을 내다볼 줄 알고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을 줄 알았다.
예언은 그저 그의 예견에 확신을 주는 역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대단한 힘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딱 그 정도의 격차가 좋았다. 예언하는 여인이 나타났다고 다들 칭송하고, 혹은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오고 있는데, 레나드는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으로서 자신을 대해 주었으니까.
그에게마저 신격화되어 경외와 선망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자주 보는 그가 자신을 평범한 여인으로서 대해 주어 제가 가진 힘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예언의 내용으로 불안했던 마음까지 전부 편안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뭐든 말해 줘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신성력도 쓸 수 있으니까.”
아스릴은 당당하게 말했다. 자랑스럽게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레나드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려 보이는 그녀의 손을 가져다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