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위층으로 올라간 아스릴은 1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장 가까운 곳부터 열어 보기 시작했다. 중요한 방은 제일 안쪽에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내가 너무 시간을 잡아먹고 있죠? 할 일 있으면 가도 좋아요. 돌아가는 길은 알았으니까.”
첫 번째 방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마주친 리프네를 보고 아스릴이 미안한 듯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1층에서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서 좋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레나드의 시녀장이라 바쁠 테니까.
하지만 리프네는 그저 미소를 지어 주며 손으로 다음 방으로 갈 방향을 알려 줄 뿐이었다.
“다음 방이 황태자 전하께서 쓰시던 침실입니다. 아마 제일 고대하시던 곳이 아닐까요?”
리프네는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본인이 더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눈동자를 빛낼 아스릴을 떠올리며 방문 손잡이를 잡을 때였다.
리프네의 뒤를 따라가던 아스릴은 어디선가 불어오는 듯한 바람에 멈칫했다. 청량하면서도 어디의 온기와도 닮지 않은 그 바람이 어딘지 익숙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이 감각, 익숙하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무엇인지 바로 떠올라 버렸다.
언젠가 신전의 홀에 혼자 남아 있던 어스름한 저녁 시간. 한편으로는 황태자가 신전을 내려가는 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생들이 왁자지껄 저녁 식사를 할 시간.
홀로 남아 이렐린을 마주하고 있던 그때 이런 바람이 불어왔고, 곧 목소리를 들었다.
황태자의 방으로 향하는 길, 앞에는 리프네가 그 방문을 열어 주고 있었다. 아스릴의 발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이곳이 아니라 저 방 안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아서.
리프네는 아스릴의 변화를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황태자의 방에 홀린 듯 입장하는 아스릴을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아스릴은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딘가에서 이렐린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첫 예언을 들었던 기억 때문일까. 방에 있는 이렐린의 동상이 떠올랐다.
“여기는 황태자 전하께서 태어나시고 한 달쯤 지난 후부터 지금의 본궁으로 옮기시기 전까지 내내 생활하셨던 공간입니다. 훈련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었지만 방을 제일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리프네가 살짝 들뜬 목소리로 여러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지만, 아스릴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스릴은 주변을 아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창문을 바라보는 방향에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어떤 느낌인지도 모르겠고, 눈에는 더더욱 보이지 않았지만…… 아스릴은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나의 아이를 노리는 이들이 다시금 동쪽의 파도를 건드린다.」
창문으로 들이친 햇살 속으로 들어가 몸이 녹아들듯 햇빛으로 둘러싸인 순간 문득 아스릴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한번 들어 봤던 그 인자하고 청량한 목소리.
“이렐린…….”
“예? 아스릴 님……?”
그냥 주변을 탐색하고 구경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스릴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 또한 이곳이 황태자의 방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제가 예측했던 반응과는 어딘가 좀 달랐다.
리프네의 부름에도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듯이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조금 놀란 리프네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려 손을 뻗는 순간, 갑자기 손끝을 타고 오른 바람이 화르륵 불이 타오르듯 아스릴의 몸을 휘감아 타고 올랐다.
손끝에 닿는 이상한 공기의 흐름을 느낀 리프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뗐지만, 한동안 그녀의 몸을 타고 타오르는 바람 때문에 그녀의 풍성한 금발 머리가 격렬하게 휘날렸다.
“아스릴 님!”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선 리프네가 큰 소리로 불렀지만 역시나 아스릴은 미동도 없었다.
황태자는 황궁을 나가 이걸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얼마 전 친히 황궁까지 방문했던 대신관마저 바로 어제 신전으로 돌아갔다.
리프네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지금 도무지 도움이 될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계속될 것 같았던, 그래서 점점 턱을 덜덜 떨고 있었던 리프네의 걱정과 다르게 바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치 혼자만 다른 세계에 갔다가 돌아온 듯이 아스릴은 서서히 아까와 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아스릴의 주변을 맴돌던 바람이 잔잔해지자 문득 그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직 뭔가 안 끝난 건가, 리프네마저 움찔하는 사이 그녀가 서서히 돌아보았다.
“아도피트가 또…… 온대요.”
넋이 나간 아스릴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사르륵 눈을 감았다.
“아스릴 님!”
리프네가 휘청이는 아스릴의 몸을 재빠르게 붙들었다. 다행히 기절한 것은 아니었는지 리프네의 손이 그녀의 몸을 받쳐 안는 순간, 늘어져 있던 팔이 올라와 리프네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하아…… 레나드, 언제 돌아오는지 혹시 아세요?”
힘없는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사이 무언가와 사투를 벌이고 돌아온 듯 지친 것 같았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여기서 쉬어 가시겠어요?”
이 상태로 바로 본궁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쉬었다 가는 것이 좋겠다 판단한 리프네는 그녀를 부축한 채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가까운 소파에 그녀를 앉혔다. 등받이에 몸을 푹 묻은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살포시 찌푸려진 미간이 안쓰러워 보였다.
“저 괜찮아요, 리프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눈도 뜨지 않았지만, 그녀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린 것은 애써 못 본 척했다.
“가서 마실 물을 좀 챙겨 오겠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쉬고 계세요.”
잠깐 자리를 피해 드릴 겸 리프네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왔다.
리프네가 조심히 발을 옮겨 멀어지고 달칵하는 문소리까지 들린 다음에야 아스릴은 눈을 떴다.
원래 난데없이 찾아오는 예언이었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기가 확 빨려 나간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때는 신전이었고 지금은 그 신전에서 멀어졌기 때문일까.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이라면 그 정도였으니까. 저녁인지 아침인지를 따질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무튼 언제 또 올까 싶었던 예언을 또 들었다. 이번만큼은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다 하다가도, 좋은 일이면 굳이 예언을 할 필요 없겠다 싶어서 듣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했던 그런 예언을…….
“역시, 좋은 소식은 예언할 의미가 없는 것이었겠지.”
그녀가 들은 예언의 내용은 또 좋지 않은 것이었다. 또 한 번의 전쟁 예고와 더불어 알 수 없는 이야기까지 하나 더해져 있었다.
‘나의 아이를 노리는 이들이 다시금 동쪽의 파도를 건드린다.’
나의 아이를 노린다, 동쪽 파도를 건드린다.
그 뒤에 더 많은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핵심은 이것이었다.
자신이 짐작하는 것이 제발 틀리기를 바라지만, 결국 그렇게밖에 해석이 되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다.
레나드가 어서 돌아오길…… 그가 썼다는 방의 소파에 한껏 기대어 앉아 아스릴은 지친 두 눈을 가만히 내리감았다.
* * *
“아스릴!”
레나드는 외출했다 돌아오자마자 아스릴의 방으로 쳐들어왔다.
다급한 걸음걸이에 격하게 열어젖힌 문까지. 쳐들어왔다는 표현이 모자라지 않을 만큼 그의 움직임이 거칠었다.
“레나드? 무슨 일이에요?”
오히려 놀란 것은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아스릴이었다. 평온하게 앉아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레나드는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를 와락 당겨 안았다.
여전히 커다랗게 뜬 눈으로 눈동자만 또르르 굴리던 아스릴이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어떻게 전달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외출했다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다면 놀랄 만도 했다. 지금은 괜찮다는 말을 해 줬어도…… 놀랐겠지?
그녀의 멀쩡한 목소리를 듣고도 한동안 그는 아스릴을 놓아주지 않은 채 은근한 힘을 줘 끌어안고 있었다. 아스릴도 그가 안심할 때까지 등을 토닥여 주었다.
“힘들게 일 끝내고 돌아왔는데 걱정 끼쳤네요. 미안해요.”
아스릴이 그에게 말을 걸자 그제야 레나드의 팔에서 힘이 풀렸다. 그는 몸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걱정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늦게 돌아와서 미안하다.”
“이제 저녁 시간인걸요, 뭘. 할 일이 많은데 어떻게 일찍 돌아와요. 괜찮아요,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아스릴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는 말을 들었다.”
그가 본궁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를 맞이한 리프네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리프네가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근 몇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아, 황제가 쓰러졌을 때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프네의 이런 모습은 레나드를 더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팽개치고 그는 곧바로 아스릴의 방으로 먼저 달려왔다. 그 짧은 거리를 숨이 차도록 달려왔건만, 그녀는 너무나 평온해 보여서 심장이 더 벌렁거렸다.
“처음엔 몸이 아픈가 생각했는데…… 이상한 일이라면, 혹시…….”
그녀에게 벌어질 이상한 일이라면 단 한 가지밖에 없지 않겠는가. 첫 번째에 어땠는지 그저 그녀가 느낀 표현만을 들었었기 때문에 그게 옆에서 보기에 이상한 일인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도무지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레나드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에 아스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언을…… 들었어요.”
아스릴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