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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85화 (85/106)

85화

오늘도 레나드는 바빴다.

황제의 일을 일찍이 이어받았다고는 하나 이제는 그 일들에 익숙해져 가는 중이라고 했다. 본래도 황제 혼자 하던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힘들어도 후에는 결국 그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서류 작업이라면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아 일하는 그를 들여다보거나, 책을 읽거나 그의 일을 지켜보면서 일하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해 보거나 그랬을 텐데, 오늘은 아쉽게도 황궁 밖으로 나가는 날이었다.

그가 없을 때는 또 없을 때 나름대로 할 일이 많았다. 오늘은 그가 없는 사이 본궁의 오른쪽 뒤편에 자리한 황태자의 궁에 가 볼 생각이었다.

아스릴은 최근 황궁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고 다니는 것에 흥미를 가진 참이었다.

그가 할 일을 내버려 두고 안내를 하겠다 나설까 봐 감추고 있었던 호기심이었는데, 오늘 딱 좋은 타이밍을 만난 것이다.

아스릴은 황궁으로 들어오자마자 레나드가 잔뜩 주문한 드레스 중 한 벌인 하얀 드레스를 입고 방을 나섰다. 마냥 하얗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푸른 리본이 팔랑거리며 디테일을 살려 주는 예쁜 드레스였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단 듯한 사람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어디를 가십니까?”

본궁의 시녀장 리프네였다. 침착한 태도로 자신의 앞을 막아선 리프네를 마주 바라보다가 아스릴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황궁 탐험이요.”

“……예?”

리프네는 얼핏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지만, 이 정도로 표정을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탐험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좀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레나드가 전에 생활했던 황태자 궁이 따로 있다고 들어서요. 구경 가 보고 싶어요.”

아스릴이 그녀에게 숨길 것 없다는 듯 솔직하게 대답했다. 굳이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건 단 하나, 레나드가 자신의 업무 시간을 쪼개 가며 제게 할애하지 말았으면 하는 이유뿐이었으니까.

만약 시녀장이 따라온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녀가 저를 방해한다고 하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거나 위험한 곳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오히려 안내를 위해 그녀가 있으면 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스릴의 생각의 변화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는지 리프네는 순간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어, 표정 바뀌었네.’

그녀의 난감함은 모르는 채로 아스릴은 옅게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리프네는 아무 감정 없는 듯 황태자 전하의 궁을 보고 싶다고 말하더니 점차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아스릴의 변화를 보고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뭔가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해 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 것이다.

아름다운가 싶다가도 푸른 눈이 반짝이면 굉장히 귀여워 보였다. 제게 이런 모성애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이거저거 해 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저…… 황태자 전하의 궁까지…… 안내해 드릴까요?”

결국 그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먼저 끌어내고야 마는, 그런 힘이랄까.

그 말을 듣자 아스릴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크게 웃는 것도 아닌데 그 변화가 여실히 보였다.

“정말요?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바쁘실 텐데.”

그렇게 온 얼굴로 눈에 띄게 기뻐해 놓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묻는 것은 반칙이다. 바쁜 일도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은 환한 미소에 리프네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그 정도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쁜 일은 없습니다. 가시죠.”

리프네는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모험을 떠나는 것은 꽤 두근거리고 흥미로운 것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따로 신경 쓸 것 없이 편안하게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본궁도 매우 커서 건물 자체는 단순한 구조임에도 간혹 헷갈리는데, 건물들끼리의 위치와 구조가 생각보다 굉장히 어지러운 편이었다.

“와…… 시녀장님 아니었으면 여기 오려다가 종일 헤맸을 거 같아요.”

“황궁은 역시 침략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설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황제는 제일 먼저 맞서 싸우는 사람이지만, 황태자는 다음을 위해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아아……. 새삼 아그로드의 황제가 가지는 강인함이 느껴지는 구절이었다. 입으로 몇 번 곱씹어 봐도 멋진 말이었다.

다만…….

“레나드는 그 두 가지를 같이 지고 있네요.”

황제가 자리를 비운 이 황궁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아그로드의 미래를 위해서 스스로를 지키기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황태자 전하를 칭송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리프네는 황태자 궁 앞에 다다라 설레는 얼굴로 정문을 올려다보는 작은 아가씨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기 계신 분도, 그것을 알아주시는 분이네요.”

리프네의 따뜻한 말투에 아스릴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오랜 시간 생활해 왔다는 공간의 문을 밀며 아까 말했던 ‘탐험’이 이런 감정이 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본궁에 비교하자면 크기도 작고 화려함도 덜했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이 덜하지는 않았다.

“멋있다.”

제일 처음 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본궁은 너무나 큰 규모와 화려함에 넋을 놓고 위압에 눌렸다면 이곳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10대 때부터 화려한 장식은 걷어 내고 본인의 취향대로 꾸민 곳입니다. 다른 궁들과 다른 것이 보인다면 대부분 전하의 취향이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리프네의 말을 듣고 보니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더욱 눈에 들어왔다.

“레나드의 취향이 제 맘에도 쏙 들어요.”

어깨까지 들썩이며 좋아하는 그녀를 보곤 리프네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스물? 스물하나? 그쯤 된 거 같은데 소녀 같은 사랑스러움이 묻어나는 아가씨였다.

하지만 그걸 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살짝 아쉬웠다. 따로 말씀해 주신 것은 없지만 어렸을 때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확 들었다.

리프네가 안내해 주는 대로 본격적인 황태자 궁 탐험에 나섰다. 그녀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스릴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면 어떤 공간이나 가구 같은 것에 얽힌 레나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리프네는 시녀였기 때문에 그와 많은 일상을 함께한 사람만이 아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항상 표정을 드러내지 않아서 무서운 사람인가 했지만, 레나드의 어린 시절을 말할 땐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곤 했다.

역시…… 어딘가 자꾸 씨씨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씨씨가 제게 그만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데모트 가족을 더 많이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그들과는 다르게 놓치고 싶지 않아 챙겨 줬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득 씨씨를 생각하면 역시 곁으로 데려오고 싶어진다.

“저, 시녀장님.”

“그냥 이름으로 부르셔도 되는데…….”

아마 몇 번을 말해도 웬만해선 변하지 않을 거라 리프네의 말끝이 사그라지고 말았다.

“궁금한 게 있어요.”

1층만 둘러봤는데도 이미 꽤 많은 추억거리를 공유해 준 리프네를 보면서 아스릴은 결국 말을 꺼냈다. 리프네는 아무 표정 없이 아스릴을 응시했다. 그것은 긍정을 뜻하는 표정이었다.

“혹시…… 제가 좋아하는 하녀를 시녀로 데려올 수도 있나요? 아, 저, 귀족가의 하녀장이라 일을 매우 잘하거든요. 물론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그러니까 데리고 올 수 있다고 하면요.”

뭔가를 부탁하는 말을 하려고 보니 영 말이 제대로 나가질 못했다. 다시 삶을 찾고 나서부터는 괜히 얕잡아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명령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마저도 매우 어색하고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게 살길이라는 생각에 주저 없이 해야만 했다.

하지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좋게 말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이 어색했다. 레나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 주는 사람이라 솔직하게만 말하면 됐는데 이 사람은 어떨까?

눈치를 보는 아스릴을 향해 리프네는 편안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화아아- 긴장했던 아스릴의 얼굴에 다시 옅은 홍조가 번졌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오히려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솔직하게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얼굴에 얽힌 깊은 이야기가 읽힐 것 같아 리프네는 그저 웃어 주었다. 대충 그런 분위기라는 것만 알면 됐다. 주인이 될 분의 자세한 사정을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 부분은 원하시면 황태자 전하께 말씀을 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들어주려 하시겠지만, 적어도 국혼이 명확히 정해지고 난 뒤라면 더 좋겠군요.”

리프네는 아주 현실적인 조언까지 잊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아스릴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연락을 하는 게 좋을까. 씨씨는 하녀라 만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만나서 제안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지만…… 그분도 제 곁에 오는 것을 반갑게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수줍게 웃으며 그렇게 읊조린 아스릴은 바로 뒤를 돌아 다음 방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뒤에서 리프네도 그녀가 방금 빌었던 것과 같은 것을 빌어 주었다.

“원하는 분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진심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길. 우리 황태자 전하께 언제나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인이시길.”

정말 오랜만에 미소를 지어 본 리프네는 재빠르게 바라는 것을 읊조린 뒤에 사라진 아스릴의 뒤를 쫓아 방을 나섰다.

계단을 오르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마치 버려진 성을 돌아보는 어느 왕국의 공주님이 나오는 아름다운 동화책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저분이 아니라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 복 받으신 건 아닌가.”

괜스레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리프네는 들뜬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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