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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84화 (84/106)

84화

데모트 백작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눈앞의 낡은 문을 바라보았다.

접선의 장소로 신전의 바로 아래에 즐비한 여관과 식당들 사이에 있는 이곳을 택한 것은 정말 적절한 선택이었다. 적당히 낡은 옷으로 찾아 입고 골목을 걸어 이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이 그렇게 어색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알면 알수록 비상하다고 해야 하나…… 무서운 사람이었다.

똑똑.

최대한 약하게 두드렸다.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문은 이미 낡을 대로 낡아서 조금만 더 힘을 줬다간 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 문이 열리자 안에는 낡아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깔끔한 드레스와 우아한 몸짓,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까지, 이 골목에 있을 법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는 더 긴장했다.

두 번째이지만, 누구를 만나는지도 이미 알고 있지만, 알기에 더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폐하, 백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

안에서도 못지않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안내를 해 준 여인이 문을 열고 물러나자 백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은 이런 장소에 나온다는 얘길 듣고 눈에 띄지 않도록 적당히 낡은 옷도 준비해 입었는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이에게 그 정도는 신경 쓸 일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화려한 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화려한 머리. 본래도 화사한 얼굴에 화장까지 짙어서 귀족 회의장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다시 이렇게 뵐 줄은 몰랐습니다.”

“난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요? 계획을 세웠으면 실패했을 때를 당연히 생각해야 마땅하지.”

얼핏 여유로운 듯이 들리는 목소리였으나 데모트 백작은 자꾸 뭔가 따끔따끔하게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아 목소리만 듣고 있던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피부를 따끔따끔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입으로만 웃고 있었다. 눈빛은 사람을 찢어 죽일 듯이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황궁으로 암살자를 들인 게 아무래도 급했던 것 같아요. 아스릴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나일 거라고 바로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 레나드에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데…… 어째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저는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데모트 백작은 회의장에서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으름장을 놓던 레나드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이 세상에 쓸데없는 사람이란 없어요, 데모트 백작. 어쩜 그렇게 섭섭한 말씀을 하시는 거죠? 호호호.”

그녀, 황후 클로이의 웃음소리에 데모트 백작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어디 써먹을 데야 있겠지. 다만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인지가 문제인 것이지.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는 그를 클로이는 여전히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쇼를 해 보려고 해요. 저 둘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해 버리는 거죠. 그것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이 상황에서 되도록 발을 빼고 싶었지만, 한번 들여놓은 이상 빼는 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양쪽에 어마어마한 적을 둔 것만 같아서 백작은 안 보이는 곳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작은 쇼라니 대체 무슨 일을…….”

“말했잖아요? 똑같이 한다고.”

황후는 아름답고 선명한 입술을 늘이고 입꼬리를 한껏 휘어 올려 미소 지었다.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모르겠지만, 그는 계속되는 불안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이제 와서 빠지네 마네 하면 섭섭해요. 이번엔 데모트의 영애가 아주 큰 역할을 해 줘야 하니까.”

황후의 얼굴에는 벌써 미소가 슬쩍 번지고 있었다.

* * *

“엄마, 빨리 와. 이러다 사람들 오겠어!”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지고 고요해졌다. 아스테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내면서 백작 부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백작 부인은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러지 못했다. 억지로 끌려가는 듯이 굴어도 결국 딸아이의 뒤를 따르는 것은 그녀의 발이었다.

이미 남편인 데모트 백작은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동참하겠다고 나섰으며, 아스테리아마저 무슨 생각인지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고요한 신전의 홀로 나온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어두운 홀을 누비며 걸어갔다.

여기…… 동상 아래쪽이라고 했는데?

아스테리아는 약간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황궁이 아스릴의 일로 뒤집힌 걸 알고 있기는 한 걸까. 백작 부인으로서는 왜 데모트 백작이 그 일을 자신에게만 이야기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일 거면 그냥 말하지 말고 아예 끌어들이지를 말 것이지……! 그녀는 정말 이런 일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다. 아스테리아가 이렇게 제 발로 신전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서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아스테리아는 대체 그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번 일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렐린의 동상이 굽어보는 자리를 찾아 앉아서는 그 동상과 눈을 맞추었다.

“그…… 뭔가 느낌이 오니?”

백작 부인은 조심스럽게 아스테리아에게 물어보았다. 자리에 앉아서 반짝이는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기대감이 잔뜩 담겨 있었다.

쟤는, 제게도 진짜 예언이 올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이상하게 그 예상이 맞을 것만 같아서 백작 부인은 애가 탔다.

“엄마, 이렐린이 내게는 뭘 말씀해 주실까?”

신이 난 목소리가 철없게 느껴졌다.

“너는 이렐린의 꽃이라는 애가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니? 예언은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야. 하물며 예언을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원할 때 들을 수 없는데, 네가 거기 있는다고 예언이 들리겠니?”

하마터면 진짜 육성을 내 버릴 뻔했다. 소곤거리는 소리로는 이 답답한 마음을 다 터뜨릴 수가 없었다.

엄마는! 아빠가 가서 예언 듣고 오라고 한 거잖아. 괜히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얘기를 할 리가 없잖아. 그렇지?

아스테리아는 태평하게 데모트 백작을 두둔하고 나서다가도 살짝 말끝이 흐릿해지려 했다.

“괜찮아. 아빠가 하고 오라고 했으니까 하면… 되지.”

아스테리아는 그 자세 그대로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백작 부인이 여기서 일부러 끌어내려고 하다간 돌이킬 수 없는 소동이 일어날 터였다.

백작 부인은 그저 조용히 아스테리아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금방 알아차릴 거짓으로 딸아이를 이런 곳에 보내다니 말이다.

안쓰럽고 답답한 마음은 그저 고요한 홀 안에서 떠다니기만 할 뿐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전달되지를 못했다.

아스테리아는 그 자리에 앉아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금발을 뒤로 늘어뜨린 채 반짝이는 보랏빛의 눈동자 속으로 이렐린의 아름다운 모습이 박혀 들었다.

분명 아스릴이 이렇게 앉아서 예언을 받았다고 했다. 신전의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일이라고도 했다.

같은 피를 타고났고, 자신은 이렐린의 꽃까지 했는데 그 애가 들은 예언을 내가 못 들을 리가 없지.

안 그래도 아스릴이 예언을 들었단 말을 못 믿고 있던 차에 데모트 백작의 제안은 매우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네가 가서 예언을 들어 보아라. 네게도 들릴지 누가 알겠느냐.’

그 말에 아스테리아는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엄청난 걸 발견한 느낌이었다.

혼자는 너무 무섭고, 그래서 엄마를 끌고 왔는데, 아까부터 자꾸 분위기 깨는 소리만 했다. 엄마는 자기가 낳아 놓고도 딸인 제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겠다고 하니까 나서 주긴 했지만.

예언을 듣는 아스릴이 필요가 있어 보여서 데려간 것이라면 자신도 예언을 들으면 된다. 눈앞에는 이렐린의 동상이 있었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 이제 말해 줘요. 내게도 말해 줘요. 또 아도피트가 쳐들어오나요? 아니면 몇 년 사이에 큰 가뭄이 찾아오나요?

아스테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모아 잡고 이렐린을 올려다보았다. 자애로운 미소를 바라보며 예언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겉모습만 봤을 때의 일이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의 이면에 숨은 욕심은 질척한 늪과도 같았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만큼 그 어떤 때에도 봐주지 않고 흘러만 갔다.

처음엔 반짝거리던 아스테리아의 눈동자는 점점 그 빛을 잃기 시작했고, 빛을 잃은 보랏빛 눈동자는 더 이상 보석이 아니었다.

점점 어둡게 가라앉는 눈동자로 이렐린의 동상을 노려보던 아스테리아는 기어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엄마, 왜 안 들려?”

“아스테리아…….”

“이렇게 해서 들었다며! 아스릴은 들었다는데 왜 난 안 들리냐고!”

들키지 않겠다는 생각 따위를 할 때가 아니었다. 이 억울함을 풀고 싶은데, 나도 빨리 예언을 듣고 싶은데…….

“아스테리아. 돌아가자. 모든 이들이 다 예언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너도 잘 알잖니. 넌 이렐린의 꽃이잖아. 응?”

레나드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스릴과 함께 있는 것이 딸아이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를 차지하기 위한 일이라고 운을 떼면 물불 안 가리려고 하는 것이 걱정스러워졌다.

백작 부인은 조심스럽게 아스테리아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다행히 이 소란을 듣고 나타나는 이는 없었다. 더 문제가 되기 전에 어서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백작 부인은 아스테리아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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