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레나드가 신전으로 보낸 서신은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답이 돌아왔다.
신전으로부터 대신관이 찾아온 것이었다.
신전과 황궁이 몸이 축날 정도의 긴 여정을 거쳐야만 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백발과 주름이 성성한 대신관에게는 힘들 수 있는 거리였다.
그래서 레나드는 지혜를 구하면서도 방문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아스릴과 함께 시간 내어 방문하겠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여. 황궁은 정말 오랜만이로군. 예전에는 레이먼이 알아서 신전으로 열심히 발걸음을 하는 바람에 내가 나올 일이 거의 없었지. 어쩜, 그렇게 부지런한지.”
클클, 하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면서 황제를 타박하면서도 즐거운 티를 감추지 않고 웃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 쌩쌩하긴 하다만, 정말 괜찮은 것인가. 무리해서 온 거라면 일단 오늘은 들어가서 쉬고 내일 다시…….”
“어허. 물론 내가 노쇠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거뜬하다네. 그런 식으로 폐를 끼칠 것 같았다면 신전으로 와 달라고 했겠지.”
알현실이 아닌 응접실로 안내받은 대신관은 커다란 소파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고요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신관이 진지한 얼굴로 황제가 사용했을 응접실을 찬찬히 쓸어 보고, 어떤 것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해서 보는 눈길과 작은 움직임이 마치 추억을 더듬어 보는 눈빛인 것 같아서 지켜보고 있는 레나드와 아스릴은 그 뜻도 모른 채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직접 와 주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대신관에게로 서신을 보냈다는 레나드의 말에 아스릴도 답신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직접 온 그를 보고는 안 놀랄 수가 없었다.
응접실에는 다급하게 먼 길을 달려와 준 대신관을 위한 간소한 티 테이블이 차려졌다.
“음. 좀 자주 초대해 줘도 좋겠는데, 늙은이는 단걸 좋아해서 말이지.”
쿠키를 하나 집어 먹은 대신관이 또 크게 웃음을 지었다. 그가 손수 걸음 한 데에 어떤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싶은 생각에 굳어 있던 레나드와 아스릴을 위해 실없는 말들을 먼저 던져 그들의 긴장을 풀어 주려 하고 있었다.
“급한 일 아니어도 자주 초대하겠습니다. 아니, 초대하지 않아도 그냥 오셔도 문제없습니다.”
레나드는 아스릴보다 자신이 더 애가 타는 느낌으로 그에게 말했다.
클클, 쿠키를 내려놓고 웃은 대신관은 웃느라 가늘게 접힌 눈으로 아스릴을 바라보았다.
“보내 준 내용을 잘 읽어 봤다. 아스릴이 예언을 듣는 것뿐 아니라 알 수 없는 힘까지 쓴다고.”
“예.”
아스릴은 대답을 하고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마법을 쓰는 것은 아닌가.”
레나드가 이제껏 꺼내지 않던 질문을 던졌다. 명예 신녀로서 예언까지 듣는 그녀였기 때문에 제일 먼저 신성력을 떠올렸던 것이지만, 예언을 듣고 신성력까지 쓰는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자 그런 방향까지 생각이 뻗어 나간 것이다.
“마법을 쓰는 이렐린의 아이도 이제까지 없었다네.”
하지만 그 방향마저 막히고 말았다. 아스릴은 놀라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마법 중에서 사람의 체내에 있는 독을 밀어내 치료하는 것이 있다는 얘기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혹시라도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할까 봐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말게나. 싱거울 정도로 내게도 답은 없으니까 말이야.”
대신관은 웃으면서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말았다. 어느 쪽이든 속 시원한 대답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스릴은 예언의 목소리를 듣고 신성력을 쓰는, 이렐린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라는 것은 확실하군.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대신관은 오히려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신실한 신관도 아니니 크게 문제가 될 일도 아니었다.
“대대로 능력을 가진 이들은 동경을 받으며 신전과 관련된 일들을 돕곤 했다. 예언을 듣는 이는 대부분 제국에 대한 예언을 듣고 전해 주었고, 신성력을 쓰는 이들은 병을 가지고 신전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이렐린의 아이가 더욱 추앙받는 이유는 바로 신의 힘을 가지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저 얼굴이 되는 꽃이나 명예 신녀와는 달랐다. 지금도 신성력을 사용하는 세 명의 이렐린의 아이가 제국을 돌면서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그런 이렐린의 아이가 황궁에 있다고 한들 크게 달라지겠는가. 제국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똑같은데 말이야.”
“대신관님…….”
대신관은 아스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해 주었다. 묻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심지어 레나드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였는데, 그가 먼저 알아채고 대답을 해 준 것이었다.
“신전으로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던 거로군.”
레나드의 말에 아스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많은 힘을 부여받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 신전으로 가야 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었어요.”
힘을 부여해 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심지어 죽은 목숨까지 살려 내면서까지 말이다.
이렐린의 아이가 부여받는 세 가지 힘을, 아스릴은 전부 경험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르는구나.
아스릴은 허리를 좀 더 곧게 펴 꼿꼿하게 앉은 채 레나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까지 약간의 혼돈과 조금 더 많은 확신을 담고 있던 눈동자에 흔들림 없는 무언가가 보였다.
“레나드, 잠시 대신관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도저히 의도를 가늠할 수 없는 부탁에 레나드는 눈썹을 움찔했다. 그가 불편해할 것을 알면서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둘만 남길 기대하기엔 두 사람 모두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다 보니 그때가 언제일지 기약할 수가 없었다.
“날 믿어요, 레나드. 절대 해가 될 이야기 같은 것이 아니에요.”
믿어 달라는 말까지 당당하게 꺼내는 그녀를 보면서 레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아스릴과 대신관이었다. 그에게 해가 될 일을 할 이유가 없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렵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일어난 김에 내가 쓸 방에도 차와 쿠키를 갖다 놔 달라고 좀 전해 줘.”
“그렇게 먹다가 몸 안 좋아지는 거 아닌가? 몸 생각 해서 적당히 먹어야 한다고.”
“그래그래.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챙기겠다.”
레나드는 끝까지 그녀를 지켜보았지만 아스릴은 끝까지 그를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은 느낌에 레나드는 두 사람을 응접실에 남긴 채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인지, 노인네조차도 전혀 감이 안 잡히는걸.”
그가 나가고 닫힌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돌리지 못하고 있는 아스릴에게 대신관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놔두면 한없이 저 문만 바라보고 앉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관님.”
“그래.”
그는 정말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어떤 말이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좋은 힘을 한 개 가지고 있든 두 개를 가지고 있든, 문제가 되는 것은 없었다. 그것이 세 개가 된다고 한들, 바뀌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이러한 힘을 가지게 된 데에 어떤 사명이라든지 그런 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놓기가,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편하게 해 보거라. 어떤 것이든 아스릴의 동의 없이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마.”
대신관에게는 예언보다도 훨씬 더 쓸모가 있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
아스릴은 이미 레나드에게 그런 난감한 부탁을 할 때부터 말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뭐든 가슴에 남겨 놓고 지나가는 것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대신과님, 사실 제게 주어진 것이 두 가지가 아니에요.”
아스릴의 진중한 목소리에 그저 인자하게 웃고 있던 대신관의 미소가 살짝 사그라들었다. 놀란 것이 분명한 얼굴에 아스릴은 입술을 꾸욱 물었다.
괜히 이 이야기를 꺼냈나 하고, 후에 후회할 일만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아스릴은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허허…….”
대신관은 듣는 내내 난감한 웃음소리를 내거나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거나 이제는 괜찮다는 듯, 그때의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한 아련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내가 살아온 삶이 남이 보기에, 특히 내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런 느낌이었구나. 안타깝고 응원해 주고 싶은 삶.
어렸을 적 한땐 나만큼 불행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존감을 갉아먹던 때가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보이면 욕먹을 모습이라는 생각에 예민해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그렇게 보던 것은 애정 한 톨 없는 가족들뿐이었다. 레나드도 대신관도…… 그녀를 바보 취급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저는 4개월의 시간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여신께서 주시는 마지막 힘, 기회인가요?”
이야기를 마치자 대신관의 표정이 미묘해져 있었다. 웃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가 진중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아주 위대한 순간을 마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대신관은 목소리마저 아주 차분해져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먼저였으나 마지막 이야기까지 끝나자 그의 눈에는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제가 신이라거나 하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지 마세요.”
문득 싸한 느낌이 들어 그렇게 말하자 대신관은 클클클, 큰 울림을 가진 소리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진짜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은 했지만, 이전에도 없었고, 그게 가능하단 말은 나온 적이 없었다. 그저…… 이렐린의 사랑을 역대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렐린이 시험을 해 보고 싶었다거나.”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대신관은 그것을 모두 듣고도 그녀에게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명 같은 걸 던져 주지는 않았다.
“이렐린은 힘으로 묶어 두길 원하는 신이 아니다. 그런 힘과 기회를 주었다는 건, 아마 아스릴이 그것들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인자한 미소와 삶의 지혜가 내려 준 결론에 아스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힘을 나눠 받아 제국에서 할 수 있는 일. 그것이 무엇일까.
아스릴이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을 대신관은 뿌듯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