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한참 동안이나 입술과 호흡을 나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떨어져서는 그가 들어오기 전까지 아스릴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곳으로 향했다.
“이런 곳에 창문이 있었군.”
서가와 서가 사이, 좀 더 바깥으로 툭 튀어 나간 벽으로 크지 않은 창문이 나 있었다.
그 창문으로 보이는 저 먼 곳의 산맥과 책을 읽는 아스릴의 옆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스릴은 의자엔 앉지 않은 채 이쪽을 보고만 있는 레나드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아스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씨익 미소를 짓는 그를 보자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머릿속은 아주 잠깐 하얗게 바래 버렸다.
그 잠깐의 순간 굳은 것이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레나드가 웃음을 내리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그렇게 괜찮지는 않은 모양이군.”
그가 걱정할까 봐 계속 컨트롤을 잘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문득 이런 반응이 나오고 만다.
“아무래도…….”
아스릴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미소로 무마해 버렸다.
“그 막힌 공간에서 암살자를 만났으니 그게 어떻게 짧은 공포겠는가. 힘든 것도 이해가 간다. 역시…… 조금 더 일찍 갔었어야 했어.”
걱정해 주는 것은 미묘하게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레나드가 계속해서 자신의 탓을 하니까 마음이 쓰였다.
지금 그녀가 레나드를 보다가 문득문득 굳는 것은 지난 생의 삶을 지나, 새로운 삶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지나간 줄 알았던 4개월, 어느 순간 레나드가 곁에 계속 있는 바람에 아예 잊고 지내던 것이었다. 그런데 암살자들, 이전 생처럼 딱 세 명의 암살자들이 나타났을 때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에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힘을 쓸 생각을 했었는지, 오히려 지금 그때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힘든 것 같았다.
당시에는 그저 레나드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곳에서 절대 죽을 수 없다고, 살아서 그의 곁으로 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때도, 오두막에서 암살자들을 맞이했을 때도, 이렇게 정신을 차렸다면 살 수 있었을까.
마지막 순간 기어이 암살자에게 잡혔던 손목에 시큰한 통증이 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결국 그 자리에 레나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때처럼 이번에도 죽었을 것이다.
“보고받자마자 그대로 뛰쳐나왔을 거 아니에요. 안 봐도…… 다 알아요.”
왜냐하면, 그녀 또한 그랬을 테니까. 물론 내가 달려간다고 해서 그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테지만, 가만히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걸 알아준다면, 뭐. 고맙군.”
레나드는 심각한 분위기를 오래 끌고 가지는 않았다. 그녀가 극복하고자 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힘들어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걸 가지고 하루 종일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다.
힘들어할 때를 알아주고 눈을 들여다보면서 손을 잡아 주며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그게 좋았다.
“찾는 게 잘 안 보이는 모양이군.”
레나드는 그제야 아스릴이 아닌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대충 봐도 한 다섯 권은 돼 보이는 책이 쌓여 있었다.
이미 오전 중에 이만큼의 책을 둘러보았다는 것은 모를 테지만.
“아무래도 제가 찾는 것은 신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황실 도서관에는 그 분야가 거의 없네요.”
신전으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잠시라도 레나드의 범위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가 아니라…… 그의 곁에 계속해서 머물고만 싶었다.
“그래도 제가 이 힘을 제대로 아는 게 레나드에게 도움이 되겠죠?”
다만 망설여지는 것은 그런 부분이었다. 제가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쌓여 있는 책을 힐끔 본 아스릴이 그렇게 말하며 레나드를 보았다. 맞은편에서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그는 손을 뻗어 아스릴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 크고 따뜻한 손에 폭 얼굴이 담기는 느낌이 굉장히 편안했다.
“뭐든지 억지로 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대신 그대가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원해 주겠다.”
“그건 좀 싫은데…….”
의외로 부정적인 말이 나오자 오히려 레나드가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스릴은 미소 지은 얼굴을 구기지 않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받기만 하는 건 별로니까, 황태자 전하께 피해 주지 않고 제가 하고 싶어요.”
“레나드.”
“아…… 레나드.”
“그리고 그건 전혀 피해가 아니다. 해 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행복한데, 어떻게 피해가 될 수 있겠어.”
밑도 끝도 없이 배척당하고 방치당하면서 살아온 시간이 20년인데, 어떻게 이렇게 끝 간 데 없이 신뢰하고 애정해 주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저는 제가 정말 불행하기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새 삶을 얻게 됐음에도 레나드를 피하지 못하고,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깊게 얽히는 것만 같아서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의 레나드를 만날 수 있어서 지난날은 그냥 다 없는 일이 돼 버렸어요. 지금 저한테 누군가가 레나드를 만나기 위해 20년을 그렇게 살아온 거라고 말해 준다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레나드는 슬픈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결국엔 웃어 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날 수 있을까.
“하여간 신기한 사람이에요.”
레나드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스릴이 대번에 그것들을 알아내겠다고 신전에 간다 했으면 내가 보내지 못했을 것 같아.”
“……예?”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갑자기 레나드는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원하는 거는 뭐든지 지원해 준다고…… 방금 아까 약 30초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어리둥절한 아스릴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레나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매일매일 신전으로 찾아갈 때마다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조금 더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으면, 눈치 보지 않고도 아스릴을 볼 수 있다면.”
설마…….
“지금 이렇게 바라던 것을 이루었잖은가. 조금이라도 떨어지기가 싫어져서 보낼 수가 없어 난감할 뻔했어.”
그가 자신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생각에 아스릴은 가슴이 찡해졌다.
“레나드…….”
“음? 뭔가. 감동받은 건가? 좋아. 점수를 좀 딴 모양이군.”
지금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에서 그와 알콩달콩 달콤한 말을 나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방금까지 불안으로 두근대던 심장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도 그 아픈 어둠을 걷어 내 주는 것도 모두 레나드였다.
“그래서 말인데, 점수를 조금 더 딸 수 있을 거 같군.”
또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아스릴은 어느새 하얀 볼에 보송보송한 홍조를 띠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말해 달라는 듯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레나드도 뿌듯해지고 있었다.
“아직 정확하게 답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대의 고민을 대신관에게 전해 달라 했다. 그라면 확답, 혹은 그에 가까운 답을 내려 줄 수 있겠지.”
아스릴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미 행동까지 마친 그를 보면서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입은 웃고 있는데 자꾸 눈물이 차오르는 두 눈 때문이었다.
“아스릴…….”
“아, 죄송해요. 그게 아니라……. 제가 원래 눈물이 많지 않았거든요. 레나드가 제 눈물샘을 열어 버렸나 봐요.”
끝에는 웃어 버렸지만, 그와 함께 눈물도 또르르 흘러내리고 말았다. 보드라운 볼에 한 줄기 눈물길이 새겨진 걸 레나드는 조금도 참지 않고 엄지손가락으로 지워 버렸다.
다시는 이 여인에게서 슬픈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으니까.
“괜찮다. 그대에게 슬픔과 분노를 제외한 모든 감정을 내가 알려 주는 거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그럼 레나드도 저 때문에 그런 것들을 느끼나요?”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책으로 접할 수 있었다. 사람 간에 이런저런 감정이 생길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직접 겪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 지금 하나하나 실제로 느끼며 배우는 것은 책으로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대를 보며 느낀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 더는 찾아가지 않겠다 말씀드렸던 것이야. 만약 그분이 현재 황후 폐하를 이런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면, 그녀가 잘못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실 테니까.”
아무리 그 상대가 자신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 마음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아스릴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대신관님께서 어서 좋은 답변을 주시면 좋겠네요. 제가…… 굳이 레나드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여튼 예쁜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 어떤 책을 보았길래 이렇게 예쁘게 말하는 거지? 응?”
레나드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장난을 부리자 아스릴도 마음 놓고 꺄르르 웃는 소리를 내었다.
지금 이토록 가벼운 감정을 나누고 소리 내어 웃고 장난치는 자신의 모습이 아직은 어색한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앞에 있는 이가 레나드라면, 아스릴이라면 전혀 싫지가 않았다. 함께하는 이 시간들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날 해가 져서 도서관에 불을 밝혀야 할 시간이 될 때까지 마주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용히 손을 마주 잡고 어두운 도서관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