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스릴은 지금 자신의 방에서 요양 중이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서…… 뭔가 또 새로운 게 발견되었거든. 지금은 그 연구 때문에 방에서 요양 아닌 요양을 하는 셈이지.”
또 다른 능력이란.
“정말…… 아스릴 신녀는 예언을 듣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힘까지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짜 봐도 그것이 한계였다. 그마저도 질문하는 쪽은 반신반의하면서 이야기하는데, 답을 쥐고 있는 레나드는 태평하기만 했다.
“이 중에 있겠지. 그리고 내 말을 들었겠지. 내 말을 들었다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마 느꼈겠지. 그러기 위한 자리였다. 할 말은 여기까지다. 각자 갈 길 가도록.”
레나드는 끝까지 데모트 백작을 바라보며 경고의 말을 마쳤다. 그러고는 스윽 고개를 돌려 황후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도 일부러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든 걸음이셨을 텐데 말입니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황후를 한껏 비웃어 주는 말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사이가 좋아졌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를 챙기는 것으로 보일 법했다.
그러나 데모트 백작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식은땀이 날 정도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황후는 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황태자와 말다툼조차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언뜻 비치는 표독스러운 눈동자에서 그녀가 조금 당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도 놀랐으니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신을 부르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여기에 황후까지 함께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자수를 하든 안 하든 중요하지 않다. 단죄는 내가 하니까. 여기 모인 경들이 증인이 되어 주겠지. 그럼, 먼 길 와 주어 고맙다. 조심히 돌아가도록.”
황태자는 깔끔한 인사를 남기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그가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데모트 백작도 황후도 누구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기사들이 암살자들을 데리고 사라진 후였다.
그들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다 데모트 백작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머지는 황후가 얼마나 보호를 해 주느냐, 아니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분산시켜 줄 것인가에 달렸다.
지금 황후의 상태를 보면 그마저도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마음을 굳건하게 먹었다. 아스테리아를 위한 선택이었으니까. 그는 기어이 두 눈을 꽈악 감았다.
“확실히 두 사람의 표정이 다르더군. 내가 조금 무섭게 느껴지긴 했나 봐.”
회의장을 나서는 레나드는 한껏 화가 오른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이제 황후 근처를 더욱 조심해서 면밀히 살피겠습니다. 데모트 백작은 살짝 포기한 기색이 보이더군요. 이제부터 뭔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황후겠죠.”
옆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세드룬이 덧붙여 말했다.
레나드의 추측이 맞는다면 암살자들의 배후에는 데모트 백작이 있을 것이고, 그의 뒤에는 황후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미워할 일도 없었겠으나, 아무리 밉더라도 자기 딸이었다. 딸 하나를 위해 다른 딸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그저 방치하고 1000장에 달하는 책을 외우게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방법이 그뿐이었다 한들, 마음 한구석에 그러한 방법을 스치듯 떠올렸다 한들, 자의적으로 그것을 떠올리진 않았다. 절대 주도적으로 나서서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딱 거기까지인 인물이었다. 대범하게 지르지도 못하고, 완벽한 악역이 될 수도 없는.
하지만 클로이는 달랐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로 더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자기 친딸에게 암살자를 보내라고 부추기는 여자라니,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
“역시 아도피트 쪽을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서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왕국에서……?”
“내가 보기에 방향은 동쪽이다. 지금은 새로운 모험을 할 시기는 아니야.”
레나드는 성큼성큼 걸어가면서도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세드룬도 고개를 끄덕여 가며 대화했다.
“집중해서 살피겠습니다.”
“아, 그리고 신전에 연통을 넣어. 대신관에게.”
“예. 예? 대신관님이요? 어떤 연통을…….”
레나드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본궁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랑스러운 여인. 그리고…… 도무지 정체가 가늠이 안 되는 신비한 여인.
“아스릴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아. 그때 세드룬, 네가 본 암살자 두 명의 상태를 떠올려 봐.”
세드룬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의 말대로 그날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외상은 하나도 없는 두 남자가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암살자라 그런지 덩치가 그리 큰 것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단단한 몸을 가진 자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세드룬의 발로도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에 쓰러져 있었다.
한꺼번에 이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제압했다는 것도 놀랄 일이었는데 둘 사이의 간격이 심상치 않았다. 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확실히, 저는 도저히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감히 말씀드리건대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렇게는 못 하셨을 겁니다.”
세드룬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혹시나 신경에 거슬리는 말은 아닐까 싶던 것이 무색하게 레나드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그래, 그거야. 나조차도 할 수 없는 일. 애초에 우리가 쓰는 힘과는 다른 힘을 사용하는 것이지. 예를 들면 신성력 같은 것?”
레나드의 말에 세드룬은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의 말이 다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대신관에게 이를 전달하는 서신을 보내 줘. 그 뒤에는 그가 알아서 해 주겠지. 직접 찾아와 주든 아니면 그에 대해 편지를 보내 주든.”
두 사람은 큰 교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나면 친한 친구처럼 보였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태도인지, 태도로부터 마음도 변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미묘하게 가까운 관계라는 것은 분명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도서관을 몇 걸음 앞두고 세드룬은 물러났다. 그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레나드는 거침없이 남은 걸음을 옮겨 도서관 문을 열어젖혔다.
언제 봐도 웅장한 모습이었다. 커다란 문을 열면 2층이 모두 뚫려 있는 거대한 공간감을 가진 곳이 나타난다. 그리고 양옆, 사방팔방 눈이 닿는 어디든지 책이 꽂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엄청난 양의 장서가 마치 하나의 유적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잠깐 시선 돌리는 것으로는 바로 아스릴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뒤로 도서관 문을 닫은 레나드는 본격적으로 아스릴을 찾아 나섰다. 책장에 매달려 책을 찾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구석 어딘가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이렐린의 노래>라는 10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암기해 왔기 때문인지 책을 읽는 속도도, 기억하는 용량도 남달랐다.
자신이라면, 그 정도로 달달 외우게 될 만큼 봤다면 책을 거들떠도 보기 싫을 것 같은데 말이다.
“황태자 전하!”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먼저 찾았다. 그런데 문득 이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굳은 얼굴로 그 기분을 곰곰이 곱씹고 있는데, 저 안쪽에서 아스릴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약간의 걱정을 담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때로는 엄청나게 기분 좋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도 될까.
그녀가 이렇게 걱정하며 기다려 주는 것이, 그가 없을 때 아스릴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게 좋은 모양이었다.
“이름.”
“……예?”
레나드의 코앞까지 달려간 아스릴은 그가 던진 한마디에 고개를 기울였다. 만나자마자 안부 인사도 아니고 웬 이름을 얘기하는 것일까.
“내 이름이 무엇이지?”
두 눈을 끔벅거리고 있던 아스릴은 새삼스럽게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레나드…….”
“그래.”
갈수록 수수께끼다. 아스릴이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그가 또 입을 다물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황태자 전하 이름이 왜요? 뭐 문제 있어요? 마음에 안 드세요?”
질문을 다다다 꺼내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레나드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아스릴.”
“네.”
“이렇게. 이름으로 부르라고.”
그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잠깐 넋이 나갔던 아스릴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눈앞에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레나드는 가만히 그녀의 감정을 지켜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 그래도…… 황태자 전하의 이름을 어떻게 함부로 부르겠어요.”
“이제 그대는 백작 영애가 아니라 황태자비가 되는 거다. 이전의 지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리고 지위는 아니지만, 그대는 이렐린의 아이가 아니던가. 신전이야 우리 산하에 있지만 신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니까. 오히려 그대가 나보다 높을지도?”
레나드는 꼭 그녀에게서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다. 궤변은 아니어도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으며 그녀가 편히 이름을 불러 주기를 밀어붙여 보았다.
고민하는 입술과 눈동자. 또 한 번 그녀의 감정이 조용히 얼굴을 타고 흘러간다.
“레……나드.”
“사랑한다.”
흡 들이쉬는 그녀의 숨에, 입술을 맞부딪쳐 호흡을 불어 넣어 주었다.
이렇게 소중한 이를 앗을 생각을 했던 이에게 문득 엄청난 분노가 느껴질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