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갑자기 이렇게 회의를 소집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급하게 오라 하는 겁니까?”
“왠지 불길하지 않아? 황태자가 국정을 소홀히 하지는 않아도…… 웬만한 일로 이렇게 열정을 보일 분이 아닌데 말이야.”
넓은 회의장은 자리를 찾아 앉으려는 사람들의 말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조금씩 불만을 품은 목소리, 그리고 그중에는 불안을 품은 목소리도 있었다.
데모트 백작은 그 한가운데에 앉아 한곳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피곤하거나 조금 귀찮아하는 것으로 보일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지금 그는 덜덜 떨리려는 턱을 간신히 힘을 주어 버티고 있었다.
분명 각오를 하고 있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심장이 떨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벌써 눈치를 챈 것일까, 아니면 명확한 증거라도 흘린 게 있을까. 혹시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다 모아 놓고 겁을 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리 귀찮아 말게. 그냥 뭐 잘못한 일이 있으면 경고 좀 주고 좋은 소식이면 같이 기뻐하면 그만인 거 아니겠나.”
곁에 있던 소니오 백작의 말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마터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태평한 소리 말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너무 격렬한 감정의 기복을 겪고 있다 보니 신경이 잔뜩 예민해졌다. 자신부터 진정해야 했다. 제가 태연해야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으니까.
데모트 백작이 마음을 다잡는 순간, 황제가 등장하는 문이 열렸다. 레나드는 오늘도 완벽한 정복을 갖춰 입고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에 살짝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이번에는 다른 쪽 문이 열렸다.
그가 기억하기로 최근엔 저 문이 열린 적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화, 황후 폐하? 황후께서 어쩐 일이신가?”
“게다가 표정도 좋지 않으시네.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황태자의 등장으로 사그라들었던 소란이 다시금 웅성웅성 피어올랐다. 약간 피곤한 기색의 황후는 비교적 수수한 옷차림으로 나왔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황제를 간호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자신의 저택으로 찾아왔을 때가 그녀의 진짜 모습이겠지. 무섭도록 빛나던 초록색 눈동자가 아직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살짝 지친 듯한 얼굴로 동정심을 유발하는 황후였는데, 오늘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황태자에게 불려 나온 것이 뻔했다.
“경들을, 그리고 황후 폐하를 이렇게 급히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짐작 가는 것이 있는가.”
황태자는 좌중을 훑어보더니 다른 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아는 것이 없는 이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레나드는 하나도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딸아이가 황태자를 그토록 원하는 이유는 사실 데모트 백작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황좌에 앉아만 있어도 기품이 흐르는 이는, 굳이 황실의 배경 같은 게 아니어도 충분히 상대할 자가 없을 만큼 잘생기긴 했다.
단순히 얼굴만 잘생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후광을 뿜어내는 사람이었다.
이러니 그 많은 영애들의 마음이 그쪽으로 가 버릴 수밖에. 데모트는 아무도 모르게 쯧, 혀를 찼다.
“좋아. 아무도 모른다고 하니……. 세드룬.”
“예.”
어느새 회의장 입구에 서 있던 황태자의 호위 세드룬이 그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다시 열었다. 귀족들이 들어왔던 그 문으로 발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나타났다.
“맙소사…….”
“저것들은 뭐랍니까, 대체 왜…….”
문을 통해 들어온 것은 세 명의 기사와 각각의 기사들이 부축한 사람 세 명이었다. 사실 좋은 말로 부축이지, 그들은 완전히 끌려오다시피 하고 있었다.
세 명의 기사는 회의장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두 명을 바닥에 꿇어앉혔다. 칼에 베여 상처가 난 이는 차마 그렇게 내팽개치지 못하고, 그저 기사의 옆에 단단히 팔을 붙잡은 채로 세워 두었다.
이럴 수가…….
왜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보고가 없는 것인가에 대해 품었던 의문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줄이야.
데모트 백작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슬쩍 눈동자를 돌려 황후를 바라보자 그녀는 아까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지금 그대들 눈앞에 있는 이자들은 암살자 집단이다. 왜 이곳에 있느냐? 이들이 어제 황궁의 성벽을 넘어 이렐린의 아이라 알려진 아스릴을 공격했다.”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이야기에 너도나도 탄식했다. 큰 소리로 맙소사, 하고 내뱉기도 했다.
“내가 분명 그대들 앞에서 선언했다. 아스릴 영애는 내 반려가 될 사람이라고 말이다. 지금 당장 혼인을 치르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이렇게 공표를 한 것은…… 그녀가 온전히 나의 사람이라는 것을 새겨 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레나드는 불같이 화를 내지도 않았지만, 강한 목소리를 또박또박 씹어뱉는 것으로 화가 난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백작은 점점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황후는 말했다.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 말하면, 충분히 도움을 주겠다고.
그래서 아스테리아가 바라는 바를 이루어 주기 위해 염원을 담아서 불안을 무릅쓰고 일을 진행했다.
이렇게 한 방에 무너질 줄은……. 심지어 레나드가 품은 마음은 아스릴이 있으면 유용하지만, 없어지면 다른 걸로 채울 만큼의 애정이 아니었다.
처음 소개할 때만 해도 굉장히 서먹하고 어색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역시 예언을 내리는 여인이라는 이점을 놓칠 수 없어 데리고 온 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그의 옆에서 치우면 그 자리는 당연히 비겠지. 하지만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 도무지 아스테리아를 채울 자신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레나드 자체에 드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황제도 선 황후에게 저 정도의 애정을 보인 적은 없었다. 금실 좋은 부부라고 정평이 나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는 황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 제 옆이 비게 되자 나라를 생각해서 서둘러, 그렇지만 신중하게 영애와 왕녀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사랑하긴 했지만 결국 그 정도에 불과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나드는…… 과연 어떨까.
매의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던 레나드가 돌연 주머니 속에 손을 넣더니 편지 봉투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귀족이나 황족 사이에서 오가는 그런 고급스러운 봉투가 아니었다.
“내가 오늘 이렇게 그대들을 불러들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레나드는 봉투 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펼쳐 앞으로 내보였지만, 그들은 읽을 수 없는 단어였다.
고개를 쭉 빼고 들여다보려 애쓰던 자들도 종국에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말았다.
“암호인 것 같습니다만, 전하. 저희로서는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귀족석 중에서도 황태자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가 용기 내어 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본 레나드는…… 처음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암호다. 이것이 바로 저들이 속한 암살자 집단에서 사용하는 지시서다. 우리는 이미 이 집단의 암호 체계를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읽을 수 있는 사람 앞에서 암호는 빛을 잃지.”
레나드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뭔가 대단한 거라도 나올 줄 알았던 데모트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암호를 저들이 읽는다고 해도 어느 누가 증명을 해 준다는 말인가. 작은 희열을 느낀 데모트 백작은 그간의 긴장이 살짝 풀어지자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목을 옥죄고 있던 커다란 손에서 힘이 살짝 빠져 겨우겨우 숨통이 조금 트인 느낌이었다.
설마 했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우리를 떠보기 위해서였던 것인가!
그는 대놓고 웃지 않기 위해 입술 끝에 경련이 일 정도로 힘을 줘야만 했다. 아무것도 없다면 됐다. 누가 했는지 들키지 않았으니 다음을 기약할 순 있겠지만 다음에도 이 방법이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지금 다들 내가 이걸 내놓는 것이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군. 특히…… 지금 이 일을 사주한 사람.”
데모트 백작은 호흡을 가라앉히고 미소를 억누르는 생각만 하고 있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지금 황태자가 저를 보고 있는 것이지? 제가 한 걸 알았다고? 누군지 알면서 저러고 있다는 의미인가?
분명 레나드는 사주한 사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것도 심지어 데모트를 직접 바라보면서. 게다가 지금 레나드의 시선은 그를 떠나 황후에게로 향해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난 뒤에 황태자의 시선이 향한 곳이 황후라는 것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공교로운 탓에 백작은 다시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 문서가 이 일의 배후로 단 한 사람을 지목했다. 그러나 모두들 알아챘지. 암호화되어 있는 것을 이용해서 증거로 삼을 수 없도록 할 것이라고. 지금 분위기를 보니 딱, 그 짝이로군.”
그를 자신만만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데모트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분노와 여유를 오가지만 그에게서 난처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풀린 줄 알았던 손이 더욱 단단하게 옥죄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그냥 지나갈 생각이 없다. 미래 황실의 일원이 될 사람을 이렇게 위험에 빠뜨리다니 말이야. 경고했듯이.”
“물론입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가 되실 분이라고 모두 알고 있었는데, 이런 소식을 듣게 되어 매우 유감입니다. 아스릴…… 신녀님은 괜찮으십니까?”
귀족들은 대체적으로 그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말이 술술 나오고 있었다.
레나드는 아스릴의 이야기가 나오자 더더욱 눈을 빛내며 데모트 백작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