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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79화 (79/106)

79화

아스릴은 황태자와 침대에 들어갔던 이후로 두 시간 만에 정신을 차리고 나왔다.

하늘은 아직도 흐렸고 항상 찬란할 만큼 햇빛이 들이치던 레나드의 방에도 지금은 약간의 어스름만이 가득했다.

“지금 황궁의 벽 근처로는 기사들이 모두 진을 치고 있다. 그쪽에서부터 성긴 그물을 짜듯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지. 그들이 하는 일은 주변에 일어나는 수상한 일을 알아채려는 것이다. 물론 그 수상한 일을 누가 하는지…… 알기 위해서지.”

황후 클로이와의 신경전은 상상 이상이었다. 황궁 안에도 곳곳에 그를 지키는 기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한 모양이었다.

“조금 더 일찍 갈 수도 있었는데…… 유리 온실이 워낙 외곽에 있다 보니까 거기까지 눈이 미치는 데에 약간 시간이 걸려 버렸어. 미안하다.”

“아니에요, 정말. 나타나 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힘없이 쓰러지려는 걸 잘 잡아 줘서 고마워요.”

이제 제법 힘 있게 울리는 아스릴의 목소리 끝에 미소가 살짝 걸리는 것을 본 레나드는 그녀의 말을 믿고 제대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외상도 없고 마음으론 어느 정도 극복이 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자객이라니…… 보낼 사람들이라면 역시 황후 폐하이신가요? 아니면…… 황태자비 후보로 올랐던 가문일까요?”

마지막 말을 꺼내기 전에 잠깐 망설임을 보였다. 황태자비 후보로 올랐던 가문에는 지금 아스릴이 버리려고 애쓰고 있는 데모트가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냥 데모트의 이름을 버리고 싶은 것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아예 저를 도려내려 하시네요.”

그녀의 자조 섞인 말에 레나드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제부터는 아예 미련을 남기지 말아라. 만약 이번에 자객을 보낸 것이 진짜 데모트라고 한다면…… 나는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을 테니.”

그의 반응이 어쩐지 너무 격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스릴은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들은 침대를 나와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에 집무실로 가고 있었다. 세 명의 자객을 처리해 둔 세드룬이 그곳으로 올 거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지금 느낌에…… 왠지 그 집안이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아스릴은 조심스럽게 그렇게 물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레나드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얼핏 전해 듣기로는…… 그렇다. 지금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길이다.”

레나드가 아스릴을 달래는 사이 세드룬과 기사들은 한곳에 모여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을 것이다.

함부로 결론 내릴 수 없는 일이지만, 어느 정도 윤곽은 잡혔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그 이야기를 들으러 가고 있었다.

“혼자 다녀와도 된다.”

자신의 두루뭉술한 대꾸에도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보며 레나드는 나직한 목소리로 권했다.

“아니요. 가겠어요.”

아스릴은 흔들리려는 눈동자를 다잡고 씩씩하게 발을 내디뎠다. 레나드는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집무실에는 세드룬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자세로 돌아보다가 레나드보다 앞서 들어오는 아스릴을 보고는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러고는 눈동자를 위로 올려 레나드를 바라보았다. 왜 그녀를 데려왔는지를 묻고 싶은 듯이.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냈는가.”

하지만 레나드는 그런 세드룬의 눈짓을 무시했다. 세 사람이 각각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바로 본론부터 들어갔다.

“배후는…… 추측하건대 데모트 백작 쪽인 것 같습니다.”

아스릴은 예상했던 대답이 나왔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오히려 지금 상황이 죽을 맛인 건 말을 하고 있는 세드룬이었다.

레나드를 다시 바라봐도 그 또한 미동 없이 경청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객의 품에서 서신이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자기들만의 암호로 쓰인 지시서가 있었습니다.”

“지시서요? 누구를 어떻게 죽이라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는 건가요? 암호로 쓰여 있다면 그걸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아스릴이 세드룬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며 물었다. 어깨를 흠칫거릴 만큼 당황했던 세드룬은 금세 알아차렸다. 아스릴이 그것을 따지고 문제 삼기 위해 물어본 게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뭐 아시다시피 에그모였습니다만, 저희는 이미 그들의 암호 체계를 파악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속에…… 데모트의 이름이 들어 있었군.”

“그러합니다.”

레나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암호화된 서신을 읽을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이걸 증거라고 들이밀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조사가 더 필요하겠다, 세드룬.”

“이해했습니다.”

레나드가 애석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세드룬도 물론 알아채고 있었다.

세드룬은 그 외의 세 명은 지금 지하 감옥에 가두어 놨으며 레나드가 베어 놓은 자는 의사를 불러 치료를 했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바빠 보이는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아스릴은 약하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들이 왜 날 죽이려고 했을까요. 심지어 황궁 안에 있는 나를…….”

눈에 띄지 않겠다고 집을 나와 신전으로 떠났다. 그랬더니 그곳까지 들이닥쳐 자신에게 악을 쓰고 가더니, 신전을 떠나 황궁으로 온 이제는 목숨을 노리고 자객을 보내다니…… 생각도 못 했다.

“그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대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것과 별개로, 어떻게 황궁으로 자객을 보냈느냐 하는 것이다.”

레나드는 아스릴의 반응에 안쓰러워하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의문을 내보였다.

“그게 무슨 의미예요?”

아스릴은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은 느낌에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를 당겨 품에 안으려던 레나드는 대답부터 해 주었다.

“데모트 백작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런 결심을 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가 한 것이 맞고, 정말 그대를 해하기 위해 자객들을 보내기로 결심했다고 치자. 과연 그게 그들에게 가능한 일일까? 황궁으로 자객을 셋이나 보내는 게……?”

아스릴은 그의 말을 듣고도 잘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아그로드 역사상 자객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황제, 황태자 혹은 황자들이 꽤 있었다.

그때의 자객들은 유리 온실 같은 황궁의 변두리도 아닌 황실 일원들의 방까지 찾아가 칼부림을 하곤 했다.

“역사상 존재해 왔던 그런 암살자들은 대부분 황실 간의 다툼에서 발각되었다. 황궁 안쪽에 자신의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 만약 바깥의 귀족들이 사주한 암살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내부에 그 뒤를 봐주는 황실의 일원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아…….”

황궁의 보안을 얕봐선 안 됐다. 아무리 훈련받은 암살자라 하더라도 성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능력이 필요했다.

“들어오자마자 들킨 건, 그만큼 우리가 촘촘히 그들을 감시하기 위한 그물을 짜고 있었기 때문이고, 문제는 그들이 성벽을 넘어 들어왔다는 데에 있다.”

레나드의 푸른 눈동자가 매우 짙어졌다. 언뜻 고요한 듯 보이는 짙은 눈동자는 그 안에 고요하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말씀은…… 황궁 내부에 그들을 돕는 자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스릴은 지그시 두 눈을 감으며 물었다. 어째서 황궁에서까지 나의 죽음을 바라는 것일까. 나는 그저 살아왔을 뿐인데.

데모트에서 시키는 대로 살아왔고, 정말 살기 위해 거기서 나왔다. 신전으로 가고부터는 정말 제대로 내 삶을 살았고, 나를 위한 일들을 했다.

자신을 챙기기 시작한 지 고작 4개월, 나는 도대체 왜 죽이고 싶을 만큼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일까.

“내가 황후를 너무 모든 일에 적용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황궁 내에 적이 있다면 그것은 황후겠지…….”

그의 입에서 다시 황후가 나오자 아스릴은 안쓰러운 마음에 레나드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결국 황후가 이런 끔찍한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어. 애초에 서로 눈치만 볼 것이 아니라 밀어붙였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다.”

레나드는 오히려 아스릴에게 사과를 건넸다. 생각지도 못한 사과에 아스릴은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있는 안쓰러운 눈빛을 보자 뭔가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피식 웃음이 먼저 샌 것은 아스릴이었다.

“……아스릴?”

“누가 누구에게 미안하다 하는 거예요. 그들은 전부 나를 죽이고 싶어 해서 벌인 일인데.”

그녀가 하는 말을 곱씹는지 미동도 없던 레나드도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감정적으로는 그대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그랬는데,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대체 우리가 미안할 것이 뭐지? 내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내 옆을 비우려고 한 데모트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법으로 그대를 택한 황후가 미안해야 할 일이지. 안 그런가.”

울상을 짓고 싶은 마음이었던 아스릴은 레나드의 미소에, 그의 말에 깨달은 것 같았다.

“따지고 보니까 다 나 때문인데.”

“쿡.”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심시키려던 말을 마친 레나드는 또 한 번 미간을 구겼다.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는 그를 보고는 아스릴은 웃음이 터졌다.

레나드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즐거워서 짓는 그녀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 또한 착잡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자신은 지금 새어머니…… 그러니까 남과 싸우는 것이지만 그녀에겐 친부모가, 진짜 가족이 적인 셈이니까.

“어쨌든 전하는 약속을 지켜 주셨어요. 절…… 지켜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레나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약속 하나만큼은 제 목숨을 다해서라도 지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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