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끝인가……!
아스릴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뿌리치려 힘껏 몸을 흔드는 순간 암살자는 그 반동을 이용해 탁! 제 손을 낚아채듯 당겼다.
“안……!”
딸려 가겠어! 아스릴이 다급하게 돌아보는 순간 딸려 가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줘 보았지만 팔에 가해지는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아까와 같은 힘을 사용한다면 한 명 정도는 거뜬히 뿌리칠 수 있었겠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힘이다 보니 다급한 상황에서 생각나지도 않았다.
이대로 딸려 가면 끝인데, 하고 두 눈을 질끈 감는 사이 그녀의 몸이 뭔가에 의해 툭 멈추었다.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붙잡은 것이다.
어? 하는 사이 그녀를 새롭게 붙잡은 힘은 그녀를 감싸며 어느새 앞으로 돌아와 아스릴과 암살자의 사이를 막았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중에는 한 팔로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그 앞을 막은 이의 움직임도 포함이었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치자 아스릴은 두 눈을 뜨기도 전에 눈물이 울컥 차오를 것 같았다. 얼른 두 눈을 번쩍 뜨니 왼팔로 자신을 잡아 뒤로 보호한 레나드가 오른손에 든 검만으로 암살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전하!”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 준 그의 등이 너무나 듬직해 보였다.
“전하, 안에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포박 완료했습니다.”
다른 소란은 레나드와 함께 온실로 들어온 세드룬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방금 아스릴이 알 수 없는 힘을 써서 쓰러뜨린 두 명의 암살자를 끌고 나와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들은 팔다리가 모두 묶인 채였고 들고 있던 무기들을 전부 수거해 저 멀리 던져 두었다.
남은 한 명은 레나드가 든 검이 두세 번 허공을 가르자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피를 본 것은 이자뿐이었지만 피비린내가 온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스릴, 괜찮은가.”
레나드는 쓰러진 암살자의 팔다리를 포박하는 세드룬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저 두 마디를 하는 사이에 레나드의 눈은 아스릴의 머리부터 허리까지 살펴보고 있었다.
“저는 다친 데 없어요.”
하지만 긴장이 풀리자 다리가 휘청이고 말았다. 다리를 다치기라도 한 건가 싶은 생각에 레나드는 재빠르게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리를 살폈다.
“거짓을 고하면 안 된다.”
다리 여기저기를 살펴보면서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선 안 될 일이었다.
심지어 암살자 둘이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는 부분에 있어선 도저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다치지 않았어요. 너무 놀라서 그만…….”
암살자가 나타났다는 것에 놀라고, 아직 이전 삶의 고리가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에도 놀랐다. 그리고 이번에도 진짜 죽을 것만 같아 놀랐다.
그때는 너무나도 순식간에 끝나 이 정도의 공포를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망도 치고 알 수 없는 힘으로 공격도 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치료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까지 공격할 수 있는 것인가.
아스릴이 대답을 마치고 잠시 멍해 있는 사이 레나드는 세드룬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제야 먼저 쓰러져 있던 두 남자의 호흡을 확인하고 있었다.
“둘 다 숨은 쉬고 있습니다. 외상은 없고 제가 발견했을 땐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그냥 정신을 잃었다고?
레나드뿐만 아니라 아스릴까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세드룬의 말에 반응했다.
대체 이 힘은 무엇이기에…….
“우선 이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배후를 물어라. 자살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레나드는 이 자리에서 깊이 생각에 잠기지 않았다. 빠르게 처리해야 할 때는 빠른 판단이 필요하니까.
세드룬이 묶어 놓은 이들 중 다친 이를 둘러메고는 먼저 온실을 빠져나갔다. 남은 둘은 꽁꽁 묶어 뒀으니 중간에 깨어나더라도 어디 도망가거나 하진 않을 것이었다.
물론 자결하지 않도록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빠져나가는 것을 본 아스릴은 힘없이 휘청거린 자신의 다리를 주물러 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나드가 반사적으로 뻗은 팔을 지지대 삼아 똑바로 선 그녀는 그가 쓰러뜨린 암살자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몸속에 있는 나쁜 것들을 몰아내는 데에 이 힘을 썼다. 그러고 나서는 물리적으로 사람을 기절시키는 데에도 사용했다.
“아스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 테니 어서 돌아가자. 아직 조금 쉬어야 할 거다.”
레나드는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 주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가 받은 충격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다.
죽음의 순간 아스릴은 오로지 레나드만 생각했다. 그에게로 가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내가 살겠다는 의지와 같은 것이었다.
아스릴은 몸을 던지듯 레나드의 품을 파고들었다.
울음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고 제 옷이 젖어 가는 느낌도 들지 않았지만, 레나드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어깨를 보듬던 손이 부드럽게 움직여 아스릴의 몸을 감싸 주었다. 그가 안아 주자 온몸에 그의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또 죽는 줄 알았어요……. 이제야 겨우 피했던 그걸 다시 반복하는 줄 알고……. 그래도 저 확실히 정신 차렸어요. 전하께 가려고…… 황태자 전하께 돌아가겠다고 정신 다잡고 열심히 도망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래, 잘했다. 그런 일을 맞닥뜨리고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어. 잘했다.”
그녀의 말에 몇 군데 의아한 부분이 있었지만, 레나드는 그녀의 등허리를 큰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서 진정시켜 주었다.
정작 자신도 달려오는 길에 얼마나 분노에 떨었는지 모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열이 올라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온몸이 시큰거리던 것도 모두 잊힌 채 오로지 그녀의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레나드는 결국 아스릴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어 유리 온실을 빠져나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레나드의 드넓은 방 한쪽에는 두꺼운 암막 커튼을 두른 네모난 공간이 있었다.
암막 커튼을 내리면 완전한 어둠이 드리우게 해 두었는데, 지금 그의 침대는 커튼을 모두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해 놓으니 드넓은 황태자의 방 안에 조그마한 요새, 작은 동굴이 생긴 듯했다. 그 안에는 아스릴과 레나드가 들어가 있었다.
옆으로 누운 아스릴은 레나드의 품에 온전히 안겨 있었다.
가만히 가슴 앞에 손을 모은 채로 안긴 그녀를 내려다봐도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팔 안에 담긴 작은 몸, 자신의 가슴과 몸 여기저기 닿아 있는 말랑함, 은은하게 향긋한 체취와 맞닿은 심장의 두근거림.
눈으로 보는 것 외에도 그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많았다. 이미 그것이 아스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외상도 없고 본인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받은 충격이 적지는 않은 듯했다.
그래서 레나드는 그녀를 안아 든 채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옮긴 암살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을 움직인 것은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했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건 아스릴이었다. 그녀가 있기에 이토록 분노하는 것이기도 하고.
“괜찮다. 내가 있으니까, 정말 괜찮아.”
레나드는 그녀의 몸을 당겨 안아 주고 손으로 쓰다듬어 온기를 전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괜찮아요. 아까 잠깐…… 헛소리를 해 버렸어요.”
아스릴은 이제 제법 말짱한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아까는 정말 왜 그랬는지, 다시 생각해 보면 창피할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또 죽는다든지 하면서 이전 삶에의 힌트를 주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레나드를 보는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는 바람에 다리가 풀려 휘청거리며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헛소리라니, 전혀.”
“하지만…… 진짜 괜찮아요. 전하가 너무 반가워서…… 그래서 그랬나 봐요.”
아스릴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꼼지락대면서 중얼거렸다. 아마 자신이 아까 한 일이 쑥스러워 이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황궁 안에서 이토록 그대를 위험에 빠뜨리다니, 내가 잘못한 일이다. 내가.”
레나드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아스릴은 가만히 가져다가 가슴에 품었다.
“전하가 지척에 계신단 걸 알아서 정신 차릴 수 있었어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그냥 칼을 맞았을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에요.”
이전에는 분명 그랬다.
그녀가 눈치채기도 전에 그들이 들이닥치긴 했지만,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그저 혼자 죽는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촉촉이 젖은 얼굴을 느끼고서야 자신이 울며 죽어 가고 있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제가 거기서 공격당하고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레나드는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런 그의 배웅을 받으며 유리 온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 먼 유리 온실까지 달려올 수 있었을까. 의문이 생겼다.
“그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레나드는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은 아스릴이 화들짝 놀라 몸을 경직시켰다.
“전하께서도 혹시, 이렐린의 목소리를 들으세요? 예언자신가요?”
아무래도 본인의 경험이 있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레나드는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녀의 뒤통수를 감아 당겨 품에 안았다.
“그대가 위험할 때마다 내게 목소리가 들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