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유리 온실은 오늘도 따사로웠다.
다만 오늘은 찬란한 햇빛을 볼 수는 없었다. 진하게 드리우던 그림자 대신 오늘은 어딘가 가라앉은 듯한 색으로 물든 유리 온실이 아스릴을 맞아 주었다.
“이것도 분위기 있는데……?”
아스릴은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관리인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온실에 상주하는 것은 아닌지라 마주치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에 아스릴은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흐린 날의 유리 온실에 푹 빠져 버렸다.
황궁은 흐린 날보다 맑은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 항상 반짝반짝 빛나는 온실만 보아 왔던 것이다.
오히려 비가 와 준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돌아갈 때 비를 다 맞겠지만…….”
아스릴은 괜히 오지도 않은 비 때문에 샐쭉해졌다가 자신의 행동이 웃겨서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오던 길에 했던 생각 때문에 얼굴이 좀 달아올라 있는 아스릴은 주변을 좀 더 꼼꼼히 돌아보다가 살짝 지칠 때쯤 돼서야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는 자세한 설명을 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실제로 결혼식을 올리기까지는 아직 문제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자신을 결혼할 사람이라고 먼저 귀족들에게 소개부터 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우선 못을 박아 두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게 해 준 뒤에 그 장애물을 본격적으로 없애기 위한 거였어.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버티다가 몸살에 걸리고 만 모양이다.
“내가 뭐가…… 힘이 되어 주면 좋겠는데.”
아스릴은 창가 턱에 올려 둔 이렐린의 동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고 이상한 바람이 불지도 않았다. 이전처럼 시간을 되돌리든 공간을 어떻게 하든 기회를 주는 것도 없었고 신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그것은 이전 생에 제가 이미 한 번 제대로 사용한 적이 있음에도 사용 방법을 모르는 것이었다.
“진짜…… 내가 이렐린에게 사랑받고 있는 거긴 할까, 하는 마음이 생겨요.”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예언을 들을 때만 해도 제 쓸모를 찾을 것 같아 너무너무 좋았다. 이대로 쭉 가서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하지만 지금까지의 기운으로 보아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에게 짐이 되기는 싫은데…….
레나드는 분명 그녀를 온실 속의 화초들처럼 보살펴 줄 것이다. 따뜻한 곳에 두고 비조차 맞지 않게 보살피면서.
때가 되면 물을 주고 잎에 먼지가 나지 않게 닦아 주면서 그렇게 하면 자신은 그의 품 안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스릴이 원하는 건 그렇게 호의호식하면서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 예쁘게 말해 온실 속 화초지,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닌 만들어진 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으으…… 소름 돋는다. 그건 절대로 싫어.”
아스릴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그런 말을 읊고 있는 자신이 너무 웃겼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까지 들 뻔했다.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이렇게 사랑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레나드에게 매우 실례였다. 잠깐 속상해지려는 마음까지도 아스릴은 심호흡을 하면서 넘기려고 애썼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감정을 더 키우기만 하니까.
그것은 수도 없이 경험해 왔던 것이었다. 지금 이런 환경에 와서까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살짝 눈물이 날 뻔한 것을 아스릴은 입술을 끌어 올려 웃어 버렸다. 그리고 웃음을 따라 그대로 넘겨 버렸다.
너무 깊게 고민하다가 머리가 아파지는 것은 또 사양이다.
그때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여기는 뭐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뿐이었다. 이 분위기 속에서 저 혼자만의 기척에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유리 온실. 누구나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관리인이 보이지 않았으니 그가 온 것일 수도 있었고.
아스릴은 몸을 소파에 더 파묻었다.
다시 아까의 생각을 이어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하면 그가 나와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타타탓!
아스릴은 거의 눈이 감길락 말락 하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편안하게 앉아 있다가 날벼락 같은 기척을 느끼고 말았다. 땅을 짓치는 발소리에 아스릴은 번뜩 눈을 떴다.
한 명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기척……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장소는 많이 바뀌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꽤 오래 방치해 두었던 오두막이었다면 이곳은 황실에 있는 아주아주 화려한 유리 온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무슨 얄궂은 운명인가 싶게…… 그와 자주 가던 장소에 온 것마저 똑같았다.
4개월은 이미 지났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이었던 것인가.
아스릴은 번뜩 떴던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쩐지, 오늘은 평소와 다른 일이 너무 많았다.
그를 알아 온 시간 동안 한 번도 잔병치레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레나드가 아침부터 감기몸살에 시달리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보고 신기해했었다.
참, 아스릴 한 치 앞을 못 본다. 어떻게 상황이 달라졌다고 내가 죽었던 날을 잊고 살았던 건지.
게다가 오늘은 하늘이 우중충해서 다른 날과 다르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평소의 온실이었다면 나뭇잎들 외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그 그림자가 고스란히 보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흐린 날에는 그들의 발소리마저 무거운 공기에 눌려 먹먹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탁탁! 탁!
제가 무인이 아니기 때문에 맨발의 발소리를 여기저기서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른하게 소파에 늘어져 있던 아스릴은 문득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날카로운 예기가 비쳤다.
그래, 여기는 오두막이 아니라 황궁의 유리 온실이다. 레나드는 이전에 황후에게 독으로 당했던 약한 사람이 아니고, 함께하기로 약속한 미래가 있었다.
너무 많은 것들이 그때와 다른데, 죽음이라고 똑같으라는 법은 없는 거다!
아스릴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은 후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좀 더 크게 들리는 거 같아서 이번엔 방향을 가늠해 보기 위해 얼굴을 슬쩍 돌려 보았다.
그렇게 잠깐 집중하는 사이 뭔가가 좀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이 열리거나 틈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아스릴의 감각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귀가 쫑긋했다. 그들은 아스릴이 나갈 수 없도록 입구 쪽을 막고 있었다. 몇 명이지, 오두막에서는 세 명이었는데…….
정말 순식간이었지만 그것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정말이지…… 갑자기 울컥할 뻔한 것을 잘 갈무리하고 아스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밖으로 나가야 했다. 안에 있으면 어쨌든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사람이 사라지는 일은 아니니까 파트너가 제일 중요한 거지.
레나드를 만나러 가야 한다. 그 일념으로 머리를 쥐어짜 보기로 했다.
레나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반드시 갈게요.
그렇게 마음을 다지는 사이에 문득 시야마저 확 트이는 것을 느꼈다. 저기 저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너풀거리는 검은색의 옷자락을 발견한 것이다.
순간 손바닥이 매우 뜨거워졌다.
이 느낌은…… 이전에 독이 퍼지는 레나드를 붙들고 있을 때 느꼈던 감각이었다. 이걸 조용히 그의 몸에 흘려 보내어 몸에 흐르고 있을 독을 몸 밖으로 밀어냈었다.
이 능력에 대해서는 딱 한 번 발현했을 뿐이고 검증되지 않았지만…… 한번 해 보자!
무턱대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신성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없고 확신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목숨이 달려 있었다. 지난 4개월의 삶을 마치는 순간, 마치 시험에 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스릴은 그들의 위치를 파악했지만 그건 사실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어차피 입구 쪽에 있었고, 제가 그들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기에. 틈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제 손을 뜨겁게 만드는 이 힘으로 그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흡…….”
아스릴은 저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한 기합 소리를 내며 온몸의 힘을 끌어모으는 상상을 했다.
손을 뜨겁게 만드는 게 아직 자신의 몸 안에 남아 있으니, 그걸 한데 모으자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은 조금씩 조금씩 성과를 이루어 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지나 팔 끝으로 모인 것은 조금씩 빛을 띠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에 그들은 본분을 잊고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때였다.
아스릴은 내내 집중하느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힘이 모여 있는 손을 각각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로 뻗었다.
쿠쾅!
“끄악!”
“헉!”
놀랍게도 그 힘은 실체화가 되어 뻗어 나갔다.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한 팔이 저릴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아직 한 명이 더 있었다. 아스릴은 제 팔에 남아 있는 감각을 재빠르게 캐치하고는 이번엔 다리에 힘을 모으는 상상을 하며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당하는 모습에 놀라 잠시 경계를 늦췄던 이도 아스릴이 땅을 박차자 바로 정신을 차리고 입구 쪽으로 내달렸다.
탓탓탓! 바쁜 발소리만 정신없이 울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문을 나선다고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스릴은 간절히 바랐다. 저 문을 나서야 했다. 저들로부터 제대로 도망을 쳐야만 했다.
“조금만 더!”
열려 있는 유리 온실의 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자객의 팔이 그녀를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