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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76화 (76/106)

76화

“황태자 전하……?”

집무실의 문을 노크한 것은 아스릴이었다. 그녀의 나긋한 목소리를 들은 레나드와 세드룬은 순간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잔뜩 무섭게 굳어 있던 얼굴들이 풀리고 레나드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들어와도 된다.”

순식간에 칼날을 숨긴 부드러운 목소리에 세드룬이 턱이 빠진 듯 입을 떡하니 벌렸다. 경악한 그의 얼굴을 발견한 레나드는 괜히 민망한 탓에 미간을 팍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아스릴이 들어왔다. 세드룬은 또 그녀를 바라보면서 잠깐 넋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황궁에 들어오고 나서는 더 좋은 것을 먹고 더 마음도 편하게 지내고 잘 돌아다녔는지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세드룬은 아마, 이제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애로 이렐린의 꽃이라는 데모트의 첫째 영애를 꼽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매우 답답하고 억울해질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따라올 수 없을 만한 미모의 소유자를 지금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었으니까.

같은 데모트 영애라는 면에서 납득이 가기도 했지만, 사실 그냥 두 사람을 나란히 생각한다면 도저히 자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풍기는 기운부터가 다르니까.

“쯧. 아스릴, 어떡하지. 세드룬이 또 그대의 미모에 반해 버린 모양이야.”

아스릴은 책상 앞까지 다가와 함께 식사하자는 말을 하려다가 먼저 선수 친 레나드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세드룬을 바라보았다.

귀가 빨개진 채로 살짝 입을 벌리고 그녀를 보고 있는 모습에 아스릴 또한 수줍어지고 말았다.

“여기 햇살이 너무 좋아요. 제 머리카락이 반짝거려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일 거예요.”

이러저러한 변명을 해 보지만 세드룬은 이제 겨우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마치 신전에서 이렐린의 동상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눈빛 같은 그를 보며 아스릴은 멋쩍게 웃었다.

“두 분이 대화하시는 데 방해한 건 아니에요?”

결국 아스릴은 말을 돌렸다. 레나드만 있었다면 괜찮았겠지만 곁에 세드룬이 있다는 것은 급한 일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요 며칠 그는 레나드의 곁을 떠나 있었으니까.

무슨 일을…… 하고 돌아온 것일까.

“방해되지 않았다. 할 얘기 다 마친 타이밍이었어.”

“그거 다행이네요.”

살포시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세드룬은 또 넋을 놓았다.

자신의 주인과 이 신 같은 여인은 정말 너무나도 완벽하게 어울린다. 자신이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두 사람이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려면 큰 고비를 하나 넘어야 할 것 같아서 매우 가슴이 불편해졌다.

“아, 세드룬도 함께 가요.”

“……예?”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련을 지나 그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상념에 빠져 있던 세드룬에게는 도저히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어, 어디를…… 말씀이신지…….”

이미 레나드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쑤욱 시선이 높아지는 그를 따라 고개를 들다가 세드룬은 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식사하러 가요. 자주 봐야 제 얼굴에도 익숙해지죠.”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유유히 집무실을 나섰다. 꼭 붙어서 가야 하는 건 아니라는 듯 가볍게 문을 나서는 아스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는 천천히 레나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농담을 굉장히 진담처럼 하십니다.”

어리바리하는 세드룬을 보는 레나드는 그저 이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흥미로울 뿐이었다.

저와는 곧잘 농담도 주고받고 하지만 본래 세드룬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기사들과 군대, 그리고 첩자들을 모두 아우르는 그의 실력은 거의 레나드와 맞먹는 정도였다.

아마 레나드와 세드룬만 있다면 황실 기사단만 끌고 동쪽으로 가도 아도피트의 2만 정도는 무리 없이 정리했을 정도의 힘이었다.

“황후의 손을 잡았다고 즐거워했을 왕자의 얼굴이 그려지는군.”

“주의 기울이겠습니다. 때가 오면…… 아주 자근자근 짓밟아 주시죠.”

레나드는 쿡쿡 웃으며 살짝 긴장이 풀린 세드룬의 등을 툭툭 치고는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 * *

“정말 괜찮다니까요.”

아스릴은 웃음을 꾹 참으며 레나드의 얼굴을 쓸어 주었다.

“이런 모습 보이는 것부터가 괜찮지 않다. 그러니까……. 끄응…….”

레나드는 지금 심한 감기에 걸렸다.

의사를 부르고 약을 먹고 온갖 열이 나는 것들을 침대로 모아 그의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시켜 주고 있었다.

“미안해요. 전하께서 아프신데 자꾸 웃어서.”

하지만 아스릴은 그를 걱정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그의 땀에 젖은 이마를 손으로 닦아 줄 뿐이었다.

“조금 속상한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좋군. 나를 그렇게 어린이 보듯이 보고 있는데…….”

“저니까 괜찮은 거예요. 다른 사람이 이렇게 봤으면 감옥에 넣지 않았을까요?”

제법 농담까지 던진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목도 아프고 기침을 하면 배도 당기고 온몸의 근육이 으슬으슬 떨리는 거 같은데, 저렇게 평온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조금 심술이 날 것도 같았다.

“조금…… 기분 나쁜데도, 그대가 괜히 내 걱정을 하느라 울상을 짓는 것보다는 지금 이게 더 나은 것 같군.”

헛웃음을 흘리는 그를 보고 아스릴은 이불을 끌어다 턱 밑까지 꼬옥 덮어 주었다.

“응. 그런 거 같아서 나도 계속 신경 쓰고 있었어요. 아프면 쉽게 우울해져요. 그러지 말고 얼른 몸 추스르고 나아서 저랑 같이 밥 먹어요. 알았죠?”

“하아…… 그래. 미안하구나.”

아스릴은 그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려다 멈추고는 그의 손등에 입 맞췄다.

“아쉽지만 감기몸살은 키스하면 안 된대요. 그러니까 얼른 나아요.”

아스릴이 그의 손등에 입술을 대고는 속살거렸다. 그는 아스릴의 작은 도발에 웃음을 짓다가 가슴이 뻐근해 오는 것을 느끼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번 감기몸살만 끝나면…… 그대는 나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손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에 은근하게 깍지를 껴 오는 커다란 손에 살짝 긴장이 담겼다.

아픈 주제에 낮게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가 섹시하게까지 느껴졌다. 그의 눈빛이 그 뜻을 은근하게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스릴은 그의 의도를 바로 눈치채지는 못했으나 왠지 모르게 긴장되어 아랫배가 당기는 느낌이었다.

“그…… 어……. 아무튼 얼른 낫기나 하세요.”

“쿨럭. 하아. 어디로 갈 예정이야?”

짧지만 강한 기침을 토해 내면서도 레나드는 아스릴을 걱정했다.

“유리 온실로 갈 거예요. 걱정 말아요.”

어딜 가는지 알 수만 있으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레나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아스릴은 그를 방에 두고 나왔다.

“곁에서 간호하면 좋으련만…….”

그것을 극구반대한 것은 의사의 뜻이었다. 아픈 사람 옆에 있다가 옮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매우 건강한 상태라는 것은 알고 있어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아스릴은 평소와 다름없이 본궁을 나섰다.

이제는 봄의 한중간이었다. 짧게 지나가는 봄은 유리 온실로 가는 길 주변마저 물들여 주었다.

평화로운 황궁의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황후와 레나드의 사이는 더 이상의 진척이 없고…… 사실 레나드와 아스릴의 사이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시녀들과 이야기를 나눌 일이 많아졌는데, 어느 날엔가 수다스러운 시녀가 하는 말을 얼핏 들었었다.

이렇게나 숙맥이실 줄 몰랐다고. 한밤중의 본궁이면 안에서 자는 사람들 외에 아무도 없는 공간인데 이게 말이 되냐면서.

그녀의 흥분을 얼핏 이해하지 못한 아스릴은 그저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 같았으면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를 확! 덮쳤겠다!’

호기 넘치는 목소리에 시녀들의 웃음소리가 꺄르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사실 맞는 말 아닌가? 이제 와서 뭘 고민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야야, 이해해 줘. 우리 황태자님도 처음이실 거 아냐. 안 그래?’

‘하긴 그래. 영애님 이렇게 만나는 것도 처음이니까. 진도 나가는 거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 하고 계신 거 아냐?’

문득 그녀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키스하시는 건 꽤 자주 본단 말이야. 아주 모르시진 않는 것 같은데…….’

‘기회를 노리고 계신 걸까! 한 방에! 아주 기억에 남는 것으로 말이야!’

‘……우리가 궁을 아름답게 꾸며 드려 볼까? 그럼 두 분 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

‘키스 다음이라니……!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 남자가 되신다니!’

혈기왕성한(?) 여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아스릴의 한도를 초과하고 있었다.

귀여운 그녀들의 반전에 넋이 빠져 있던 사이 아스릴은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그제야 알아차렸었다.

자신의 온몸을 간질이는 듯했던, 그 긴장을 동반하는 감각들이…… 그걸 의미하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 온실로 걸어가는 길, 아스릴은 문득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여 버렸다.

발끝을 보고 걷는 사이 아스릴은 그녀들이 해 준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당연하게 여겨지는 그것이 아스릴과 레나드 사이에는 없었다. 키스를 나누고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정도가 다였다.

그것만으로도 물론 충분히 야릇한 느낌이 들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너무 좋은 감촉이기는 했지만…….

‘그럴 땐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용기를 내 주셔야지.’

‘근데 너희, 아직 혼인도 안 하신 두 분으로 이런 이야기를 나눠도 되는 거야?’

‘꺅! 그럼 어때! 두 분이 지금 거의 부부나 마찬가지인 거 아냐?’

부부라면 응당 자연스러울 그 일…….

어쩌면 아스릴도 ‘그다음’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긴장하게 되는 그 감각 이상이 뭐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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