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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74화 (74/106)

74화

아스테리아는 집을 나설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 올렸던 머리 장신구가 빠져 버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씩씩대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중을 나왔던 씨씨를 밀친 그녀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잡아 들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테리아 아가씨, 오늘 벨파인 공작저에서 티 파티 한다고 신나서 나가지 않으셨어요?”

“그러게, 황태자비 후보에 대한 정보 얻어 오겠다고 나가시더니…….”

밀쳐진 씨씨를 부축한 어린 하녀 둘이 서로 소곤거리면서 한마디씩 꺼냈다. 씨씨는 하녀들의 손에 기대어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는 두 눈 살짝 감고 아스테리아를 따라 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씨씨는 묵묵히 아스테리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자기 몸을 감싸고 있던 각종 장신구들은 이미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고, 아스테리아는 파티션 뒤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화를 내고 있었다.

“아오, 열받아! 지만 혼자 고상한 척하기야? 자기도 하고 싶으니까 초대에 응했던 거면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드레스가 잘 안 벗겨지자 이제 드레스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씨씨는 묵묵히 파티션 뒤로 들어가 아스테리아의 허리를 조이고 있던 단단한 속옷의 매듭을 풀어 주었다.

“후아, 정말! 씨씨, 아빠는 어디 계셔?”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지 크게 심호흡을 한 아스테리아가 날카롭게 물었다. 씨씨는 그녀에게 편안한 실내 드레스를 건네며 그녀가 벗어 던진 묵직한 드레스를 챙겼다.

“백작님께서는 지금 마님과 함께 응접실에 계십니다.”

아스테리아는 대꾸도 없이 재빠르게 실내 드레스를 꿰어 입고는 또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 백작저가 매우 싱숭생숭한 것은 사실이었다.

백작저 정문으로 화려한 마차가 들어온 이후부터 뭔가 미묘한 기류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씨씨만이 눈치챘고, 모두가 요즘 백작저의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느낀 것은 아스릴의 소식이 들려오고부터였다.

왠지 아스테리아의 짜증을 유발한 일이 아스릴과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아 씨씨는 빠르게 발을 옮겼다.

콰당!

“꺅! 까, 깜짝이야.”

응접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서 고요히 차를 마시면서 요즘 굉장히 날이 서 있는 백작의 기색을 살펴보고 있던 백작 부인은 비명까지 지르며 화들짝 놀랐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게 아스테리아라는 걸 확인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얘는! 아버지 계시는데 어디서 그렇게 문을 쾅쾅 열고.”

화가 났다는 걸 온몸으로 발산하듯 발을 구르며 안으로 들어오는 아스테리아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 명이 삼각 구도로 자리를 잡고 앉아선 각자의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씨씨는 살짝 뒤늦게 들어와선 어린 하녀가 가져다준 아스테리아 몫의 티웨어를 테이블에 세팅해 주었다.

“오늘 벨파인 영애네 티 파티가 있어서 다녀왔는데, 시그넬이 뭐라는 줄 알아요? 이미 황태자비 자리에 주인이 생긴 거 같은데,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냐고 그러는 거예요!”

황태자비 이야기가 나오자 백작 부인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당연히 딸과 함께 열을 올릴 백작 부인 외에, 데모트 백작의 살벌한 눈이 아스테리아를 향했다.

“황태자비 자리에 주인…….”

데모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참 씩씩대며 백작 부인과 함께 2차전을 치를 생각을 하고 있던 아스테리아는 그제야 데모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아빠는 알고 있었어요? 뭐야? 뭔데요? 황궁 다녀온 다섯 명 중에 시그넬도 아니고 나도 아니면, 도대체 누가 황태자비가 된 거예요?”

차라리 시그넬이었다면 분해도 납득이라도 됐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데 그녀도 아니고 자신도 연락을 받은 것이 없는데, 그사이 황태자비가 결정되었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하지만 백작은 인상만 험악하게 쓸 뿐 대답이 없었다.

“누군데 그래요, 여보? 아스테리아보다 적절한 사람은 없을 텐데? 응? 시그넬 영애도 아니면 대체…….”

“아스릴이다.”

당장이라도 버럭 할 것 같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이를 악문 듯 한마디만 내뱉었다.

“뭐…… 뭐…….”

백작 부인과 아스테리아는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분명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여기서 나올 수 있는 이름은 아니었던 것이다.

멍청한 얼굴이 되어 대꾸도 못 하는 두 사람을 못마땅하게 보던 데모트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소식도 못 들었나! 지금 온 제국이 떠들썩한데. 아도피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던 예언을 전한 게…… 아스릴이란 말이다. 그것이 빌미인지 핑계인지, 아무튼 황궁으로 데려와선 아스릴을 황태자비로 맞이하겠다고 선언했다고.”

그렇게 황태자비에 올리겠다고 알아보러 다닐 때는 이거저거 잘만 알더니.

데모트가 쯧, 혀를 차자 굳어 있던 두 여자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스릴이 황태자비요? 그게 말이 돼요?”

“너는 지난번 신전에서 보고 와 놓고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게냐! 그때 네가 황태자 전하 앞에서 망발을 하는 바람에 이렐린의 꽃도 박탈됐다는 거 기억나지 않는 것이야!”

“아, 아빠…….”

아스테리아는 그가 소리를 지르자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본래 큰소리도 잘 안 내던 아버지였는데…… 이것도 다 아스릴 그것 때문이었다.

잔뜩 굳어 버린 아스테리아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말았다.

금지옥엽 딸의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흔들리도록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본 백작 부인은 화들짝 놀라 아스테리아의 어깨를 감싸 당겨 안아 주었다.

“아니, 아스릴이 거기서 황태자 전하랑 있다는데, 어느 누가 안 놀라겠냐고요. 안 그래요? 그리고 예언이라니…… 그거 정말이에요? 집에서는 그런 낌새 한 번도 없었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하면 더 문제인 게 아닌가. 그러한 능력도 없는 아스릴이 좋다고 거짓말을 꾸며 내고 있는 거니까.”

아스테리아의 눈물에는 데모트 백작도 약해져 버리고 말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그녀를 응시하면서 읊조리듯 말하는 내용마저 절망이었다.

“레나드 전하는 도대체 어째서 그런 아이를 좋아하는 거냐고요, 정말……. 아스릴, 걔는 신전으로 간다길래 눈에 안 보여서 좋아했더니. 완전 내 인생을 방해하고 있잖아요!”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리면서도 앙칼지게 아스릴에게 악담을 쏟아 내는 아스테리아를 보며 그는 고뇌에 빠졌다.

“황태자비가 되고 싶은 거냐, 레나드 전하의 반려가…… 되고 싶은 거냐.”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던 데모트가 문득 그렇게 물었다.

어차피 레나드와 결혼하면 황태자비가 되는 거고, 황태자비가 되려면 레나드와 결혼해야 하는데, 무슨 소리냐며 쳐다보는 두 여인의 눈길에도 데모트는 꿈쩍하지 않았다.

“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맞아요, 여보. 그러……니까 대체 뭘 고르라는 얘기예요?”

“레나드라서 매달리는 것인지, 황태자비가 되고 싶은 것인지를 묻는 게 아니냐.”

데모트의 진지한 질문에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했다. 도무지 무엇을 위한 질문인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였다.

백작 부인의 눈짓에 아스테리아는 깊은 고뇌에 싸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레나드라는 남자일까, 아니면 예비 황후인 황태자비일까.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응접실에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고요가 찾아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 안에서 데모트는 오만 가지 생각으로 머리는 복잡해지고 가슴은 까맣게 변해 가는 것 같았다.

저 아이의 이 대답으로 자신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자신이 마음먹게 하는 데에는 아스릴도 한몫했다. 그 아이가 이곳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데모트는 그것만 보기로 했다.

이 아름다운 나의 딸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말이다.

든든한 배는 지금 계속해서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공작이 아닌 자신을 택한 것은, 원하는 것의 방향이 같기 때문이겠지. 제대로 응해 주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려 했지만, 결국 최종 결론에서 중요한 것은 아스테리아가 무엇을 원하느냐였다.

아스테리아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눈을 들어 올렸다. 이제 져 가는 붉은 햇살이 들어와 그녀의 금발을 물들였다. 보랏빛 눈동자가 이지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데모트는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느 쪽이든,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다.

“아빠, 저는 레나드 전하가 좋아요. 그런 남자는 다시는 없을 거 같아요. 제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란 건…… 다 그분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한 것 아니었을까요?”

데모트 백작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말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자기 안의 다짐이 굳어지고 있는지 아스테리아의 얼굴에 비장함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분 옆에 아스릴이 있는 거, 그분이 아스릴의 앞을 막아서는 거, 그분이 아스릴의 편을 들어 주시는 거 전부 다 싫었어요. 그게 너무너무 싫었어요. 황태자비도 물론 돼야겠지만, 이렇게나 간절한 건 역시나 레나드 전하 때문이에요.”

그 고민들은 다 어디 가고 단호하게 말하는 아스테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데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은 결정이 났다. 데모트는 두 눈을 스륵 치켜뜨고 부인과 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못 비장함이 흘러 왠지 모르게 무서운 예감이 들 것만 같았다.

“정말요? 아빠가 역시 최고예요! 저 아빠만 믿을게요?”

“여보…….”

아스테리아는 아빠를 정말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안 것인지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매달렸고, 백작 부인은 왠지 모를 불안함에 그를 불렀다.

비장한 데모트 백작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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