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우와…….”
아스릴은 돌아본 곳에 웅장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떡 벌려 소리를 내고 말았다.
“유리 온실이다. 대륙에 오직 하나, 이곳에만 있는 것이지.”
레나드가 반짝이는 벽들 중 하나를 붙잡더니 그것을 밀어 열고는 아스릴을 불렀다.
“유리……군요.”
그 투명한 벽은 모두 유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가 열어 준 문조차도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푸르른 잎을 가진 나무들과 풀, 그리고 색색깔의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했다.
“와……. 아직 봄인데, 새싹 좀 났는데…….”
신전에서야 근처에서 푸른 나무나 꽃들을 좀 보았지만, 황궁으로 오면서 아스릴은 지금 아그로드의 계절이 초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신전 근처보다도 더 푸르르고 화려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가운데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위에 아주 화려하게 자리하고 있는 티웨어들과 샌드위치, 쿠키, 스콘이 담긴 티 트레이를 보면서 아스릴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이거…… 다 준비하신 거예요? 우와, 정말 고맙습니다. 시녀분들 너무 힘드셨겠어요, 본궁이랑 여기 되게 멀던데…….”
놀랐던 걸 가라앉히고 나니 아스릴은 수다쟁이가 되어 버렸다. 이 많은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의 손이 갔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너무 벅차면서도 감사했던 것이다.
“하하. 나한테만 감사할 줄 알았더니, 반응이 참 새롭군. 그래, 시녀들이 고생을 좀 했겠군. 여기까지 이걸 들고 걸어왔을 걸 생각하면…… 그래, 여기다 티 테이블을 준비해 준 시녀들에게 포상이라도 내려야겠다.”
아스릴은 레나드의 너스레에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스릴은 이곳에 오고 벌써 몇 번이나 이런 환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때마다 레나드의 가슴이 얼마나 따뜻하고 촉촉해지는지 아마 그녀는 모를 것이었다.
“사람들이 예언을 내린 여인이 황궁에 있다고 하자 보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더군. 한 번만 보게 해 달라고 말이야. 마치…… 아스릴이 신이 된 것 같네.”
두 사람은 푸르른 나무에 둘러싸인 테이블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차를 따르는 것은 아스릴의 몫이었다. 대신 그녀는 이런 티타임을 가져 보는 것이 처음이라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건드리고 하느라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그녀가 조심히 따라 낸 홍차는 살짝 붉은 기를 내며 새하얀 찻잔을 채웠다.
“다들 너무 저를 대단한 사람처럼 보시는 것 같아요. 저는 그냥 들리는 걸 전달했을 뿐인데.”
아스릴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방에는 대신관이 전해 주었던 이렐린의 동상이 아주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뒤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아스릴은 이렐린의 신전이라 불렸던 동굴에 갔던 때처럼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가 저를 어둠의 구덩이에서 구해 주었고, 황태자를 도울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그 자체로 충분히 대단한 일이니까. 너무 부담스러워할 것 없다.”
레나드는 아스릴이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스릴도 그를 따라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바깥의 이야기에 눈썹을 늘어뜨리던 아스릴은 주변을 둘러보며 평정심을 찾는 것 같았다. 작은 꽃잎을 들여다보다가 저 뒤의 푸른 잎을 활짝 펼치고 있는 나무를 입을 벌린 채 올려다보기도 했다.
“이곳은 짧게나마 어머님이 좋아하던 곳이라고 들었다.”
식물들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아스릴은 그가 꺼내는 이야기에 조심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에서도 그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낸 적은 딱 한 번이었다. 그것도 깊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일부러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전할 이야기가 없어서라는 것이 더욱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누가 누굴 짠해하는 거냐며 마음을 추슬렀지만 그런 부재의 아픔은 자신과는 또 다른 것일 테니까.
“그런 것치고는 관리가 너무 잘돼 있어요.”
전혀 버려진 기색 없이, 오히려 관리가 너무 잘되고 있는 곳이어서 그분의 것이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버지…… 황제 폐하께서 계속해서 관리할 수 있도록 시종 하나를 임명했다고 하더군. 이곳의 관리자로 임명을 해 준 것이지.”
그분이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어 새로운 황후를 들여야 했던 황제였으나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애정을 계속 가지고 계셨던 모양이다.
“지금의 황후가 들어오고 나서 그의 관심은 많이 떨어졌지만, 사명을 가진 시종은 열심히 관리를 하고 있었지.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왔어.”
시종은 노구를 이끌고 황태자 전하를 뵙게 해 달라 알현을 요청해 왔었다. 당시 10대였던 황태자의 시종장과도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그것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전하. 저는 오래전 타계하신 전 황후 폐하의 유리 온실을 관리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 말이 제게 전해 주었던 충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현재의 황후와 그녀의 아들을 두고 깊은 괴리와 고민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새 황후를 아끼는 다정한 황제를 보고 있자면, 그 셋이 가족이고 자신은 마치 이방인처럼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종을 통해서 어머니의 흔적을 찾은 것이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이제 소임을 다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아직 움직일 수 있고 생활을 하기엔 부족함이 없지만, 온실을 온전히 감당하기엔 많이 늙었지요.’
그가 보기에도 시종은 매우 늙었다. 본궁에서 유리 온실까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할 정도의 상태였다.
‘새로운 관리자를 임명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시종을 바라보던 레나드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다른 이들 앞에서는 절대 보여 준 적 없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때 사람의 눈물이 그토록 뜨겁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울고 있는 저를 보면서 시종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치 자신의 친할아버지인 것 같은 인자한 미소에 더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그날 그 할아범을 따라 유리 온실에 처음 왔었다. 그 노구를 이끌고도 그날까지 온실을 아름답게 관리하고 있었지.”
아스릴은 망울망울 눈동자 가득 눈물을 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물마저 예뻐서 레나드는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주었다.
또르르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은 순간적으로 레나드의 손에 닿았을 때 뜨거운 온기를 전해 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할아범은 궁을 나서도 돌봐 줄 사람이 없었기에 유리 온실 근처에 집을 하나 지어 주었다. 그리고 젊고 튼튼한 새로운 관리자를 임명하고 함께 살도록 해 주었지. 오랫동안 이 온실을 아름답게 지켜 준 이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보살핌을 잘 받을 수 있도록.”
“그렇군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이 온실…….”
이야기를 담은 곳은 더더욱 아름다워지는 모양이었다. 또 새로운 걸 배운다.
그의 이야기가 담긴 온실은 아까의 신기했던 마음에 더하여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이곳을 첫 데이트 장소로 삼아 준 것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럼 지금은 그때의 젊고 튼튼한 새로운 관리자께서 관리해 주시는 거예요?”
아스릴이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배시시 웃었다. 가라앉으려고 하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농담을 건넸다.
그런데 레나드의 부드러운 얼굴이 사악 굳어 버리는 게 아닌가. 조금 분위기를 풀고 싶었던 아스릴은 갑자기 어두워지는 그를 보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설마 그 젊고 튼튼한 새로운 관리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난데없는 반응에 놀라서 오만 이상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천천히 레나드의 입술이 열렸다.
“젊고 튼튼했던 건 그때 얘기다. 그는 이제 중년에 가까워졌어. 그러니 관심 갖지 말아라.”
아스릴은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고개를 아무리 기울여 보아도 관리자가 중년이 된 것과 자신의 질문과 그의 기분이 나빠진 것에 대한 상관관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 네, 그……렇죠. 시간이 지났으니 나이가 드셨겠죠?”
그의 말뜻을 이해 못 하고 방황하는 눈동자를 보고 있던 레나드가 씨익 웃음을 보였다.
“이건 뭐, 알아들어야 질투를 해도 먹히지.”
갑자기 가벼워진 그의 대꾸에 아스릴은 더더욱 혼란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왜 화가 났고 왜 풀렸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엔 반대편으로 고개를 다시 기울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레나드는 이제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마음에 드는지, 뭐가 그리 웃긴지를 더더욱 모르겠다.
뭐, 한 가지 확실한 건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어 젖히는 레나드의 모습이 너무너무 보기 좋다는 것.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그가 이렇게 즐겁게 웃어 준다면 그걸로 되었다. 혹여나 과거의 기억 때문에 이곳이 슬프지는 않을까 우려했던 게 확 날아가 버렸다.
과거의 기억도 모두 공유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를 붙들고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나누면서 둘이 손잡고 한 발 더 앞으로 내딛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다 털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난다면, 이제는 앞을 바라보며 온전하게 오늘을, 내일을, 그리고 먼 훗날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될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가 차올랐다.
아스릴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레나드의 손을 톡톡 건드리다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렸다.
그 손을 꽉 쥐고 웃어 주는 레나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그 웃음에 환하게 마주 웃어 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