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이게 누구지.”
예상했던 대로, 별궁에서 마주친 것은 황제보다 황후가 먼저였다. 그래도 반 정도의 확률로 자리를 비우는 황후였기에 기대를 해 보았지만 결국 이렇게 마주치고 말았다.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과연 황후는 아스릴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아그로드의 아름다운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스릴……이라고 합니다.”
눈치가 빠른 아스릴은 황제를 만나러 온 곳을 지키고 있는 이 화려한 여인이 황후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이 레나드의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그녀는 성 없이 이름만 말하는 인사에 움찔 미간을 떨었다. 아직 회의 시간에 있던 일을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 사람은 이번 아도피트 침략을 예언해 준 이렐린의 아이, 아스릴입니다.”
“예언…… 이 영애가……?”
클로이는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금방 사리고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전쟁의 승리 소식을 전하고부터 클로이의 얼굴은 내내 굳어 있었다. 그동안 조용히 아무 소식 없이 지낸다 했더니만 무슨 심기 불편한 일이 있었던 것인지 처음부터 표정 관리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네. 덕분에 동쪽 영지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마을을 빼앗기지도 않았습니다.”
“아, 그래요. 그거 좋은 결과로군요.”
황후는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듯이 눈은 아스릴에게 고정한 채로 읊조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에게서 뭔가 미묘한 기색을 느꼈다. 아도피트의 침략을 제때 막아 내어 레나드의 위상이 조금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것이라면 그 화는 자신에게로 향해야 맞다.
예언이 있어서 그것을 일찍 휘어잡을 수 있었다고는 하나 조금 늦게 알았다 한들, 아도피트의 2만 정도는 거뜬히 물리치고 빼앗긴 마을마저 단번에 수복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애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이지.”
이렇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유를 대번에 알아낼 수 없어서 답답했다. 이만큼 화를 낸다는 것은…… 혹시나 이 전쟁에 지분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어차피 제압될 전쟁이 빨리 끝난 것이 문제였다면…… 전쟁이 길어질수록 얻는 게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싸한 느낌이 들어 그의 미간이 순간 험악하게 좁아졌지만, 얼른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클로이와는 항상 눈치 싸움이다. 이렇게 기색을 읽히는 순간 숨겨 왔던 것들이 하나씩 들통난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예언을 알려 주어 제국에 큰 도움이 된 영애를 황궁으로 초대하였습니다. 황궁으로 들어왔으니 당연하게도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아스릴을 향했던 클로이의 시선이 다시 레나드에게로 옮겨 왔다. 클로이의 서늘한 잿빛 눈동자가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듯이 계속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런다고 표정을 읽힐 레나드가 아니었다.
“어디 가시는 길이었나 본데, 마음 놓고 다녀오십시오. 돌아오실 때까지 있겠습니다.”
클로이는 황제가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나오다가 두 사람을 맞닥뜨린 참이었다. 그저 잠시 필요한 것을 가지러 간다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외출용 숄까지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고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요. 나가기 전에 마주쳐서 나와도 인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네. 들어가 봐요.”
나름 아스릴을 외부인, 그러니까 아직 레나드의 사람이라고 인식하지 않은 것인지 상냥한 미소를 지어 준 클로이는 그대로 그들을 지나쳐 가던 걸음을 옮겼다.
경직되어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있던 아스릴은 멀어지는 클로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눈빛이 서늘한 여자였다. 단순히 눈동자가 잿빛이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강렬한 것을 담고 있었다. 아스테리아나 데모트 백작에게서도 본 적 없던 것이었기 때문에 아스릴은 두 사람의 대화를 긴장 속에 바라보고 있었다.
황후는 명백하게 황태자의 적이었다.
“느꼈겠지만……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않다.”
“예, 바로 보였어요. 엄청 날카로운 분이시네요.”
아스릴은 살짝 어깨를 떨었다. 레나드는 황후의 눈길만으로도 주눅이 든 듯한 아스릴을 살짝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대신관을 처음 만나는 날에도 떠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스릴은 사람의 지위 때문에 주눅이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의문을 뒤로한 레나드는 문을 마저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상념에 빠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황후 때문에 자주 오지 못하지만 딱 들어서서 보면 도저히 오랫동안 의식을 잃은 채 간호를 받고 있는 환자가 누워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곳이었다.
햇빛이 잘 드는 방 안은 별다른 냄새도 없이 상쾌했다. 창문에 조금 더 가까운 위치에 황제가 누워 있는 침대가 있었고, 옆에는 거의 침대 같은 소파가 하나, 그 옆에 협탁이 하나 있었다.
그 외에 가구들이 몇 개 있었지만, 넓이에 비해 많이 휑했다.
“너무너무 깔끔하고 환하고 예쁜 방이에요.”
혹시나 실례가 될까 싶어 아스릴은 레나드의 귀에 대고 얕게 속삭였다. 속살거리는 목소리의 얕은 진동과 귓바퀴에 살짝 닿은 그녀의 손, 그리고 작은 호흡 소리까지 레나드는 내용보다 감각에 더 집중해 버렸다.
“하녀들이 각별히 신경 써서 청소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아픈 분의 방이다 보니.”
레나드도 그녀에게 맞추어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아스릴은 귓가를 울리는 나직한 울림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자신도 느꼈던 감각을 그녀도 비슷하게 느낀 것 같은 반응에 레나드가 흡족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더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곁에 있는 가구들은 모두 황후가 사용하는 것들인 모양이었다.
바깥엔 마치 한순간도 곁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알려져 있는 듯한데…….
“폐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다짜고짜 아스릴은 황태자의 연인으로 소개되어 버렸다. 황제의 용태를 살펴보고 있던 아스릴은 인사해야 하는 타이밍을 놓친 채 화들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레나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씨익 웃고 있었지만 아스릴의 눈은 보지 않았다.
“아, 그, 저…… 아스릴이라고 합니다. 성은…… 사정이 있어 버렸습니다.”
레나드가 황제 앞에서 거칠 것 없이 솔직해지는 느낌을 받은 아스릴은 자신을 소개할 때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데모트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스릴은 인사를 하고서 소문의 황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잠든 듯이 누워만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그 몸은 아직까지도 생을 유지하며 살아 있었다.
그로 인해 신체적인 이상보다는 마법적인 어떤 것에 의해 이런 상태가 된 것이라는 추측으로 한동안 뻔질나게 황궁에 마법사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몸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세간에 알려진 것은 황제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해 몇 개월째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였다.
그 외의 상세한 이야기는 신전에서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레나드가 직접 들려준 것이었다.
“이번에 그녀가 이렐린의 예언을 듣고 알려 주어서 아도피트의 침공을 막았어요. 그걸 핑계로 황궁으로 데려왔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이상한 여자를 황태자비로 만들려고 하시기에 조금 서둘렀습니다. 말씀드리기도 전에 일을 벌여 죄송합니다.”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서 레나드는 읊조리듯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조곤조곤 차분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황제를 향한 보고 같기도 했고 아버지를 향한 안부 인사 같기도 했다.
레나드의 목소리는 언뜻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것 같아도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애정을 언뜻언뜻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께 더는 이런 일들을 말씀드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황후 폐하와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차분해 하마터면 그저 곁에서 같이 고개를 끄덕끄덕할 뻔했다. 뒤늦게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한 아스릴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 들어오면서 그녀 또한 느끼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서로를 견제하면서 티를 내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선언을 하는 걸 보면.
“아버지께서 일어나 계시진 않지만…… 그 때문에 어느 편이신지 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요. 저는 살아야겠습니다. 이전에도 죽을 생각 없었지만, 이제는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레나드는 그렇게 말하며 아스릴의 손을 가져와 가만히 잡았다. 그의 말을 제대로 따라잡지를 못해 심각하게 경청하고 있던 아스릴은 그의 손이 주는 감촉에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살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살랑이며 그의 앞머리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과 청결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방 안에서 병상에 누운 황제와, 그를 보며 진지하게 말을 하는 레나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다만 그가 말한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이라는 것을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로 알 수 있었다.
“황후 폐하를 그만큼이나 사랑하고 계신 거라면, 이제 제 이야기를 하러 오지는 못하겠지만 아버지를 이해는 하겠습니다. 이제 그거 어떤 감정인지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스릴은 강건한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사랑을 깨달은 황태자는 더더욱 강해진 듯 눈동자조차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 침상 위의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어나셨으면 좋겠어요…….
왠지 그는 일어나거든 황태자의 편이 되어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가자.”
“네.”
할 말은 끝났는지 레나드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다시 한번 황제를 향해 일어나세요, 하고 입 모양으로 말한 아스릴이 뒤돌아섰다.
달칵. 문이 닫히고 그 영향으로 한 차례 바람이 사악 들어왔다. 흔들리는 커튼 말고는 움직임도 없는 고요 속에서 문득 황제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