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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70화 (70/106)

70화

꽤나 충격을 받은 듯한 귀족들의 분위기를 아스릴도 눈치챘다.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레나드의 옆에 당당하게 서 있었지만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속으로 레나드와 이렐린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마인드 컨트롤을 했는지 모른다.

그때 곁에서 걷고 있던 레나드가 웃음소리를 죽이는 걸 들었다. 휙 돌아보자 그가 쿡쿡하는 소리를 주먹으로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재밌으신가요?”

“미안, 지금 그대 얼굴이 완전히 창백해졌다.”

아스릴은 이제야 겨우 진정되어 가던 마음 탓에 자신의 얼굴이 아직 하얗게 질려 있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 웃음을 참고 있던 그는 살포시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꾸욱 힘을 주어 잡았다.

얼굴만큼이나 핏기 잃은 그녀의 차가운 손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매우 크고 따듯했다. 잡혀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내밀고 싶을 만큼.

손이 차차 따뜻해지자 얼굴에도 핏기가 돌아 볼이 불그스름하게 피어올랐다. 아스릴은 그제야 뭔가 큰 고비를 넘긴 것처럼 한시름 푸욱 놓았다.

“엄청 긴장했단 말이에요. 황궁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는데, 저렇게 많은 귀족분들 앞에 서서 제 소개를 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는데요.”

긴장이 풀렸는지 레나드 앞에서도 들려준 적 없는 목소리로 한탄을 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레나드는 줄곧 미소를 띤 채였다.

“저번에 신전 행사에서 이렐린의 꽃 대신 낭송할 땐 차분하게 잘만 하더니. 이렇게 겁쟁이였는지 몰랐군.”

놀리기로 마음먹은 듯한 레나드를 휙 올려다보았다가 쑥스러운 마음에 다시 휙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이전엔 오두막에서 만나서 그랬을까. 지금 보는 레나드는 그때와 다른 사람 같았다. 눈동자가 더 반짝이고 자신을 향해 짓고 있는 미소마저 더욱 멋있어 보였다.

마치 그 또한 자신처럼 어딘가가 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그대를 보기 위해서는 신전으로 가야 하니까 지속적으로 궁을 비워야 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이렐린이 우리를…… 아니, 나를 돕는 것 같군.”

그의 얼굴에서는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귀족 중에서는 황태자 궁에 함께 기거하는 거냐 물으며 기겁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스릴은 이전까진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가 거기에서 살짝 얼굴을 붉혔다.

신전에서는 신학생이 머무는 건물에 남자와 여자의 구역 구분은 있었지만 다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황궁에 와서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같이 방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니, 그 저…… 저는 혹시 황궁 저 변두리에 안 쓰시는 작은 집이 있으면…….”

조용한 데서 혼자 있는 생활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렇게만 해 줘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레나드가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무슨 소리, 앞으로 황태자비가 되실 분인데 그렇게 모실 수야 없지.”

황태자비…….

지난 생에서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죽은 게 아닐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것밖에 없었다.

레나드가 아스테리아와 결혼을 하는 그날 그녀에게는 자객이 찾아왔다. 심지어 그들은 데모트 백작저의 4층,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이 아닌 레나드와의 밀회 장소로 쓰였던 우스 호수 근처의 오두막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우선 자객을 보냈다는 것은 황실 아니면 귀족이었다. 그녀가 없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가진 이는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땐 지금과 다르게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데모트 백작가와 황실.

레나드가 밀회를 가지는 여인이 있다는 걸 황실에서 알았다면…… 어땠을까. 레나드의 치부가 될 여인이 살아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제가 오두막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체를 알아내 백작저에까지 쳐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데모트에게도 그녀는 치부가 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굳이 자객을 쓰지 않아도 됐다. 방문을 막아 버리고 먹을 것도 주지 않은 채 방관한다면, 그냥 거기서 끝나 버릴 테니까.

씨씨만 단속한다면 아스릴은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갔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긴장을 풀고 살짝 투정 부리듯이 말도 꺼냈던 아스릴이 황태자비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하얗게 질려선 손까지 벌벌 떨고 있자 레나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폭이 넓은 그를 따라 부지런히 발을 놀리고는 있지만, 그녀는 턱까지 살짝 떨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 거긴…….”

앞을 볼 정신도 없는 것인지 그녀는 앞에 있는 기둥도 보지 못한 채로 돌진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부딪치는 것만은 겨우 막았다.

“아…… 죄송합니다.”

귀여운 투정을 부리던 그녀는 어디 가고 잔뜩 긴장한 목소리를 내며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그녀를 사로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불안해 보여서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왼손을 제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겨 오롯이 제게 기대어 걸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괜찮겠는가, 인사하러 가야 할 사람이…… 한 분 더 계신데.”

“예……?”

아스릴은 그가 당겨 주는 힘에 정신을 차리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을 단단하게 잡아 주는 그의 손길이 정신까지 다잡아 주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그를 믿기로 했으니까, 사랑하기로 했으니까. 이제까지 자신을 지켜 준 그의 모습을 믿고 가기로 했다.

살짝 떨리는 눈을 들어 레나드를 바라보았다.

“귀족들보다 가장 먼저 인사를 했어야 하는 분이다. 하지만 마음을 다져야 하는 분이다. 내일 갈까.”

그가 이렇게 다정하게 내려다봐 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그는 알고 있을까.

지난번에는 인적도 드문 오두막에서 단칼에 죽임을 당해 홀로 쓸쓸히 죽어 갔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끝까지 함께 있어 줄 것 같았다.

혹시나, 혹여라도 누군가 그녀를 해하려 한다면…… 해하는 데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 곁에는 그가 있어 줄 것 같았다.

“아니에요. 말씀하시는 걸 들어 보니 누구신지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 갈게요.”

함께하기로 결심한 이상 온전히 그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재고 따질 것도 없이 오직 이 남자를 믿고 함께할 것이다.

레나드는 빠르게 변화하는 그녀의 눈빛을 빠짐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약한 듯 보이던 이는 어느새 굳건해지고 있었다. 그 변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자체가 매우 신기한 경험을 하는 듯했다.

정말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 같았다. 세상 허약하게 자랐을 법한 여인은 명예 신녀 제안을 받자마자 20년을 자란 저택을 떠나 신전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좋은 기억이 없는 곳이라 한들, 그런 결단을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내 억눌린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더욱더.

그녀의 그런 주체적이고 결단력 있는 결정을 보고 그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아무래도 약간의 동정을 품고 있었던 듯해 스스로 반성했다. 그리고 아주 약간 뿌듯해졌다. 자신이 마음을 준 여인이 그저 동정을 받아야만 하는 이가 아닌, 그런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말이다.

“고맙군.”

그때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백작저를 떠나 신전으로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황궁으로 온 것은 순전히 자신만을 보고 온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레나드도 정신을 바짝 차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 남았고, 그 한가운데에 그녀를 끌어들인 셈이니까.

하지만 그녀를 위험하게 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도 지켜 내고 오랫동안 함께하기 위함이었다.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레나드는 아스릴을 이끌었다. 이젠 몸에 힘이 들어가 휘청이지 않는 그녀였지만, 허리를 감싸고 손까지 잡고 있는 것은 풀지 않았다.

“아, 건물을 나가는 거예요?”

“그렇지. 여기는 나만 쓰는 곳이다.”

“아……!”

아스릴은 아무래도 이 건물이 성의 전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건물 안에 황실 사람들이 모두 기거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럴 법도 했다. 제가 쓰고 있는 이 본궁만 해도 데모트 백작저보다 훨씬 컸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이 만나러 갈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본래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조용히 쉬고 있는 곳.

“우리는 지금 별궁으로 갈 것이다.”

아스릴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만나러 가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상태인지를. 괜스레 숙연해진 아스릴은 고개를 비장하게 끄덕였다. 그에게 이끌려 걷는 길이 매우 아름다웠음에도 당장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긴장되나 보군.”

길을 따라 조경해 놓은 나무들에 대해 설명하려던 레나드는 아직도 굳어 있는 그녀의 몸과 표정을 알아챘다.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에 집중한 것처럼 그녀는 앞만 보고 있었다.

“엄청 긴장돼요. 무서운 건 아니고……. 황제이시자…… 황태자 전하의 아버지이시잖아요.”

아마 그녀에게 보통의 부모님이 있었다면, 그도 그런 긴장을 느꼈을까. 레나드는 입장을 바꾸어 진지하게 고민해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긴장될 만한 일이군.”

그녀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라니, 아마 주변에 암막이 쳐진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 같았다.

“후, 괜찮아요.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굳게 다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레나드는 웃음이 났다. 이렇게 긴장한 그녀와 함께 이 길을 걷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이제부터 그녀는 이 황궁에서 무서워할 것 없는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게 되도록 자신이 만들 거니까.

그녀가 마치 그에게 동기 부여를 해 주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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