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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69화 (69/106)

69화

그들에게 흡족한 대답을 마친 아스릴은 살짝 뿌듯한 마음에 입꼬리를 씰룩대다가 할 말이 있다는 레나드의 선언에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드디어, 그 시간이 왔다.

지금 아스릴이 그의 곁에 있을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예언을 들은 이로서 사람들을 사로잡을 것. 그리고…… 황태자비가 될 이로서 황궁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는 이 아스릴 신녀를 내 반려로 삼으리라고 결심하였다.”

레나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심각하고도 진지한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레나드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아, 아니…… 황태자비는 현재 황후께서 알아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놀란 것은 데모트뿐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청천벽력을 들은 몇몇 귀족들은 더듬더듬 겨우 질문을 이어 나갔을 뿐 제대로 말을 잇지를 못했다.

아스릴 또한 이 타이밍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는 않았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입꼬리를 유지한 채 그저 레나드의 곁을 곧은 자세로 지키고 있었다.

“황후께서 알아보고 계신다는 것을 나도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남기지 않았다. 어떻게 진행이 되었고 어디까지 진행을 하였는지 전혀 정보가 없는 상황이다. 황후께서 얼마나 진행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독단으로 진행해 오신 일이라 내 마음이 쉬이 따라가지 않더군. 서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고.”

레나드는 부리부리한 두 눈에 힘을 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망연자실한 이들이 셋, 그리고 태연한 척하지만 아쉬움을 감추고 웃으면서 자리를 지키는 벨파인, 거기다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회의장을 뛰쳐나가거나 반대로 황태자가 있는 곳까지 달려와 따질 것 같은 데모트까지.

뭐, 여기서 굳이 그런 부분까지 해결할 필요는 없으니 다시 좌중을 살폈다.

쐐기를 박을 시간이었다.

“어떤 후보가 있었는지, 어디까지 이야기가 진척되었는지 나는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 곁에 있을 반려로 아스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레나드는 거듭 강조했다. 그의 곁에 있을 사람, 황태자비가 될 사람. 다른 이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어버버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확고함을 한껏 드러냈다.

“지금 당장 식을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차차 고민하고 진행하기로 하였고, 우선 그녀가 이 이상의 예언을 또 들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비하여 궁으로 들였다.”

“궁으로 들이다니, 황태자 전하, 설마…… 황태자 궁에서 함께 기거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다.”

일부러 되묻는 말임에도 그는 단호했다. 물러섬이 없을 그의 반응에 다들 다음 날 아침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의를 듣지 않겠다. 그녀는 이렐린의 아이로서 나의 곁에 오래도록 함께하겠다 맹세했고 그것을 믿고 나는 이 마음을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살짝 낯부끄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곁에 선 아스릴 또한 미동도 없었지만 볼 부근이 발그레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레나드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보란 듯이 아스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스릴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손을 맞잡고 회의장을 나서는 두 젊은 남녀의 뒷모습을 보는 귀족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점점 소리를 키워 갔다.

“아니, 그래서. 그간 황후가 했던 건 대체 뭐라는 겁니까!”

그는 딸이 황태자비 후보에 올라 황궁에 와서 황후를 만나기까지 한 한 영애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황태자비에 가깝다 생각하고 있던 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파악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뭐…… 우리가 유력했어서 이렇게 화,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뭐라 해야 하나. 기만! 그렇지, 기만을 당한 것이 아닌가 이 말이오.”

“황후께서는…… 황태자께서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다오. 황후에게 일임했다는 식으로.”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황후를 경계하고 있어도 모자라는 판에 황태자가 그것을 황후에게 온전히 맡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겉으로는 별일 없는 척해도 모두가 그들 사이가 나쁘단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태자비만 보고 달려온 가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특히나 벨파인 공작과 데모트 백작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것을 귀족들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내 일과 네 일로 나뉘어 반응하던 그들은 서서히 회의장을 떠났다.

기만이니 뭐니 하는 말로 선동하던 이들도 결국은 그 목소리가 묻혀 버리고 말았다.

황태자비 간택의 초반이었다면 딸을 가지고 있는 가문에서는 쉽게 동요의 말이 나왔을 텐데. 이렐린의 예언을 듣는다는 신녀와의 결혼은 극구 말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비의 후보라며 딱 다섯 명만을 추려 놓았던 이 시점에 황태자의 말은 너무나 많은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황태자의 선언으로 인한 문제는 단 다섯 가문의 문제로 함축되어 버리는 것이다.

끝까지 남아 부들거리던 다섯 가문의 수장들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본인의 결정이 그러하다는데 누가 말릴 것이며, 일직선상에 두고 다시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예언을 하는 이렐린의 아이를 도대체 누가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해 예측을 한다면, 그게 또 확실하지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보 다섯에 올라서 승리자라도 된 듯이 기뻐하고 있었던, 회의장을 나서는 그들의 어깨에는 힘이 쫙 빠져 있었다.

‘아스릴이…… 이렐린의 아이라니, 그것도 예언을……!’

그중에서도 데모트 백작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신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스테리아를 이렐린의 꽃을 시켰던 것의 목적은 별도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렐린의 꽃을 두 번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는데, 아스릴이 자신을 아스릴 데모트라고만 소개해 줬어도……!

‘데모트의 이름을 높은 곳에 걸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때 문득 그의 뒤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에도 그 이야기에 솔깃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애써 왔던 것도 아스테리아의 위치를 높여 데모트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함이었다.

예전부터 딸만 둘이 있었던 탓에 그는 아들이 데모트의 이름을 널리 알려 자신의 노후를 보장해 주길 바랐던 젊을 때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단지 아들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딸들을 올릴 수 있는 최대한으로 높은 지위까지 올려놓는 것이었다.

아스테리아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다. 일찌감치 그걸 간파한 그는 아스릴을 그녀의 그림자로 세워 아스테리아의 명석한 면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훌륭한 이렐린의 꽃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간당간당한 일이 생겼다지만 금방 회복할 것이었다. 회복하도록 제가 나설 것이었다.

‘필요한 것은 제대로 취하고 필요 없는 것은 바로 처리를 하거나 쓸모 있는 데에 가져다 쓰는 것,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황후는 데모트를 아주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스테리아를 택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머리만 좋은 아스릴은 아스테리아를 돕는 도구에 불과했다.

모든 것이 순탄했고 그의 계획대로 흘러왔거늘…….

어째서 아스테리아가 아닌 아스릴이 이렐린의 꽃 같은 형식적인 지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자리에 오를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대가 다시 나설 차례가 아닌가. 지금의 자리에 만족하지 말고 더 높은 곳으로 옮기면 되지.’

‘하지만…… 아이가 원하는 곳은 그 자리가 아닙니다. 심지어 지금 그 자리가 가장 높은…….’

데모트는 그 목소리에 조심히 반기를 들었다. 이렐린의 꽃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바로 황태자비가 되는 것.

심지어 황태자를 원하는 딸아이의 욕구에도 걸맞은 일이라 너무나도 당연하게 황태자비가 되려 했던 것인데…….

매혹적인 목소리의 주인은 데모트의 머뭇거림에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비소를 담은 그 입술이 아주 천천히 유혹적으로 움직였다.

‘황태자가…… 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당시에는 그 이야기가 대번에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았었다. 황태자가 된다니. 우리에겐 이미 황태자가 있다. 황제가 승하하신다면 언제든지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메울 수 있는 사람이 말이다.

아직까지는 거기서 물러날 흠도 없고, 물러날 의사도 없는 사람.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던 데모트에게 깨달음과 같은 충격이 다가왔다.

어째서 이렇게 당연한 것을 이제야 떠올린 것인가. 자신이 매우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변화를 눈치챈 그녀가 말했다.

‘조금 더 지나면 기회는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다네. 그대와 나는…… 왠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 당시에는 그저 이 황태자비 후보에서 한 단계만 더 나아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나드의 곁에 다른 사람이 내정되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황태자비의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데, 황태자비의 자리가 차 있다면…….

황태자의 자리를 뒤집어 반려가 없는 자를 황태자로 올리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가 보장되었다, 자신이 말 한마디만 하면. 그리고 그 든든한 이의 손을 잡는다면.

회의장을 나선 데모트의 앞에 자연스럽게 마차 하나가 와서 섰다. 다른 이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그가 마차에 올랐다. 창문 밖으로 황궁을 담는 그의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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