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째는 확실하게-68화 (68/106)

68화

“동쪽 경계는 더 이상 군대가 없어도 되는 것입니까?”

“확실히 그들이 물러간 것이 맞습니까? 또다시 쳐들어온다고 하면 그땐 여기서부터 군대가 출발해야 하니 너무 늦는 것은 아닙니까?”

레나드는 큰 목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코로 훅 숨을 내쉬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것으로 아도피트에 대한 위험성을 눌러 놓고만 지내던 귀족들이 아주 걱정을 태산처럼 쏟아 냈다.

진작 그렇게 신경 좀 쓸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니 더 저렇게 겁을 먹는 것이다. 대답하기 싫어서 가만히 있던 레나드는 또 한 차례,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아까 했던 말들을 차례로 읊고 난 다음에나 입을 열었다.

“동쪽 경계는 당분간 군대가 없어도 된다. 아도피트는 확실히 물러갔다. 제2 왕위 계승자 놈이 왕위를 뺏어 보려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군대를 움직였던 것이고, 대패해서 지금 남은 게 없다. 제1 계승자는 라이벌이었던 이가 자멸해 주니 이제 편안히 왕위를 물려받을 일만 남았고. 경들 같으면 다시 전쟁을 치르겠는가.”

퉁명한 레나드의 대답에 안절부절못하며 중얼거리던 귀족들의 소리가 수그러들었다.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얼굴들이 보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화제로 올리는 이는 없었다. 쯧, 좀 도움을 받아 볼까 하였더니 역시 눈치 없는 귀족들에게 기댈 것이 아니었다.

특히 중심에서 약간 비껴 난 곳에 앉아 있던 데모트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데모트는 이미 딸이 황태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 와중에 전쟁을 예언했다는 소식까지 전해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앉아 초조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저런 걸 보면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이렇게까지 차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자신과 로나르드를 크게 다르지 않게 대했다. 어쩌면 황후가 자신의 아들에 대한 기대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황태자의 자리까지 노리는 것이 황제가 이제껏 로나르드를 차별한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진작 황태자의 자리는 넘볼 수 없는 거라는 걸 알았어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자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예언을 한 신녀가 있었다고요.”

때마침 귀족들 사이에서 드디어 레나드가 원했던 말이 나왔다.

이미 한 차례 퍼진 이야기지만 이것을 공식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저 상 한번 내리고 지나갈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다. 아도피트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언을 한 이가 있었지. 하지만 신녀는 아니다.”

귀족들은 속 시원한 질문을 해 준 이를 바라보다가 레나드의 대답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명 신전에서 들려온 이야기라고 했었다. 이렐린의 사랑을 받는 이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예언을 하는 이는 정말 드물었다.

“신전에서 이야기가 나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아까 처음 질문을 던졌던 이가 다시 물었다. 레나드는 후욱, 깊은숨을 뱉었다.

“신전에는 이렐린의 꽃 외에 명예 신녀라는 것이 있다. 알고 있는가.”

귀족들은 난데없는 신전의 이야기에 어리둥절해졌다. 당연하게도 모두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고 있다는 대답을 했다.

데모트는 이렐린의 꽃이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의 자격 박탈을 아직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가소로웠다.

“한동안 명예 신녀 없이 지냈던 신전에 새로운 명예 신녀가 들어왔는데, 그녀가 바로 이번 예언을 해 준 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냥 귀족 영애이지.”

“이렐린의 사랑을 받아 예언을 한 이가 신녀가 아니었다니, 더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칭송받아 마땅한 업적이옵니다.”

다들 이러저러한 칭찬의 말로 예언을 했다는 명예 신녀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멋모르고 그렇게 다들 명예 신녀의 칭찬에 빠져 있을 때 데모트 백작만이 유일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전에 자주 들르신다 하였으니 황태자 전하께서 저희의 마음을 담은 인사를 전해 주심이 어떠십니까?”

마치 엄청난 묘안을 내놓는 듯이 말한 이는 벨파인 공작이었다. 속사정을 모르니 나온 말이었지만 황태자는 그의 말이 딱 마음에 들었다.

“다행히 지금 그녀가 황궁에 와 있다. 안 그래도 그대들이 이렇게 고마워할 것 같아서 이미 개인적으로 그 여인을 황궁으로 데려왔다.”

레나드가 눈짓하자 황제 쪽 출입구에 서 있던 시종이 움직였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 뒷모습을 보던 레나드는 다시 시선을 옮겨 좌중을 바라보았다.

황궁으로 새로운 사람을 데려왔다는 것에 귀족들이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 나름도 고충이랄 게 있었다. 이벨린의 신과 관련된 일이 도리어 앞서 나가고 있는 레나드의 입지를 무너트릴까 걱정했고, 뒤로 로나르드를 지지하는 자들은 그 명예 신녀와의 관계로 황태자의 입지가 더 단단해질 것을 염려했다.

“전하. 모셔 왔습니다.”

바깥에 나갔던 시종장은 허리를 숙이더니 옆으로 몸을 비꼈다.

“허억.”

귀족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하나 있었다. 레나드는 굳이 그곳을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데모트 백작의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레나드는 그쪽을 돌아볼 생각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시종의 뒤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오는 아스릴을 향해 있었다.

명예 신녀로서 입고 있던 옷이 차르르 흩날리고 어깨 쪽에 집중되어 있는 보석 장식이 빛을 반사시켜 화려함을 더해 주었다.

아스릴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시종이 안내하는 대로 그의 곁으로 와 레나드를 바라보며 섰다.

“와 주어서 고맙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나드의 말에 아스릴은 지지 않고 대답했다. 처음 주눅 들어 있었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꽤 자신감이 차오른 모습이었다.

귀족들 앞에, 특히 데모트가 있는 앞에 그녀를 바로 세운다는 것에는 살짝 걱정이 있었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다.

“여기, 이번 아도피트의 동쪽 경계 침략을 미리 예언하여 내가 미리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게 도와준 명예 신녀다.”

“제국을 이끌어 가는 귀족 여러분께 처음 인사드립니다. 아스릴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일부러 성을 말하지 않았다. 모두들 그녀의 이름 뒤에 이어질 성을 기대하고 있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이렐린의 꽃과 마찬가지로 명예 신녀 또한 귀족가의 영애들로 이루어진다. 그 안에서는 굳이 귀족의 이름이나 지위를 따지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이름을 뺏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가문을 밝히는 것이 맞는데…….

심지어 옆에서 같이 듣고 있는 황태자가 지적을 하지 않으니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예언을 듣는다는 것이 참 드문 일인데, 신녀 덕분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고 피해 인원, 피해 영지도 많이 줄었다. 잠시 피신했던 사람들이 금방 돌아와 복구를 시작했으며, 그걸 위해 그동안 쌓아 두었던 국고를 일부 지원하였다.”

“황태자 전하의 재빠른 판단력에도 경의를 표합니다.”

“아스릴…… 신녀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이렐린의 아이를 제 눈으로 뵙게 되다니 정말 가문의 영광입니다.”

귀족석에서 한 사람이 황태자가 아닌 아스릴에게 직접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스릴은 그의 곁에서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자 다짐했었다. 크게 웃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한숨을 쉬지도 않고 더더욱 울지도 않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레나드가 먼저 알려 줬기 때문이었다. 귀족석에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아스릴은 그래서 일부러 귀족석을 둘러보지 않았다. 흐릿하게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볼지라도 그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잡혀 버릴까 봐.

“신녀는 아니지만 이렐린 님의 예언을 듣고 있는 몸이니 신녀님이라 불러 주셔도 무방합니다.”

이 말은 데모트라는 이름으로는 절대 불리지 않겠다는 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전달이 되었을까. 그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방금 뱉은 제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조금 궁금해졌다.

“이렐린의 아이라고도 하죠? 예언을 듣거나, 성력을 쓰거나 하는 이들 말입니다.”

“그러합니다. 제가 바로 그 이렐린의 아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귀족들은 레나드가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 것은 처음인 데다가 예언을 들은 사람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한마디씩 그녀에게 말을 거느라 바빴다.

아스릴은 그 질문에 하나하나 찬찬히 대답을 해 주었다. 자신을 높게 평가할수록 좋은 거니까. 나는 예언을 듣는 사람이고, 황태자가 자신의 사람이라 소개한 사람이야.

그것은 비단 데모트의 앞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스릴 신녀님. 동쪽 경계에서 아도피트는 더 이상 침공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기어이 이 질문을 다시 꺼내는 이가 있었다. 정치 상황으로는 물론 쳐들어올 일이 없다고 하지만, 인간의 일이란 모르는 거 아니겠는가 하는 사상을 가진 이가.

아스릴은 방금 질문을 던진 이를 향해 초점 챙긴 눈동자를 움직였다.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묻고 있는지라 아스릴은 제대로 대답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당장은 예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예언에서 크게 일어날 뻔한 파도를 잘 잡아 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제대로 잡았으니, 당분간 후환은 없을 겁니다.”

똑 부러지고 단호하게 말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귀족들은 모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한 가지를 빼먹을 뻔했군.”

이 광경을 바라보며 레나드는 옆에서 입꼬리를 씨익 올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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