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아스릴의 세상은 백작저와 근처의 우스 호수 그리고 신전이 전부였다. 혼자서 백작저를 나가 본 적도 없고 나갈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나가는 이유는 모두 가족들에게 있었다. 특히나 아스테리아의 필요에 의해 움직였다.
백작저까지 찾아온 신관과 함께 명예 신녀가 되기 위해 신전으로 향한 길이 처음이었다. 데모트가의 사람들, 아스테리아 없이 어딘가를 나간다는 것.
그리고 지금 아스릴은 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혼자 마차에 앉아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황궁으로 가고 있는 것.
매우 긴장이 되었다. 그 어마어마한 곳에 혼자 가도 괜찮은 것일까. 신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냉큼 백작저를 떠나왔던 때와는 조금 달랐다.
레나드가 있음에도 아스릴은 아직 불안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결정했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이, 기회가 주어졌으니까 잡은 게 아니야. 레나드를 보고 내가 정한 거야.”
신전으로 떠날 땐, 이 기회가 아니면 데모트 백작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평생 백작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앞뒤 볼 것 없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앞에는 동등한 선택지가 있을 뿐이었다.
“확실하게 황실이라고 결정한 건 나야. 이번만큼은…… 내가 결정한 거야.”
아스릴은 아무도 말 걸지 않는 마차 안에서 밖을 보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끊임없이, 이번은 내가 결정한 일이라고.
저 멀리 황궁의 높은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웅장함과 끝 모를 길이에 주눅이 드는 것도 잠시, 아스릴은 다시 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결정한 일이야. 두 번째 삶이 내 뜻이 아니었더라도, 그 삶마저 끌려가지 않아야지.
아스릴은 자신의 두 번째 삶이 정말 본격적으로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 * *
“아스릴,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오는 마차 안에서 온갖 좋지 않은 경우의 수에 대해서 떠올리곤 했던 아스릴의 고민은 한 방에 해결되어 버렸다.
마차가 황궁의 정문을 수월하게 통과하고 어떤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추자 바로 문 앞으로 나타난 것은 레나드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가 수고 많았다며 손을 내미는 바람에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릴 뻔했다.
“신전이랑 황궁이 얼마 멀지 않은데…… 하루 종일 달려온 것 같아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면서 아스릴은 약한 투정을 부렸다. 그가 피식 웃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아 버렸다.
입술을 말아 무는 그녀를 아주 자연스럽게 에스코트를 하며 걸어가는 황태자의 뒤로 시종과 시녀들이 빠릿빠릿하게 나와 아스릴의 얼마 안 되는 짐을 들고 뒤따라왔다. 시종만 세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제일 앞사람만 가방을 든 채였다. 짐이 없는 그녀를 보고 당황한 모양이었다.
“괜찮은가요? 제가 짐이 별로 없어서…….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저한테 시종이나 시녀 붙여 주실 필요 없어요. 조용히 조심히 혼자 잘 다녀요.”
뒤에 줄줄이 따라오는 이들은 물론 황태자의 사람들이겠지만, 혹시나 제게 사람을 붙여 줄까 싶어서 미리 설레발을 쳐 버렸다.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계속 걸어가며 레나드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있는 게 좋을 것이다.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친한 사람을 얻었다고 생각해라.”
레나드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했지만, 아스릴은 단번에 그게 편해질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아직 그렇게 편하게 느껴진다거나 설레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부담이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느꼈는지 레나드가 넌지시 물었다.
그사이 어느 방문 앞에 선 레나드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이전의 데모트가에서도…… 친한 하녀는 없었나?”
레나드의 질문에 대번에 씨씨를 떠올리던 아스릴은 대답할 말은 바로 떠올려 놓고 정작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여기…… 황태자 전하께서 쓰시는 방이에요?”
아스릴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렇게 묻자, 안으로 들어가며 짐을 들고 들어오는 시종에게 뭐라고 지시를 하던 레나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는 아스릴, 그대가 사용할 방이다.”
“예?”
놀란 듯 휘둥그렇게 뜬 두 눈이 다시 천천히 방 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신전에서 쓰던 방보다 몇 배가 넓은 방이었다. 오히려 데모트가의 4층에서 거의 저택 넓이의 3분의 1 정도 되는 넓은 다락방을 쓰던 그녀의 방과 비슷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천장도 넓고 가구도 제대로 갖추고 있으니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 당연히 황태자의 방 정도는 되는 줄 알았다.
“여기가…… 이거 전체가요? 먹을 것만 있으면 한 달 정도는 안 나가도 되겠어요. 우와, 욕실까지…….”
아스릴은 뛰지는 못하고 급하게 종종걸음을 걸어 방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크고 좋은 방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뭔가 신기한 것을 보는 듯했다.
“특별히 예쁘게 꾸며 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레나드는 그녀를 보내 달라고 신전에 서신을 보낼 때 이미 이 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시작해 그녀를 아예 이 황궁에 눌러앉힐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렐린의 예언을 전하는 사람으로 모두의 선망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자신이 황태자비로서 그녀를 받아들이겠다는 공표를 할 예정이었다.
지금껏 알게 모르게 거론되었던 황태자비 후보는 황후가 그의 허락 없이 선택한 사람들이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장도 약속도 없었다고 단호하게 대처할 예정이었다.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아스릴을 예언을 전한 사람이라고 내보였을 때 황후 쪽에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였다.
이제까지는 몸도 사려 가면서, 이미지도 챙겨 가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왔었다. 그런데 황제가 쓰러지고 나니 마음이 급해진 것인지 그녀의 행동이 대범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황태자비 후보에 대해 완전히 뒤집어 버릴 상황이 닥치면 그녀가 또 어디까지 대범해질지 모를 일이었다.
“예전 살던 데에…… 씨씨라는 하녀장이 있었어요.”
그때 아스릴이 방 어느 지점에 서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했던 레나드는 금방 아, 하고 알아차렸다. 이전에 살던 데모트가에서는 친한 하녀가 없었는지 물어본 것에 대한 답인 모양이다.
레나드는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아 이끌어 소파에 가서 함께 자리를 잡았다. 그가 어깨 뒤편으로 손을 두어 번 흔들자 할 일이 없어서 멀뚱히 서 있던 시종들과 시녀들이 조용히 물러났다.
“제가 부모님과 아스테리아 언니에게 무시당하고 있던 때에도…… 씨씨만큼은 제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 주고 저를 챙겨 주었어요. 무시당하는 거보다 아예 무관심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은데……. 아마 씨씨가 없었다면 진작, 몇 번이고 죽었을 거예요.”
극단적인 단어였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 씨씨가 아니었다면 아찔했을 일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씨씨가 엄마였고, 언니였고…… 그냥 가족이었다.
“굉장히 의미가 깊은 하녀로군. 혹시 데려올 수 있다면, 데려오고 싶은가.”
레나드의 말에 아스릴의 두 눈이 번뜩 뜨였다.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한 번도 제 곁에 둘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황궁에 오는 걸 씨씨가 좋아할까요? 싫어하면 어떡하죠? 위험하면 어떡하죠.”
아스릴은 여러모로 생각이 많았다. 자신이 편한 것도 중요하지만, 씨씨를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데모트가에서 하녀장까지 오르며 많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녀들을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자신이 없으니 더 편하게 일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면 아스릴은 아직 아무 데도 정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나 황실은 위험한 것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었으니까.
씨씨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씨씨는 고민하기 시작할 테니 괜한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니에요. 혼자 할 수 있어요. 게다가 데모트의 하녀장이잖아요. 괜찮아요.”
아스릴이 거의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것을 보면서 레나드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옆에 앉은 아스릴의 허리를 감아 당기며 그녀의 이마에 촉, 입술을 내렸다. 그러고는 바로 턱을 들어 올리더니 잡아먹을 듯이 진하게 입술을 빼앗았다.
고요한 방은 매우 넓어서 입술의 마찰 소리가 울려서 귓가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촉촉, 닿았다 떨어져 감질나게 하다가도 입술을 덮고 혀를 깊이 찔러 넣어 휘저어 대기도 하는 그의 키스에 아스릴은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한 가지 정확한 것은 그가 저를 만지고 키스하는 것이 불쾌하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그만했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불안과 짜증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아……. 너무 남만 아끼지 말고 자신을 아껴라. 그대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으니까.”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애틋한 마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입술은 그의 입술이 촉촉하게 적셔 주었고, 집으로 돌아갔다 온 그녀의 마음은 레나드의 말이 촉촉하게 덮어 주었다.
내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이 행복해진대.
아스릴에게는 쉽지 않은 개념이었지만, 레나드를 보고 있자면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가 행복한 모습을 보아야 내 마음이 편해진 것 같은, 그런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겠지?
아스릴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애정이 넘치는 얼굴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