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술을 씰룩거리던 대신관은 이로 입술을 꾸욱 물더니 파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까 이 늙은이가 한껏 놀리고 싶어지지 않겠나. 클클. 조심하라고.”
짓궂은 노인의 장난에 또 속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정말 아까 호되게 당한 그 친구가 불쌍하게 보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 황궁에서 황태자 전하의 전갈이 있었다. 아스릴을 보내 줄 수 있느냐고, 그게 가능하면 아스릴에게 물어봐 달라고 말이지.”
레나드 전하의…… 요청이었다고요?
자신을 지금 불러들이는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예언의 이야기로 자신의 존재가 알려진 지금 아예 못을 박아 버리려는 생각이겠지.
하지만 지금이 적기인 것인가는 아스릴이 판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부족한 점은 따로 배우면서 나아가야 할 일이었으니까.
걸림돌이라면 제가 될 게 자명하기 때문에 그녀는 황궁으로 오라는 그의 제안을 듣자마자 바짝 긴장했다.
“명예 신녀의 1년을 채우기에 영애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강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대신…… 언제까지 들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나눠 본 적이 없구나.”
이럴 때다. 이럴 때 완전히 자신의 할아버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저는 아직도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껴요. 하지만 그렇게 버틴다고 해서 다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죠?”
대신관은 그녀의 질문에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섣부른 의견을 더하거나 빼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인 듯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말을 꺼내 주었다. 그것을 아스릴이 모를 수가 없었다.
“버티면 버티는 순간만큼 이제까지 못했던 것을 해 두어야 한다는 말이지. 그 시간만큼 부족하다 생각했던 것들을 채워 놓고. 그걸 제대로 준비한다면 그간의 시간을 버리지 않고 유용하게 사용했다는 증거가 되겠지. 도움도 될 것이고.”
“음……. 그래도 역시 지금 가는 게 좋겠어요.”
레나드도 그 부분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 그녀가 능동적으로 나서서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을 들었다면 결국 그것을 따르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만 그 안에서 눌리지 않고 꿇리지 않도록 분투하는 것은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 되는 거였다.
“부딪쳐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네, 거기 황후랑도 부딪치게 될 것 같고…… 그리고 저를 방해하고 싶은 귀족들이 계실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죠. 그리고 최종적으로 데모트 백작이…….”
그들은 백작가로서 엄연히 귀족 회의에 한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미 그날 아스테리아가 어떤 몰골로 돌아갔는지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들이 걱정이 안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가겠다는 거지.”
대신관은 한 번 더 확인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빤히 바라보는 그 눈길에 아스릴은 괜히 또 비장해졌다.
정말 어떤 것도 쉽게 예측이 안 되는 상황이어서 지금 나가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래서 거기는 저 혼자 가야 하는 건가요?”
레나드가 와 주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게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위해서 애썼다.
그는 나만을 사랑해 줄 필부가 아니었다. 아그로드의 주인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황태자였다. 언제나 제국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때에는, 아니 언제나 항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이이기 때문에 온전한 자기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그렇죠. 저 혼자 가는 것이 맞아요. 여쭤보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들을 하녀처럼 붙여 주실까, 그 걱정을 한 거였어요.”
아스릴이 태연한 척 웃어 보이면서도 약간의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신관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민에 빠져 있는 아스릴을 유심히 지켜봐 주고 있었다.
그녀는 고민은 많을지언정 처음 결정했던 이야기들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걱정되는 건가.”
대신관이 그렇게 물었다.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에요. 그분은 황태자이시고 저는…… 제 발로 나왔지만 사실상 백작가에서 버려진 아이나 다름없어요.”
너무도 평범한 고민을 하고 있는 저 자신이 낯설기도 했지만, 다시 이전 삶의 아스릴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전이 싫으면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나아가려면 감수해야 하는 것이 있는 법이고요……. 이론은 빠삭합니다. 그걸 이제 실행하러 가는 것이죠.”
의외로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대신관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이곳에 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군. 내가 못되게 군 적은 없었잖아, 그렇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는데, 아스릴은 하마터면 울컥하고 눈물을 떨굴 뻔했다. 그 말이…… 가족이 되어 주겠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대신관은 그녀의 그런 심경의 변화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아스릴은 그것까지 모두 느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 발 두 발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두 팔을 벌려 대신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어정쩡하게 수그린 허리, 미처 다 감싸지지 않는 어깨. 자세가 어정쩡하기 그지없었지만, 아스릴은 그마저도 받아 주는 대신관의 어깨에 조용히 턱을 댔다.
“……할아버지.”
좋은 울림이었다. 데모트가에서는 불러 본 적 없던 울림이었다. 그 울림은 대신관마저도 가슴이 술렁이게 만들었다.
“내일이 출발이다. 가서 채비를 하거라. 아, 미카엘에게는 꼭 인사를 남겨야 하겠군.”
“아차!”
아스릴은 이제까지 생각 못 하고 있던 미카엘을 떠올렸다. 자꾸만 가까워졌던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본래 혼자인 것이 당연했던 삶이었는데, 그런 제가 이별을 아쉬워하게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을까.
“미카엘…… 많이 속상해할 것 같아요. 어떡하죠?”
어설픈 포용의 효과인지, 아스릴은 대신관에게 건네는 말투가 굉장히 친근해져 있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마음 접을 수 있도록 그 녀석에게 아주 좋은 해결책을 주어 보겠네. 클클.”
대신관이 또 장난스럽게 말하자 아스릴은 눈썹을 늘어뜨린 채 웃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게 아니었다. 그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네가 그런 식으로 고민이 길어질수록 더 놓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너는 태연히 행동해야 해. 네가 둘 사이의 중심이 되어 주어야 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느냐.”
대신관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아스릴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우리 둘 사이의 중심…….
“이 관계를 이어 가고 싶다면……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신학생으로서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이어 가고,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라면, 네가 노력하는 것이 맞아, 아스릴.”
그는 이름을 불러 주었다. 야속하게도 미카엘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는데도 그가 불러 준 이름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말았다.
“네, 저도 그 생각 했어요. 제가 잘해 주고 싶어요.”
아스릴은 뭐든지 제가 굳건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또 한 번 되새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제가 잘해야 한다. 미카엘에게도 잘해서 친구 같은 사이를 유지해야 하고, 레나드에게도 잘해서 그의 곁에 있어도 잘 어울리는 그런 여인이 되어야 한다.
“아, 그런데…… 혹시 신전을 떠나면 예언을 들을 수 없나요? 제가 처음 목소리를 들은 것이 홀의 그 커다란 여신상 아래인지라.”
예언이 또 얼마나 빨리 찾아올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또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저도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 그거? 그것은 장소 같은 것에 구애받지는 않는다. 어딜 가든 쓸모가 있지 않겠나.”
클클, 대신관이 특유의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그 위에 올려져 있던, 약간 크기가 있는 나무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탁상 위에 놓인 상자를 가리키며 그가 열어 보라고 말했다.
아스릴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작은 여신상이 들어 있었다. 홀에서 본 아주 역동적인 포즈의 동상은 아니었지만, 이렐린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주 잘 표현해 낸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꺼내 보니 생각보다는 크기가 좀 됐다. 우아한 자태의 이렐린을 이만한 돌로 재현하다니, 그 솜씨가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전을 떠나면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실력을 믿고 무리하지 않을 것. 그것이…… 이 선물을 주는 대신 내가 받을 약속이야.”
대신관은 또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뭐 해 준 것이 있다고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고 도와주는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계산적으로 살기보다는 마음으로 움직일 때도 있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카엘이 그랬고 대신관이 그랬다. 저택의 씨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을 매우 깊이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영영 헤어지는 거 아니니까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당장 내일 또 뵈러 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스릴은 씩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어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채워 가면서 이렇게 즐거워하고 쓸쓸해하고……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에 감사했다.
이제 레나드를 보러 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