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아스릴은 아침부터 이렐린의 동굴을 찾은 참이었다.
처음 봤을 때나 두 번째 찾았을 때는 모두 어스름이 지거나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였지만, 우연히 아침에 찾아온 동굴은 훨씬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왠지 밤에 찾는 것은 제 걱정을 덜러 가는 것 같고, 아침에 찾는 것은 정말 이렐린이라는 존재에게 인사를 건네고 챙겨 주러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씨씨는 잘 있나…….”
제가 하녀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이렐린의 공간을 챙겨 주러 간다는 생각을 하자 문득 씨씨가 떠올랐다.
제게 유일한 하녀였으며 유일하게 자신을 챙겨 주던 사람. 데모트가에서 씨씨는 마치 자신에게 이렐린 여신 같은 사람이었다.
다시 돌아와서도 씨씨의 조력이 아니었다면 이만큼이나 자라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보러 가지도 못하고 데리고 나올 수는…… 더더욱 없고.
전쟁은 아스릴이 두 번째로 동굴에 왔다가 신전으로 돌아가던 때 떠올렸던 날짜 그대로 일어났고 끝이 났다. 그리고 온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전쟁 자체도 화제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 퍼진 ‘예언’에 관한 이야기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소문은 신전으로도 퍼져서 아스릴은 순식간에 경외의 시선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용기 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좀 나눠 놓을걸…….
이전에는 제가 쑥스러워 말을 못 걸고 그랬는데, 이제는 뭐 다들 자신을 여신 보듯이 우러러보는 바람에 뭐라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녀의 곁에서 평소처럼 대해 주는 것은 미카엘이었다.
“나 불편해서 못 보겠다고 했으면 너무 쓸쓸할 뻔했어요…….”
오늘도 식사는 미카엘과 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전이랑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데 뭐 그렇게 엄살을 부려요.”
그의 미소 또한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참 안심이 되는 게…… 이기적인 마음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던 딱 그 타이밍에 미카엘이 가볍게 딱밤을 날려 정신을 차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아스릴. 나는 당신에게 애정을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마음대로 시작한 마음이고, 이 마음을 그대로 돌려 달라 사정한 적도 없어요. 빚을 지게 만들 생각도 전혀 없었고요. 알겠어요? 이 마음의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어요.’
미안한 마음이라고,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던 아스릴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진심을 담은 마음을 주었고, 그것이 전달은 됐지만 같은 감정으로 발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냥, 일이 그렇게 된 것일 뿐.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에 보답받지 못하는 슬픔을 알고 있는 아스릴로서는 아무래도 바로 적용시키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그에게 티를 내지 않는 것을 나름의 보답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기로 했다.
그것이 미카엘이 제 곁에 편안히 있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저 나름의 최선일 테니까.
언제든 미련 없어지면 후련히 떠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때 이후로 황태자 전하는 소식이 없으시네요.”
전쟁이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나면 바로 다시 예전처럼 올 것 같았던 레나드는 전쟁 종식과 예언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나흘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미카엘은 레나드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다. 이미 둘이 어떤 사이인지 명확하게 목격한 사람이라 그런지 오히려 말하는 데에 쓸데없는 눈치를 보지 않아서 더 좋았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전쟁 이야기 끝나면 바로 오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동안에 굉장히 무리해서 오셨던 건가 봐요.”
매일같이 찾아오던 레나드가 일이 좀 늘었다고 소식 한 자락 없는 것으로 봐서는 진짜 무리조차 할 수 없이 바쁘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음, 초조하다기보다는 약간의 걱정과 약간의…… 그리움?
아스릴은 순간 화륵 열이 올라 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까이에 있으면서 자신의 변화에 눈치가 빠른 미카엘이라면 단번에 알아채고 말 텐데…….
좀 조심했었어야 했는데 너무 방심하고 말았다.
마치 그날의 입맞춤이 마지막 인사였던 것 같은 불안과 초조에 휩싸였던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 만나게 될 것 같은 이상한 생각?
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잠시, 아스릴은 금세 레나드를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레나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도 타고난 것 같았다. 아마 4개월을 되돌아갔든 10년을 되돌아갔든 그때 그 시기가 되면 우연히 레나드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을 것 같았다.
“아스릴 영애, 안녕하십니까.”
그때 식사를 끝내 가는 그들에게 한 신학생이 다가왔다. 그는 쭈뼛거리면서 다가와서는 미카엘의 눈치를 한 번 보고 아스릴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스릴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는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간 얼굴에 아무것도 담지 않은 푸른 눈동자는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신비로운 한편 기묘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그의 울대가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서 미카엘은 옆에서 소리 없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스릴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묻자 그는 숫제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고백이라도 하러 온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정신을 차린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신관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예의 그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백발 대신관님이, 찡긋.”
“……!”
아스릴과 미카엘은 동시에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과 목까지 새빨개진 신학생은 당장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을 참듯이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저, 저는 전하라는 말을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딱…… 이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 그럼 이만……!”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 버리는 신학생을 보며 아스릴은 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대신관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떻게 한 신학생의 마음을 이렇게도 짓밟을 수가 있을까…….
“대신관님이 상당히 너무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응. 미카엘도 그래요? 나도 같은 생각 했어요.”
“절대로 지나다니다가 대신관님을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이렐린 님께 간곡히 청해 보려고요.”
쿡쿡, 두 사람 사이에 가벼운 웃음소리가 지나갔다.
“하지만 미카엘이 저 말을 전해 줬으면 이렇게까지 서로 민망하지 않았을 텐데.”
“제가요? 찡긋을요?”
미카엘은 말과는 다르게 눈도 같이 찡긋 윙크하며 말했다. 기어이 아스릴은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대신관님도 너무하네. 차라리 미카엘을 붙들고 전해 달라 하시지.”
아까 도망하던 신학생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아스릴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안 가 봐요?”
“아차. 너무 충격적이라 내용은 잊고 찡긋만 기억하고 있었네요. 먼저 일어날게요.”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눈짓으로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한껏 올라갔던 입꼬리를 조용히 내렸다.
아직 모든 것이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깊었던지…… 마주하고 있을 땐 문득문득 가슴이 안 괜찮을 때가 있었다.
이거야 뭐, 내가 다 견뎌야 할 것들이지. 함부로 마음을 준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는 것을 알고도 기어이 전하고 말았으니까.
그것부터가 이미 제 욕심이었던 것이다. 제가 잘못한 것은, 제가 해결하고 안고 가야 하니까.
미카엘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그녀가 없는 시간에는 공부에 열중하는 것이 시간을 가장 빨리 보내는 방법이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너무하세요, 대신관님. 그 말을 전달해 준 남학생은 아마 한 달 동안은 고개를 못 들고 다닐 거예요.”
“그 정도도 못 하면 사내도 아니지. 배포가 커야 해. 뭔지 알겠어?”
할아버지처럼 껄껄 웃으면서 대신관은 농담부터 건네며 들어오는 아스릴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몇 번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워낙에 큰일을 함께했던지라 좀 친근함이 느껴지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가 신학생들에게는 거의 이렐린과 맞먹을 만큼의 신급 존재라는 것을 들었지만…… 그보다 아스릴에게는 좀 더 지혜가 많은 자상한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언을 듣고 무작정 그를 찾아갔던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주었던 그가 생각났다. 당시에는 예언에 정신이 팔려 그냥 자신의 말을 어떻게 전달할지,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만 생각하느라 정신없었는데.
나중에 그날을 되짚어 보니 제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자신을 맞이해 주었던 게…… 당시에 얼마나 도움이 죄었는지 모른다.
“오늘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그와 만난다는 것은 뭔가 큰일이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사실 조금 긴장한 채였다. 어려운 사이는 아니지만 자주 만나면 안 될 것 같은 사이?
살짝 긴장한 그녀를 알아차렸는지 대신관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명예 신녀는 적어도 1년은 채워야 맞는 것인데…… 우리의 규칙을 두 번째로 깨게 생겼어.”
대신관이 살짝 투정했다. 첫 번째로 깬 것은 이렐린의 꽃 자격 박탈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슬슬 다음 분기 신전 행사를 계획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이렐린의 꽃 없이 진행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레나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고, 아직 당사자에게는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저…… 신전에서 쫓겨나는 건가요?”
불안한 눈동자의 아스릴이 대신관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