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이렐린의 예언을 받았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심지어는 평민들에게까지 이야기가 퍼져 어딜 가든 그 이야기뿐이었다.
황후는 물론이고 데모트 백작저에까지, 소식은 매우 공평했다.
“뭐어? 이렐린의 아이?”
데모트는 자신의 서재 책상 앞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 소식을 들고 온 집사는 자신이 전하고도 어쩔 줄을 몰라 입술을 꾸욱 물었다.
대체 이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쓸모없는 아이라고, 명예 신녀니 뭐니 하는 제안이 들어오자마자 하루도 안 되어 냉큼 나가는 아이를 적극적으로 잡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렐린의 꽃도 두 번이나 차지했겠다, 아스테리아는 이미 제국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영애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 아이가 필요했던 것은 아스테리아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때부터 눈에 띄게 예쁜 아이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공작가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미모까지 더해져 제국 최고라 일컬어졌겠지만……. 자신이 백작밖에 안 되는 것이 이런 데에서 걸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첫째는 영악하리만치 똑똑했고, 질투가 많아서 원하는 일은 쟁취하고야 말았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끈기였고, 그것은 하필 이렐린의 꽃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애초에 모든 것을 다 외울 필요는 없었지만, 전체를 섭렵하고 내용을 이해하고 있어야 그것이 제대로 된 낭송이 되는데, 그녀는 그것마저 어려워했다.
그나마 가능성을 엿보았던 것이 바로 아스릴이었다. 아스테리아는 자기 동생이 쓴 글씨는 무조건 읽어 내고 말았다. 질투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되자 본인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다 아스릴은 다른 건 몰라도 암기력이 매우 좋았다. 볼품없는 아이는 그것에 대해 혹독한 훈련을 시켜도 묵묵히 해냈다.
그리하여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렐린의 노래를 모두 외우는 이렐린의 꽃, 아스테리아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게 다 두 딸의 부족한 점을 채워 하나의 완벽한 영애를 만들어 낸 그의 지략이었다.
그런고로 아스테리아가 이미 완벽한 상황에서 아스릴은 더 필요하지 않았다. 아름답지도 않고, 볼품없이 마른 몸에 사람들과 일반적인 대화조차 나누기 힘들어하는 아이는 그 상태로 성인이 되어 버렸다.
최근 몇 달 동안 뭔가 나름의 변화를 꿈꾸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보기엔 전혀 성에 차지 않았다. 이제 성인이 된 마당에 나아져 봤자 뭐가 달라질까.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와중에 그 아이가 알아서 살길 찾아 집에서 나가 준다는데 말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데모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그 아이가 이렐린의 아이라니, 꽃이라는 이름뿐인 우상이 아니라 진짜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라니…….
“흐어어어엉! 시끄러! 다 나가! 아니, 다 떨어져!”
그때 복도를 시끄럽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방 앞을 지나갈 리가 없는 저 날카로운 목소리는 바로 그 사랑해 마지않던 첫째 딸, 아스테리아였다.
지난번 레나드를 직접 만나겠다고 신전에 다녀온 이후로 내내 저 꼴이었다. 부인에게 물어도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얼버무리기만 해서 당일에는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아스테리아가 아스릴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다른 사람 앞에서 막말을 퍼부었다는 이야기에 아찔해졌다.
그렇게 했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리 분별을 못 하고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그동안 제가 어떻게 교육을 시켜 왔는데 그렇게 무모한 짓을, 그것도 황태자 앞에서……!
“그러게, 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르고 와선……!”
하지만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스테리아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황태자가, 아니 아스테리아는 고사하고 어떤 영애들에게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던 황태자가 그 와중에 아스릴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제 눈으로 보기 전엔 절대 못 믿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서 데모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내 선택은 똑같았을 텐데.”
“어머, 아스테리아! 그렇게 자꾸 울면 안 돼. 피부가 상하잖니, 응?”
데모트 백작은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 문을 열고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고는 복도 한가운데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아스테리아의 손목을 붙잡고 잡아당겨 일으켜 세우고는 성큼성큼 서재로 걸어갔다.
“아! 아빠, 아파요! 아파!”
“여보, 여보! 왜 이래요. 애가 아프다잖아요!”
아스테리아를 우악스럽게 끌고 가자 부인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따라왔다. 흘깃 둘러보자 1층에서 하인들이 어쩔 줄 모르고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백작의 얼굴이 분노로 씰룩거렸다.
콰앙!
서재 안으로 아스테리아를 던지듯 밀어 넣자 부인도 쏜살같이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백작은 그 뒤로 서재 문을 쾅 닫아 버렸다.
“흑…… 흑, 아빠, 아파아…….”
“이이는! 왜 애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 거예요!”
며칠째 집 돌아가는 꼴이 짜증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분노로 움찔거리는 얼굴을 감출 생각도 안 한 채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잘못은 있는 대로 해 놓고 뭘 잘했다고 집에서도 망신살을 뻗치고 있는 거냐, 어?”
데모트 백작이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이 없어서 순간적으로 백작 부인과 아스테리아 모두 그대로 얼어 버리고 말았다.
“여, 여보…….”
“아빠…….”
이제야 주눅이 들어 자신을 부르는 두 여인을 돌아보았다. 울어서 붉어진 눈가와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퀭해진 두 눈이 보였다.
“그렇게 레나드가 가지고 싶었으면 상황 파악을 제대로 했었어야지. 앞뒤 재지도 않고 덤빈 것도 모자라, 황태자를 전담으로 모시고 있는 신녀를, 뭐 어떻게 했다고?”
“황태자 전담 신녀라니요! 걔 아스릴이었어요, 아빠!”
주눅이 든 듯하다가도 아스릴의 이야기에 다시 화르륵 타올라 버럭 소리부터 지르는 아스테리아를 백작이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이렇게 차가운 그를 본 적이 없던 아스테리아로서는 타오를 듯이 올라왔던 분노마저 식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상황 파악을 제대로 했어야 한다는 거 아니냐! 아스릴이라면 더 좋은 기회였던 게 아니냔 말이다! 살살 구슬려서 황태자부터 만나고, 네가 이렐린의 꽃이니까 그걸 이용해서 신전을 안내하겠다 하든지 했어야지!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서야!”
백작은 버럭버럭 쉬지도 않고 혼쭐을 냈다. 답답한 마음 이루 말할 데가 없는데, 그나마 기회로 삼을 수 있었던 길까지 아스테리아 스스로 다 막아 버린 꼴이 됐다.
“자기 기회 자기가 걷어차 버려 놓고는 뭐 그리 잘났다고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고, 저 아래 있는 하인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이거야! 울 거면 방에 처박혀서 조용히 울든가!”
“아……빠…….”
그동안의 상냥하고 다정하고 자신에게 맹목적이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그는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다.
아스테리아는 우는 자신을 위로해 줄 줄 알았던 아버지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화를 내자 눈물이 쏙 들어갔다. 깊은 배신감과 함께 어지러울 정도로 혼미했던 정신이 바짝 들었다.
지금 제가 놓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은 레나드와 아버지였다. 이미 레나드를 놓친 마당에 아버지에게마저 미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잘못했어요, 아빠. 바깥에서 조심할게요. 아, 집 안에서도 조심할게요…….”
아스테리아는 순식간에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며칠 동안 온 저택을 휘젓고 다니며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고, 곁에 지나다니는 하인과 하녀들에게 신경질을 부리기도 부지기수였다.
빼앗겼다는 것도 화가 나서 베개를 찢어 버리고 싶을 지경인데, 어떻게 빼앗겨도 그런 애한테 빼앗기느냐는 말이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 아스테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일에는 레나드의 무서운 기백에 놀라 꼬리를 말고 돌아왔지만 정말 어떻게 생각해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이 관계를 되돌릴 수 있을지, 레나드에게는 어떻게 해야 잘 보일 수 있는지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보아도 결론이 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아빠에게마저 버림받으면 절대로 안 된다. 아스테리아는 다시금 정신을 바짝 차렸다. 백작의 날카로운 눈이 아직도 저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똑똑똑.
“저, 백작님.”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런 심각한 분위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온 이는 집사였다. 데모트 백작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손님이 오셨는데, 그게…….”
집사가 머뭇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어쩔 줄 모르고 초조해하는 모습은 평소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부인, 아스테리아를 데리고 빨리 방으로 들어가시오.”
“예? 아, 네.”
백작 부인은 눈치는 매우 빠른 편이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서 있는 아스테리아를 붙들고는 거의 끌고 가다시피 그의 서재를 나섰다. 문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그는 집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찾아온 이가 누구더냐.”
아무래도 부인과 아스테리아가 있어서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들을 보내고 다시 물었다. 그제야 쭈뼛거리던 그가 대답했다.
“그게…… 정문 앞에 황실의 마차가 서 있기에 마중을 나갔더니…… 황후 폐하께서 오셨다 합니다.”
“……뭐?”
드디어 올 것이 왔는가. 황태자비 후보로서 딸을 궁으로 불러들인 사람이자, 며칠 동안이나 고가의 선물로 환심을 사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로나르드 황자의 어머니.
그녀는 과연 어떤 용무로 이 저택을 찾은 것인가.
데모트의 날카로운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