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째는 확실하게-63화 (63/106)

63화

“뭐? 전쟁?”

별채의 후원에서 일부 푸른 잎이 남아 있는 나무들 아래에 의자를 놓고 휴식 공간을 만들어 둔 곳에서 누워 있던 황후는 시녀장이 전한 이야기를 듣고는 날카롭게 두 눈을 떴다.

해를 피해 의자 방향을 돌려놓았는데, 어느새 움직인 해 때문에 햇빛이 정확하게 그녀의 눈을 찔렀다. 온갖 인상을 쓰며 눈앞을 가린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방금 귀족들과의 좌담회가 끝이 났는데, 거기 참석했던 이들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합니다. 좌담회 중에 세드룬이 들어와 황태자 전하께 그렇게 고했다고…….”

단순한 전쟁이 아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좌담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들, 전쟁이라면 이렇게 평온할 리가 없었다.

여기까지 소란이 오지 않은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녀의 뒤로 허둥지둥 시녀장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별궁을 지나 황태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웅성거리는 사람은 있지만 지금 당장 군대의 출정을 준비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상해……. 지금 당장 군대를 내보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조용하다고……?”

클로이는 너무 빠르게 걸어온 탓에 뻐근해진 다리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황태자에게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다른 건물에서 그에게로 가려면, 성의 정문을 지나 이곳으로 오려면 그녀가 서 있는 자리를 지나가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조용한 것인가…….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클로이는 바로 걸음을 옮겨 황태자가 있을 집무실로 향했다. 전쟁 소식에 기사단에게로 가 버렸을지 모르지만, 일단은 여기부터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집무실에서 대번에 그와 마주쳐 버렸다.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오셨습니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클로이에게서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자, 레나드가 먼저 고개를 들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당장 출정을 지휘하기 위해 뛰쳐나가는 대신 책상 앞에 앉아 깃펜을 들고 있었다.

‘시엘라가 잘못된 정보를 들고 온 것인가…….’

아무리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생각해 보려고 해도, 그 또한 말이 안 되었다. 도대체 어떤 걸 어떻게 잘못 들어야 아도피트가 침략해 와 전쟁이 벌어졌다는 말로 와전될 수 있단 말인가.

“소식을 하나 듣고 놀라 달려왔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어요.”

여유로운 그를 경계하며 클로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건 지금 뭔가 떠볼 때가 아니었다. 전쟁이라는 건 결과에 따라 책임자의 자리가 걸리기도 하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아, 아도피트의 침략 말씀이시군요. 어제 침공이 시작되었고 근처에 있던 주둔군이 막고 있습니다.”

“주둔……? 숫자가 어떻게 되기에, 밀리지 않을 만큼인가요? 지원 보내지 않아도…….”

“아도피트에서 보내온 군사가 2만, 그리고 주둔해 있던 아그로드의 군대가 3만입니다. 숫자로서도 밀릴 일 없지만, 그들이 쳐들어온 곳이 가까운 곳이었고 지형적으로도 이쪽이 유리한 곳이라,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자신만만한 레나드의 대답에 클로이는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전쟁이 발발했는데 그는 너무나도 태평했고, 심지어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 주둔해 있던 군대가 있었나요?”

공식적으로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제게로 흘러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비공식적으로야 물론 그런 이야기들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문제는 그 어떤 루트로도 동쪽 경계에 3만에 달하는 군대를 보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로나르드 때문에 정신을 놓고 있었더니만……!

그사이에 이렇게나 큰일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제가 보내 놓았었습니다. 아주 적절하게 타이밍이 들어맞았죠?”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클로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뒤돌아 나왔다. 뭔가 있다는 불안감만 가득 안은 채 그녀는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별궁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 * *

며칠 뒤, 제국에는 승전보가 퍼졌다.

동쪽 경계에 위치한 마을에 아도피트의 군대가 예고도 없이 쳐들어왔지만, 근처에서 주둔 중이었던 아그로드의 군대가 며칠 만에 깨끗하게 아도피트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화제가 된 것은 전쟁 자체가 아니었다. 아도피트는 언제나 아그로드와 자신들의 영토의 경계가 되는 강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려 왔기 때문에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최근에는 왕위 다툼이 있어서 조금 더 위험한 정도?

하지만 누구도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킬 생각을 못 했었다.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갑자기 주둔을 시킬 생각을 했느냔 말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군대를 보낸 지 거의 일주일 정도 만에 침략해 왔다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면 거의 알고 보냈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처음 전쟁 소식이 전해졌을 때 모두 그 부분에 의문을 가졌다. 이곳에서 동쪽 경계까지 가려면 쉬지 않고 달려야 꼬박 하루였다. 그 많은 군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경계까지 움직이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렸을 것이다.

만약 주둔해 둔 군대가 없었다면 아무리 두 배쯤 되는 군대를 보냈다 한들 지금보다 훨씬 피해가 컸을 것이다. 아마 영지 한두 개쯤은 함락당해서 빼앗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그들의 피해는 미미한 반면 아도피트의 군대는 아주 깔끔하게 자기들 나라로 물러갔다.

그리고 그 의문은 황태자의 발표로 명확하게 밝혀졌다. 그 이유가…… 비록 단번에 믿기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귀족 회의장이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황태자는 황제 대신 그의 자리에 앉아 좌중을 훑어보았다.

“황태자 전하, 최근 아도피트의 침공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하께 설명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갖은 추측을 해 봤지만 파악하기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결국 그들은 전쟁의 소식을 듣고도 태연하게 대처했던 황태자에게 직접 답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경들도 알다시피 아도피트의 침공은 그 자체로는 놀랄 일도 아니다. 특히 최근 왕위 쟁탈전 때문에 다들 우리의 동쪽 영토, 특히 강가의 영토를 탐내고 있었지. 하지만…… 문제는 정확히 그것이 언제냐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모두 레나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아예 군대를 옮겨 놓자니 황궁이 비게 되고,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보내자니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것까지 추측 가능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체 그걸 어떻게…….”

다른 귀족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황태자의 눈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여유로운 움직임과 눈빛. 그는 마치 귀족들의 긴장을 가지고 조련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그것까지는 추측을 하지 못했다. 내가 최근, 그간 신경 쓰지 못한 이렐린 신전에 대해 알기 위해 자주 출타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성의를 보였더니 이렐린께서…… 내게 아주 큰 선물을 하나 해 주셨다.”

황태자의 입에서 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다니…….

그간 황태자의 신전 출입이 잦아진 것에 대해 온갖 추측을 떠올리고 있던 이들은 움찔하고 말았다.

“선물이라니……. 하하, 이렐린께서 예언이라도 주신 것입니까? 하하…….”

귀족 중에 머쓱함을 견디지 못하고 실없는 농담이라도 던지겠단 생각을 했는지 멋쩍게 웃으며 말을 꺼낸 이를 향해서 레나드는 슬쩍 코웃음을 쳤다.

레나드에게 집중하고 있던 이들은 그의 이 자신만만한 미소에 긴장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대가 아주 핵심을 제대로 잡았군.”

“느에에?”

웃음소리를 내고 있던 이는 레나드의 반응에 기이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귓바퀴부터 목덜미까지 벌게진 그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쥐구멍을 찾아 두리번거려야 했다.

“백작이 해 준 말이 정답이다. 내가 신전 안내를 부탁했던 명예 신녀가 이렐린의 예언을 듣고 내게 그것을 전해 주었지. 대신관의 검증을 마친 뒤라 지체할 것 없이 황궁에 돌아와 군대를 조직한 후 동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만에 이번 일이 벌어진 것이다.”

레나드는 설명을 마쳤다는 듯이 강건한 입술을 굳게 다무는데, 아무도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한 이가 없었다. 멍하니 황태자를 바라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 누구도 자신과 같은 얼굴이라 다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그들의 반응을 보던 레나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적어도 한 명쯤은 나서서 이야기를 해 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여기에 부연 설명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렐린의 꽃이나 명예 신녀 같은 것은 신전에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만든 자리들이고, 그 외에 이렐린의 아이가 있다. 들어 본 적 있는가.”

“예, 예…….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이렐린의 아이는 이렐린께서 자신의 힘을 인간 세상에서 실제로 실현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나누어 주는데, 그 힘을 받은 이들을 말한다.”

갑자기 이렐린의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말을 따라잡지 못하던 이들도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내가 안내를 맡겼던 명예 신녀 아스릴이, 바로 이렐린의 아이였다. 이렐린의 음성으로 예언을 듣고 내게 전달해 준 것이다. 하늘이 그녀와 나를 통해 아그로드를 지켜 주신 것이다.”

물론 그게 역사적으로 존재가 증명이 되어 오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 힘을 목격하기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것을 예언하고, 예언으로 들은 이야기를 바로 황태자에게 전달했다는 것이 신전에서 황태자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것에서 남은 이들은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신께서…… 신께서 아그로드를, 황태자 전하를 지켜 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