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오랜만에 온 신전이었지만 오래 있을 수 없었던 레나드는 응접실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낸 뒤 돌아갔다.
그를 배웅한 아스릴은 조금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움직이는 많은 무리 사이를 지나쳐 신전을 나섰다.
숲은 여전히 고요했다. 낮 동안 잠깐 소란스러웠던 숲을 지나고 딱 한 번 가 보았던 길을 기억을 더듬어 나아가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통에 시야가 좁았지만,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걷고 또 걸었다.
조금만 방심했다간 걸려 넘어질 것 같은 나무뿌리들이 보이고, 점점 귀에 안 들리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물이 그려지는 그런 소리였다.
아스릴은 지난번 대신관과 함께 찾았던 이렐린의 신전을 찾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조금 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어가 그날처럼 어스름 속에서도 혼자 빛을 내듯이 쏟아지는 폭포 앞에 당도했다.
“그때처럼…… 열 수 있을까?”
대신관의 말대로 해 보니까 틈 없이 쏟아지던 폭포수가 마치 커튼이 걷히듯 사악 옆으로 벌어지던 그 경험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물 좀 걷어 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레나드가 간 뒤에 마음이 평온한 한편 아무래도 걱정되는 것이 있어서 문득문득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표현했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그와 자신은 그저 제국의 일부를 살아가는 평민이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가문의 상황 같은 것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중간 계층의 귀족 정도도 아니었다.
그는 이 아그로드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으니까.
심지어 처음으로 받은 이렐린의 목소리가 전한 것이 전쟁이라는 게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레나드는 물론 그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입지를 굳힐 만한 아주 좋은 일이 될 거라고 장담했지만, 아스릴은 아직도 걱정투성이였다.
폭포수 앞으로 뻗어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간 아스릴은 그때 열었던 것처럼 팔을 들어 올려 밀어 보았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생각을 치워 주듯 쏟아지는 물줄기가 걷어졌다.
안쪽을 들여다보자 자연 그대로의 동굴 안쪽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는 그냥 바로 돌아서 신전으로 돌아왔지만, 지금은 발을 넓게 벌려 폴짝 뛰었다. 살짝 간격이 있는 틈을 뛰어넘어 동굴 입구에 안착했다.
대신관의 말로는 이렐린의 아이로 능력을 받은 이가 이곳에서 이렐린의 힘을 느끼고 회복하고 기도하는 곳이라고 했다.
아스릴은 제게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과거의 자신에게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식견이 좁거나 마음을 넓게 가지는 법을 몰라서인지. 아직 모르는 게 많은 것 같아 불안할 때도 있었다.
결국 복잡한 마음을 좀 진정시켜 볼 생각으로 이곳을 찾은 것이다.
동굴은 입구에서 봤을 때는 약간 무섭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좁고 울퉁불퉁한 길의 연속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렐린 님…… 안녕하세요……."
이렐린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렐린의 신전이라고 부른다고 들었던 것이 생각나 인사를 건네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 어이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나자 아는 사람을 만나러 온 것 같은 느낌에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용기를 내 안으로 더 발을 디디자 은은한 조명의 출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것은 문이었다.
신전 건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문.
안에 아무도 없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똑똑똑, 문을 두드려 보았다. 바깥에서 들리는 폭포수 소리만 은은하게 들려올 뿐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우와…….”
안으로 들어간 아스릴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동굴 안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멋진 공간이 문 너머로 나타난 것이다.
아스릴이 지금 쓰고 있는 방보다도 세 배는 넓어 보였다. 소파도 있고, 놀랍게도 벽난로도 있었다. 굴뚝이 위로 쭉 뻗어 있는 걸 보니 연기는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 안쪽에는 침대까지 있었다. 필요하다면 이곳을 방으로 써도 전혀 문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면…… 될까.”
아스릴이 <이렐린의 노래> 책이 펼쳐져 있는 단상 앞으로 다가가니 바닥에는 큰 방석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이렐린 동상이 있었다.
홀에서 예배를 볼 때는 의자에 앉아서 하곤 하는데, 여기는 이 방석 위가 기도의 자리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렐린의 노래를 그렇게 열심히 읽고 외워 다니면서도 한 번도 이렐린에게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아스테리아에게 그날의 노래 구절을 적어 주고 나면, 존재를 감추기 위해 아스테리아가 머물던 방에만 있었다. 어떻게 기도를 올려야 할지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고.
어떻게 해도 틀릴 거, 아무도 없는 자리인 여기에서는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어차피 그런 것은 형식일 뿐이다. 그것이 이렐린에게 존경을 표하고 온 마음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니까.
아스릴은 그대로 방석 위에 앉아 이렐린의 노래를 앞에 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길이 있다면 따르겠습니다. 없으면 만들겠습니다. 부디 그를 잃지 않게 해 주세요.”
아스릴의 첫마디였다.
모든 것을 다 기대겠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신이라 한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세세한 인생까지 모두 정해 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이루어 주는 것이 많은 만큼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줘야 할 테니까.
“황태자 전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 걸림돌, 들고 걷겠습니다. 모든 삶은 그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부탁을 드리자면…… 그분을 지켜 주세요.”
차분한 목소리는 떨림도 없이 동굴 속 방을 휘돌았고, 그녀의 기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모두 입에 올렸다. 다 들어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제가 만들면 되는 것이니까.
“꼭 다 안 들어주셔도 괜찮아요. 왠지 말하고 보니까 제가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왠지 모를 자신감 같은 게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신 제가 이렐린의 힘을 받은 아이라는 건…… 좀 쓸게요.”
대신에 그녀의 이름은 필요했다.
뭐 틀린 것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레나드는 아마 황실에 아스릴의 존재를 드러낼 생각인 것 같았다. 데모트를 버리고 싶어 하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와 결혼할 때 백작 영애라는 것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되어선 안 되었다.
그 전에 인연을 정리하지는 못할지언정 계속해서 끌고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레나드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될까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차에 이곳이 떠오른 것이다.
“나는…… 예언을 들은 이렐린의 아이니까.”
아그로드에서 신전은 거의 귀족과 맞먹는 지위를 가진다. 비록 권력까지는 없을지언정. 그래서 대신관과 황태자가 서로에게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온전하게 그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황제뿐이었다.
전에 레나드가 예언을 듣고는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던 걸 미안해했었던 적이 있었다. 예언을 듣는 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라 좋았다고.
그것도 레나드에게 좋은 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제게도 좋은 일이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백작 영애를 벗어나 새로운 지위를 얻은 느낌이었다.
마음의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그 동굴에서 나왔다. 손을 움직여 폭포수를 그대로 돌려놓고 다시 신전으로 향하는 길, 발치에 집중해서 걸어가면서도 아스릴의 머릿속에는 레나드 생각뿐이었다.
“왠지…… 찝찝해. 오늘일 거 같아.”
이번엔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렐린이 경고하고자 했던 날이, 레나드와 아스릴이 기다려 왔던 그날이.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내일, 그리고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은…… 사흘 뒤가 될 것이다.
갑자기 이상하게도 아스릴의 머릿속에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마치 전에 듣거나 읽었던 것을 다시 상기시키듯이.
“뭐…… 뭐야.”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우선 지금 생각이 난 대로만 이루어진다면 나쁠 것이 없었다. 비교적 빠른 기간 안에 전쟁은 마무리가 될 것이고, 그것은 확실하게 레나드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
아스릴은 왠지 모르게 싸한 기분에 팔을 문지르며 신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황태자 전하. 드디어 시작됐다고 합니다.”
소식이 전해진 것은 신전에 아스릴을 보러 다녀온 다음 날 오후였다. 세드룬이 귀족들과 함께 좌담회 중이던 그에게로 달려와 귓속말을 한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주목된 가운데, 레나드는 철저하게 표정 관리를 했다.
서서히 일그러지는 미간, 설마 했지만 안타까운 얼굴. 세드룬의 말을 들으며 그의 표정은 미묘하게 계속해서 변하였다. 자신을 보고 있는 귀족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상대 인원은.”
“2만입니다.”
“우리는 3만이었던가.”
“그러합니다.”
눈치가 좀 있는 귀족이라면 이 이야기의 흐름을 알아챘을 것이다. 심각한 얼굴, 그리고 평소 나올 수가 없는 숫자까지.
“경들, 식사 중이지만 소식 하나를 전해야겠군.”
“마, 말씀하십시오, 황태자 전하.”
곁에 있던 공작이 긴장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들을 주욱 훑어보며 긴장감을 조성한 레나드는 모두를 둘러보고 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어제 아도피트 공국에서 경계를 넘어 우리 아그로드의 동쪽 영지 하나에 침공했다 한다. 수는 2만, 현재 내가 근처에 주둔시켰던 3만의 군대와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군.”
전쟁. 그것이 벌어졌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