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지금 이런 입씨름이 중요한 것인가. 앞선 이야기들은 전부 차치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혼란과 분노에 차 있는 아스테리아가 살짝 휘청이자 뒤에서 다가온 백작 부인이 그녀의 곁에서 부축을 했다.
이쪽을 보는 눈초리들이 꼭 자신들이 피해자인 척하는 듯해 레나드는 헛웃음이 났다. 물론 그걸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더더욱 굳어져만 가는 그녀들의 얼굴을 보며 레나드는 더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명예 신녀로서 신전에서 생활하며 황태자의 안내를 돕는 이를 모욕했고 폭력을 휘둘렀다. 황태자의 부탁으로 대신관이 허락한 일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그것을 추궁하는 상황에서 막말을 퍼붓고 신체적 위협을 가했다.”
아스테리아와 백작 부인은 그의 단호한 설명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전혀 이쪽에서 하는 말을 자신의 의견에 반영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금까지 아스테리아가 핏대를 세우며 한 말은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추궁을 받아 마땅한 일이기에 나는 이 일을 대신관에게 알리겠다. 그 또한 나처럼 생각한다면, 그 뒤는 알아서 하겠지.”
“모욕…… 모욕이라니요. 아스테리아가 언제 모욕과 폭력을 휘둘렀다고…….”
당황한 백작 부인이 나서서 그에게 항의를 하려 했다. 그가 말한 그대로 대신관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나드의 시선이 백작 부인에게로 향하는 바람에 그마저도 사그라지고 말았다.
“모욕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딸이 내게 읊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겠다. 그것이 모욕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 또한 대신관에게 맡기지. 이 정도면 만족하겠는가. 잘못해 놓고 바라는 것도 많군.”
촌철살인의 말에 두 사람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백작 부인이 은근슬쩍 눈동자를 굴려 황태자의 뒤에 서 있는 아스릴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스릴, 뭐라고 말을 좀…….”
“그리고 그것은 신전의 입장이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백작 부인이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차에 레나드가 그 말을 막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파리해진 아스테리아를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그대가 아름다운 여인인 것은 인정하지. 로나르드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반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스릴이다. 내가 그녀에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쫓아다니던 상황이었는데, 그걸 다 망칠 뻔했어.”
“쪼, 쫓아다니다니요, 황태자께서…… 아스릴을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지만 레나드는 말을 물릴 생각도 없었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 내가. 아스릴을. 좋아해서. 좋아해 달라고 따라다니고 있다. 더는 나를 방해하지 말아라.”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들이 움직일 생각도, 힘도 없어 보이자 레나드는 그제야 아스릴을 돌아보았다.
“속이 시원하신 얼굴이군요.”
“물론이지 그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어 여한이 없군.”
냉랭하고 칼 같기만 하던 레나드의 표정과 목소리는 다시 아스릴을 향하면서 한 번에 확 풀려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나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만드는 것이 아스릴이라니……. 아스테리아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가 툭, 하고 떨궈지고 말았다.
숲에는 아직도 자신을 추스르고 있는 데모트가의 여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움직일 때를 기다릴 필요는 없었던 레나드와 아스릴 그리고 미카엘은 그들을 그 자리에 두고 먼저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아스릴 영애, 영애의 마음은…… 정해진 것입니까.”
레나드는 먼저 대신관을 만나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그의 행동력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미카엘은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어…… 미카엘도 황태자 전하를 마음에 품고 있었나요?”
그런데 엉뚱한 말이 날아왔다. 그녀의 말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던 미카엘은 지금껏 본 적 없었던 불쾌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매우 불쾌한데요.”
아스릴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제가 황태자 전하를 마음에 담았다는 것에 얼굴을 찌푸리시길래요. 그게 기분 나쁠 이유가 황태자 전하를 흠모해서가 아니라면…….”
정말로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미카엘은 확 구겨지는 표정만큼이나 불쾌했던 마음이 풀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 사람은 뭐 놀리거나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걸 먼저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흠모했던 것은 아스릴 영애 당신입니다.”
“……에?”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까 목격한 것을 떠올리자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미카엘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볼을 쓰다듬어 보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예의 바르고 자신의 앞에 놓인 길을 차분하게 생각하고 착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인데, 아까 들었던 그 말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이런 사람을 일찍부터 그렇게 매도하고 함부로 대해 왔을까.
아스릴은 애틋한 눈을 하고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고백을 듣고 나서야 그것도 모르고 있었던 자신이 멍청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그런 친절들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저 좋은 사람과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아스릴의 얼굴에 약간 그늘이 드리웠다.
“그럼 이제부터 미카엘과 수업 같이 못 듣는 건가요? 식사도 따로 하고, 쉴 때 나가서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도…… 안 하실 건가요?”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함께 있어 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스릴로서도 한꺼번에 잃기엔 좋은 시간들이었다.
“왜 그것들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미카엘은 볼을 쓰다듬는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대로 허락하는 한은 절대 떼지 못할 것만 같았다.
“저를 좋아하셔서 그랬던 거라면…… 이제 그 마음에 보답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아셨으니까, 더는 저와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으신 거 아니에요?”
수업을 들을 때 보면 그녀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특히 암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발군이었다. 맘먹고 수업을 들으면 그날의 수업 내용을 반 이상 그대로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인간관계나 특히 사랑에 관해서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관점과는 매우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있는 듯했다.
“내가 아스릴을 따라다닌 게, 아스릴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거로군요. 그 목적이 사라지면 내 마음도 식어 버리는 건가요?”
아스릴은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건, 경험에 따라 보면 쉽게 식어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새로운 삶을 얻고 살고자 다짐했을 때, 바로 레나드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저를 진짜 사랑해 주지 않을 사람이고, 얼마 후면 아스테리아의 남자가 돼 버릴 사람이었는데도…… 결국 아스릴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차라리 이 마음 숨기고라도 그의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마음인 걸까. 진작 알아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알았어도 뭔가 해 줄 수는 없었겠지만.
“그건 아닌 거 같아요. 그치만…… 그럼 나는 어떻게 해 줘야 하죠?”
아스릴은 정말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녀가 자신을 생각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미카엘은 씨익 웃으면서 그녀에게 대답했다.
“나는 이제까지처럼 할 겁니다. 아스릴은 그냥 이제까지처럼 받아 주면 돼요. 다만…….”
그때 대신관에게 간다던 레나드가 두 사람이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아스릴의 볼 위에 올라가 있는 미카엘의 손을 발견한 레나드의 눈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피식 웃은 미카엘이 손을 떼면서 말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황태자 전하께서 싫어하시겠지만요.”
“아하.”
아스릴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난 다음에 레나드를 돌아보았다. 미카엘과 자신을 보는 그의 얼굴이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그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와 아스테리아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미 경험했으니까.
눈에서 불을 뿜을 것 같은 레나드를 바라보며 아스릴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그의 그런 반응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의 앞에서는 절대 마음을 불안하게 할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할 뿐.
“돌아오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스릴이 레나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던진 부드러운 미소와 말 한마디에 레나드의 잔뜩 힘 들어간 눈이 스륵 풀렸다.
“곁에 있어 주어 고맙다, 신학생. 이제 돌아가도 좋다.”
미카엘은 거기에 대고 뭐라고 도발할 생각은 없었다. 자칫하면 그의 질투가 아스릴에게 불편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레나드에 대한 솔직한 감정만큼, 자신을 대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해 준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까 고마웠어요, 미카엘. 내일 봐요.”
아스릴의 배웅을 받는 것만으로도 미카엘은 미소를 되찾았다.
“내일 봐요.”
눈을 휘어 환하게 웃어 준 미카엘은 레나드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에 똑바로 걸어 방을 나갔다. 끊어 낸 것이 아닌 앞으로를 기약하는 그녀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이럴 땐 책이나 읽어야겠다. 단순히 암기를 하면서 잡생각을 떨쳐 볼 생각이었다.
저벅저벅 길고 긴 복도를 걸어가는 미카엘의 발소리가 무겁지 않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