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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59화 (59/106)

59화

숲 속은 본래 고요한 곳이다. 나뭇잎이 바람에 이는 소리라든가, 저 멀리 냇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가끔 들리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고요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침묵이 찾아왔다.

아스릴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아스테리아와 백작 부인의 등 뒤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너무 놀라 숨소리조차 멎어 버린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아스릴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뱉은 작은 숨소리가 이곳의 침묵을 깨고, 아스테리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오랜만에 시간을 내서 왔더니……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목소리가 너무 익숙해서 아스테리아는 넋을 놓아 버렸다.

우스 호수에서 마주쳤던 이후 신전에서 다시 한번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녀에게 날을 세우던 그의 목소리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참이니, 그가 못 나타날 곳도 아니었다.

저벅저벅 뒤에서부터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마치 무언가 공포스러운 것이 다가오는 듯, 아스테리아와 백작 부인은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발소리는 무심하게도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그 발걸음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그녀들을 지나쳐 앞으로 향했다.

아스릴을 본 채로 굳어 버린 아스테리아는 자신을 스쳐 지나간 그림자가 앞으로 향해 아스릴의 곁에 서는 것을 보았다. 그는 보란 듯 제 시야를 가리지 않는 위치에 서서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내려다보는 다정한 눈빛과 올려다보는 눈에 어리는 미소. 아스테리아는 제 눈을 덮어 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벌써 일이 끝났나요?”

아스릴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실 놀란 것은 아스릴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수는 있겠지만 그걸 진압하고, 그 소식이 날아들어서 마무리를 하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이렇게 빠르게 수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을까?

그녀가 그 부분부터 물어보자 레나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대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았나.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반기는 것보다 일 걱정부터 하는군.”

“아…….”

그녀에게서 달콤한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말에 살짝 난감한 듯,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그 기색이 반가울 정도였다.

레나드는 애틋한 마음을 담아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려 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차 싶은 얼굴로 머리에 손을 올렸지만, 그 손을 살며시 잡아 내려 주고는 제 손으로 조심스레 빗어 내려 주었다.

“나도 일을 전부 다 마무리하고 나서 올 생각으로 그동안 오지 않았는데, 일주일이 한계였던 모양이다. 오늘은 세드룬도 남겨 놓고 혼자 달려왔다.”

“저는…….”

별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고 말할 참이었는데, 그녀의 말이 끊기고 눈동자가 절로 옆으로 돌아갔다.

레나드에게 걱정시키지 않도록 잘 지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걸 방금 저 여자들이 망쳐 버리고 말았다.

와서 머리채 잡을 거면 어제 오기라도 하든가, 하필이면 딱 레나드가 오는 날을 골라 올 게 뭐람. 속상한 마음에 아스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반응에 레나드의 시선이 그제야 옆으로 돌아갔다. 아스릴을 바라볼 때의 눈과는 전혀 다른…… 아니 그냥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스릴의 무심한 시선은 아스테리아를 향했다가 다시 돌아갔지만, 레나드의 차가운 눈동자는 계속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미카엘이 잘 도와줘서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어요. 언니는 오늘, 지금 막 왔어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볼까 싶은 생각에 미카엘의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의 미간이 더 좁혀져 버렸다. 그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가더니 미카엘을 응시했다. 날카로움 대신 의뭉스러운 눈이 그를 살폈다.

“나 없는 사이에 아스릴이 그대에게 많은 의지를 하는 모양이군. 잘 부탁해.”

마치 연인을 대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지켜보고 있던 아스테리아는 파들파들 떨리는 몸을,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막아 보려 했지만 마음까지 진정되지는 않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아스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자존심이 상했지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레나드가 직접 정리해 준 머리카락이 차륵 움직이며 아스릴의 시선이 다시 아스테리아에게로 향했다. 미간을 팍 찌푸리는 그녀를 보면서도 아스릴의 얼굴에는 미동이 없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신전에 오실 때마다 내가 안내를 맡고 있어. 내가 명예 신녀로서 딱히 하는 일도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아스릴이 그렇게 대답을 하려는 차에 레나드가 그녀의 손을 꽉 힘주어 잡아 왔다. 덕분에 그녀의 말은 중간에 끊겨 버리고 말았다.

“아직 아스릴은 거기까지인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은 조금 다르다.”

레나드는 아스릴의 두 눈을 응시하며 말을 꺼냈다.

그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상태이지만, 아직 공식적인 입장으로 말할 수 있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스릴은 결심을 한 듯한 레나드의 얼굴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전하, 지금…… 괜찮으시겠어요?”

“내게 안 괜찮은 때는 없다.”

그녀가 반응해 주길 기다렸다는 듯 레나드가 말했다. 그녀의 말뜻에 담긴 속마음을 이해해 준 것인지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피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돌리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넋이 나가 있는 두 모녀를 바라보았다.

아스릴이 신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벼르고 있던 이들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 거칠게 아스릴을 다루는 아스테리아를 보자 뜨거운 것이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그가 뒤로 알아보고 전해 들은 이야기들 중 그 어떤 때보다도 더 심하게 그녀를 다루고 있었고 하필 그걸 지금 제가 목격한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말하기.”

“화, 화…… 황태자 전하.”

“내가 전에 그대는 이렐린의 꽃으로도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다급하게 그를 부르려 하는 아스테리아의 말을 끊고 레나드는 일말의 감정도 품지 않은 얼굴로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녀가 떨고 있는 것 따위는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이 그의 말이 또다시 이어졌다.

“지금 이렇게 신전으로 찾아와서 명예 신녀를 욕되게 하는 것이 이렐린의 뜻인가. 이렐린의 꽃이라는 자가 이렇게 신전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에 대해서……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납득이 갈 만한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황태자라는 입장에서 신전 내의 일을 본인이 결정지어 버리지 않기 위한 말이었지만, 결국 그녀를 이렐린의 꽃에서 끌어내리고 싶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 아이는 데모트 백작저에서도 그저 제가 이렐린의 꽃의 본분을 다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던…… 아이입니다. 제대로 씻을 줄도 모르고 사람들을 대할 줄도 몰라 다락방에서 혼자 지내던 아이예요.”

아스테리아는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줄줄이 말을 쏟아 내었다. 아스릴이 듣기에도 조금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크게 틀린 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나드는 그녀가 말을 이어 나갈수록 얼굴이 싸늘해지기만 했다. 아스릴 방향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떨리려는 목소리를 다잡고 겨우겨우 말을 일단락 지었음에도 황태자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표정이 풀어지기는커녕 더욱 굳어만 갔다.

“그…… 아그로드의 다음 희망이신 황태자 전하께는 전하와 어울리는 영애가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합니다. 앞으로 아그로드의 황후가 될 자리에 아무나 앉히면 안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 아이에게는 품위랄지 예의랄지 기품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떨림은 점차 사라져 갔다. 아스테리아는 결국 악이 남은 목소리로 따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두려움은 잊고 독하게 마음을 먹어서야 논리라는 것을 조금 찾아 가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그 부분을 따지고 들면 들을 가치라도 있는 것이지. 아까 그 말만 하고 끝냈더라면 내가 힘을 써서라도 오늘 당장 이렐린의 꽃을 바꿔 버릴 뻔했군.”

레나드의 말은 신랄했다. 아스테리아는 힘이 잔뜩 들어간 눈을 부릅뜨고 그의 시선을 받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 하셔도, 제가 제 능력으로 얻어 낸 이 자리는 빼앗으실 수 없으실 겁니다!”

레나드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껏 치장한 것도 다 잊어버렸다. 도대체 잘못된 게 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비 후보에 간택된 다섯 명의 영애가 지금 기만당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심지어 저희를 황궁으로 불러 놓고 나타나시지도 않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데 결국 울컥해 버리고 말았다. 무려 황자에게 애정 공세를 받는 여자였다. 온 제국민이 이렐린의 꽃으로서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칭송하기까지 하는 저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홀대할 수가 있는지, 서러워질 지경이었다.

“황태자비 후보 결정에 나는 일절 관여한 바가 없다. 처음부터 황후께서 결정을 하시는 데 고민을 하시기에 방법을 알려 드렸을 뿐. 그분은 내게 양해나 동의를 구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내게 결혼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하신 일이지.”

아스테리아의 두 눈에 조금씩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황태자비가 알아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던 것도 아닐 텐데, 지금 이게 무슨……. 백작 부인은 거의 졸도를 할 지경이었다.

“그때는 내게도 그것을 반대할 만한 명분이 없었는데, 이제는 명분이 생겼으니 명확하게 황후 폐하와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되었는가.”

레나드의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에서 놀림이나 거짓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저 친분 있는 아스릴을 지켜 주려는 것인가 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레나드의 눈빛은…… 다른 뜻으로 읽으려야 읽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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