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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58화 (58/106)

58화

오늘도 레나드는 오지 않았다. 오전에 수업을 하나 듣고 나왔고, 점심은 먹고 난 다음에는 바깥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요 며칠 대부분의 시간에 수업을 듣고 도서관을 가다 보니까 햇볕이 받고 싶어진 것이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녀의 곁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미카엘이 함께했다.

“오후에 수업 있지 않아요?”

건물을 나서 적당히 앉아 있을 곳을 찾으며 아스릴은 그렇게 말했다. 뒤따라오며 그녀에게 어느 자리를 추천해 줄까 찾고 있던 미카엘은 가볍게 웃음소리를 냈다.

“아스릴과 함께하는 시간에도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괜히 각 잡힌 말투로 그렇게 말하면 제가 정말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느끼는 것인가. 아스릴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 버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호수가 있네요.”

아스릴은 호수 근처에 보호색인 양 놓인 벤치를 발견했다. 한곳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의자도 맘에 들었다.

그를 떠올리는 제 얼굴을 미카엘이 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던 차였기 때문에.

호수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아스릴은 그동안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다가 쉬러 나온 참이었기 때문에 호수의 평온한 물 위에 비친 나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참 이상하죠. 아스릴의 옆에 있는 것은 내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인데, 정작 곁에 있으면 심장이 쉴 새도 없이 뛰고 있는 것을 느껴요.”

굉장히 감성적인 말을 하는 미카엘의 말을 들으면서도 아스릴은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제 옆에 있는 게 편하다는 말이겠거니……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다였다.

미카엘이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부드러웠던 시선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미카엘도 두 눈을 지그시 감을 뿐 다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마주 보는 자리가 아닌 같은 곳을 보는 자리에 앉아서야 이런 말을 꺼낸 데에도…… 이유가 있었으니까.

평온한 호수의 수면만큼이나 조용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급격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사박사박, 사박사박.

굉장히 빠른 발걸음 소리가 두 개가 들려왔다. 아스릴 때문에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미카엘은 바로 그 소리를 알아채지 못했고, 생각 없이 앉아 있던 아스릴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앞에 나타나 버린 것을 확인했다.

“야, 아스릴! 너 이게 무슨 소리야?”

아스테리아와 데모트 백작 부인…….

아스테리아가 이렐린의 꽃인 이상 신전에서 다시 봐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었지만, 이렇게 제가 쉬고 있는 장소까지 찾아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저렇게 화가 난 얼굴과 목소리로 제게 따지러 온다니.

아스릴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미카엘도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인은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최 멈춰 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카엘이 어, 어, 하고 있던 사이 순식간에 아스릴의 앞까지 다가와 밀쳐 버릴 듯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아!”

“너, 바른대로 말해! 도대체 황태자 전하께 무슨 짓을 한 거야, 어? 뭘 했길래 황태자 전하가 신전에 오면 너만 찾는 거냐고!”

매섭게 외치는 아스테리아의 말에 미카엘은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바로 아스릴을 돌아본 그는 더 놀라고 말았다. 상체가 흔들릴 만큼 우악스레 어깨를 붙잡혔고, 매서운 말을 듣고 있음에도 아스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무슨 짓이라니. 무슨 짓을 했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놀라는 것은 미카엘만이 아니었다. 아스테리아가 제 분을 못 이겨 이렇게 날카롭게 언성을 높일 때면 아스릴은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그녀가 하는 말을 모두 들어 주었었다.

자신의 잘못일 때도 있었지만, 아닐 때가 더 많았다. 심지어 어떤 날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데, 그저 화풀이 대상이 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무조건 침묵을 지켰었다.

지금도 침묵을 바란 건 아니었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듣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신전 숲 밖을 헤매고 다니던 터라 화가 더 치밀어 오른 상태에서 주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녀에게로 돌진한 터였다.

눈을 내리깔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듯이 잔뜩 수그러져 그녀의 타박을 다 들어 주는 그저 솜인형 같은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익, 이게 말이 되냐고! 네가 명예 신녀로 들어온 것도 웃기는 일인데, 뭐? 황태자 전하가 너만 찾아? 뭐야, 도대체 무슨 술수를 쓴 거냐고!”

거의 발악을 하듯이 소리치는 그녀는 미카엘이 보기에 전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만 보면 손이 뻗어 나갈 거 같은데, 아스릴을 보면 왠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차분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명예 신녀는 신전에서 제안했던 것이고, 황태자 전하의 일도 나는 생각도 안 한 일이었는데, 전하께서 대신관님께 요청하신 일이야. 따지려면 그분들에게 가야지.”

그리고…… 이렇게 조목조목 차분하게, 차갑게 반박을 하는 목소리와 표정은…… 미카엘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익, 이익……!”

열이 잔뜩 오른 머리 때문에 억지로라도 뭔가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자 악문 잇새로 억눌린 소리만 나오고 있었다.

아스릴이 시선을 뒤로 돌리니 놀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백작 부인이 보였다. 미카엘도 그쪽을 보았다. 세상에, 딱 봐도 그녀의 어머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세 명이 닮아 있었다.

“저, 이 손은 놓고 차분하게 대화하시죠. 이렐린의 신전에서는 이렇게 언성을 높이는 걸 경계해야 하는 일이라고…….”

“뭐죠? 당신은 뭔데 이야기에 끼어드는 거야?”

중재에 나선 미카엘에게마저 날카로운 목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항상 눈을 접어 해사하게 웃던 미카엘의 미소가 싹 가셨다. 다정한 미소가 사라지자 냉랭함이 감도는 얼굴이 되었다.

“미카엘, 미안해요. 제 언니의 잘못은 후에 제가 사과할 테니 먼저 가 주시겠어요?”

“아스릴…….”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니?”

“작작 좀 해. 그래 놓고 사람들한테 이렐린의 꽃이라고 소개할 셈이야? 여기 신전이라고, 아스테리아.”

순식간에 지나간 대화 끝에 침묵이 찾아왔다. 씩씩대는 아스테리아의 숨소리만이 긴장을 팽팽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하, 익숙한 얼굴이다 했더니, 이렐린의 꽃……. 하, 이건 꽃에 난 가시가 아니라 똥통에 처박힌 꽃이네.”

미소를 잃은 미카엘은 어마어마한 독설을 퍼부었다. 이번엔 아스릴이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한 번도 남에게 못된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제게도 항상 기분 좋은 말을 남겨 주고 예쁘다 아름답다를 입에 달고 사는 남자였다.

아스테리아가 분노에 찬 소리를 내는 것마저 잊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말을 뇌까린 그는 급기야 아스릴의 어깨를 잡고 있는 아스테리아의 손목을 꽈악 잡았다.

“아, 아! 뭐, 뭐 하는 거야! 아프잖아!”

기어이 그녀가 아스릴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나서야 손목을 잡았던 손을 풀어 주었다.

“아픈 걸 아는 사람이 그렇게 세게 사람 어깨를 잡습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사람을 아프게 하기에 똑같이 돌려 드리겠습니다. 놀랐네요. 아픈 걸 아는 분이라는 게.”

다정하던 미소와 함께 다정하던 인격마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고삐가 풀려 폭주하는 것만 같은 그를 돌아보았다.

저 아스테리아를 꼼짝 못 하게 만들어 준 건 참 고마운데, 그가 이 이상 나쁜 말을 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아스릴은 아스테리아와 미카엘의 사이에 서서 우선 그의 시야를 차단했다. 불이라도 뿜을 듯이 이글거리던 미카엘의 눈동자가 아스릴을 보자마자 사르륵 가라앉았다.

바로 다시 웃지는 못했지만 날카로운 예기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미카엘, 거기까지 해요. 저런 사람을 위해 당신 입을 더럽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스릴은 차분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이 당했던 것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의 축적이라 화를 덜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것이 그냥 보아 넘길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독 화를 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아주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며칠 전, 레나드와 그녀의 가족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던 레나드가 어마어마하게 화를 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는 단번에 검을 뽑아 들고 내달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화를 냈었다.

그걸 보면서 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게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지금……! 사람 앞에 두고, 뭐라고? 똥통? 저런 사람?”

아스테리아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아스릴의 뒤통수를 움키었다.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잡힌 아스릴의 몸이 뒤로 확 젖혀졌다.

“아스릴!”

“말해! 말하라고!”

난데없고 말도 안 되는 난동을 이렇게 격하게 부리는 아스테리아가 어이가 없어서, 아스릴은 아픈 와중에도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미카엘이 다시 한번 정확하게 아스테리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아악, 아악, 하고 까마귀처럼 소리를 내지르는 것은 아스테리아였다.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는 바람에 아스테리아의 두 손이 겨우 아스릴의 머리를 놓았을 때였다.

미카엘이 거의 몸부림을 치는 아스테리아를 결박해 버리기 위해 휘청이는 사이, 아스릴은 머리를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 전하.”

그리고 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글거리고 있는 푸른 눈동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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