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째는 확실하게-57화 (57/106)

57화

데모트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다음 날 전해진 편지에는 아주 좋은 소식이 들어 있었다.

“곧이곧대로 전하면 그렇게 좋지 않은지도 모르겠는데…….”

데모트 백작은 편지를 들고 신전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하인이 가져다준 답장을 들고 있었다. 다시 들여다봐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직접 가면 알게 될 일이니, 말을 해 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기는 한데…….

“아빠, 부르셨어요?”

“어, 그래. 와서 앉거라.”

편지를 받아 읽고 나서 부인과 딸을 불러오도록 시켰기 때문에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딸의 기척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는 것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많이 울기도 했는지 얼굴이 부어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부인의 얼굴도 꽤나 지쳐 보였다.

“쯧쯧. 얼굴 꼴들이 그게 뭐야, 정말. 황태자가 그렇게나 잘났나.”

지금까지 아스테리아가 황태자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었으면서도 두 사람의 몰골을 보니 이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하아…….”

이제는 날카롭게 소리 지를 힘도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소파에 나란히 앉자 데모트는 손에 그 편지를 든 채로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상석에 자리를 잡으며 그 편지를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이게 뭐예요?”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백작 부인이었다. 자기가 어제 한 말이 혹시나 실현된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데모트가 아무 말이 없자 냉큼 편지를 집어 갔다. 아스테리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앉아 있는 가운데 부인이 소리를 내며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데모트 백작님, 말씀하신 대로 최근 황태자 전하께서 신전에 자주 들러 주십니다. 그간 신전에 관하여 제대로 알지 못했다면서 명예 신녀님에게 안내를 부……탁…….”

황태자가 신전에 자주 들른다는 부분에서 아스테리아의 눈이 번뜩 뜨이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명예 신녀님?”

분명 신전에서 나온 사람이 아스릴을 데려가겠다 했을 때 그 단어를 사용했었다. 귀족 영애들을 대상으로 이름만 신녀라고 달고 신전을 배우는 일종의 체험 같은 것이었다.

무슨 명예 신녀냐, 가문에 먹칠을 할 거다 했지만, 제 발로 그날 바로 나가 버린 둘째 딸이…… 분명 지금의 명예 신녀일 터였다.

“그거 아스릴이잖아요! 아스릴이 매번 황태자님과 같이 있다고?”

“그…… 명예 신녀라고만 돼 있지, 그게 아스릴인지는 모르는 거잖니?”

백작 부인이 애써 수습하려고 나섰지만 데모트는 그것을 거들어 줄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이렐린의 꽃이 매년 한 명뿐이듯 명예 신녀도 한 번에 한 명씩이었으니까.

“다음을 읽어 보아.”

“……어디까지 읽었지, 아, 명예 신녀님에게 안내를 부탁하셔서 거의 매일 신전에 오셔서 안팎을 둘러보고 가시고, 간혹 대신관님과도 말씀을 나누십니다. 정확하게 매일 오시는 것은 아니어서 확답을 드릴 수 없으나, 신전에 오시면 황태자 전하를 뵐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신전에 레나드 전하가…….”

아스테리아는 금방이라도 신전으로 가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은 얼굴로 편지의 내용을 곱씹었다. 그게 그녀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부분일 터였다.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집 안에만 박혀서 이러고 있느니 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 네 눈앞에 황태자를 데려다 놓지는 못해도 이 정도는 해 주어야지.”

“아빠아…….”

의도적으로 덧붙인 말에 아스테리아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미 나가기에 시간이 좀 늦었으니 내일 일찍 나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

이미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바로 나가 버릴 것 같아 그렇게 아스테리아를 진정시키는 것부터 했다. 그녀는 편지를 두 손으로 붙잡고 명예 신녀 부분에서 미간을 찌푸렸다가도 황태자라는 단어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 *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 대던 아스테리아와 그런 그녀의 까칠한 상태를 맞춰 주느라 피곤에 전 백작 부인은 신전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웬만한 덜컹거림에도 두 사람은 깨지 않았고, 웬만한 덜컹거림은 오히려 등을 어루만지는 듯이 더 깊은 잠을 유도하는 것 같았다.

“다 왔습니다. 신전 아래예요.”

두 사람을 깨우는 목소리에 먼저 눈을 뜬 것은 역시나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매무새를 정돈한 뒤 딸을 깨웠다.

“으음……. 벌써 신전이에요? 어머 어머! 내 얼굴! 머리!”

아스테리아는 잠에서 깨자마자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과 머리를 신경 쓰느라 바빴다. 얼굴도 크게 붓거나 하지 않았고 열심히 매만진 머리카락도 그대로였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 넌 그대로 예뻐. 괜찮아, 얘.”

백작 부인이 다독여 주고 나서야 아스테리아는 평정심을 찾고 기대감에 씰룩이려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황실 모임에 가기 전에는 레나드가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 그렇게도 고민했건만, 모임에서 로나르드를 만나고 위협을 느끼자 그런 건 아무런 신경도 쓰지 못했다.

오로지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는 제가 도와주지 않았던 것 때문에 화가 나서 그랬던 것이지, 아마 마주 보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그도 제대로 제 얼굴을 바라봐 줄 것이다.

로나르드가 이렇게나 미쳐 있는 미모인데, 그에게 먹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 그때 그것 때문이야…….”

아스테리아는 주문처럼 스스로에게 되뇌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아이고, 데모트 백작 부인, 데모트 영애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차에서 내리는 두 여인을 반겨 주는 것은 나이가 조금 있는 신관이었다. 그는 환한 웃음을 띤 채로 다다다 달려와 그들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아, 루키지.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백작 부인은 꽤 살갑게 그의 인사에 응했고, 아스테리아는 살짝 새초롬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아스테리아가 이렐린의 꽃이 되는 데에 많은 협력을 해 준 신관이었다. 데모트 백작의 부탁을 잘 들어주어서 이번에도 황태자에 대해 알아봐 주거나 두 사람의 안내를 맡아 준 듯했다.

“요즘 황태자 전하께서 자주 오시는 건 어떻게 아셨답니까? 최근까지 신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시더니 이제 슬슬 국정을 오래 붙잡고 계시다 보니 신전의 중요성을 깨달아 가시나 봅니다.”

루키지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속에서 캐낼 수 있는 정보들이 있기 때문에 백작 부인과 아스테리아는 안 그런 척 유심히 귀를 기울이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딱히 어디서 기다리라고 말을 하기가 애매해서……. 편지에도 썼듯이 그분은 항상 명예 신녀님과 함께 다니시니 그분에게로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명예 신녀라는 말이 나오자 아스테리아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 버렸다. 지금 그 얼굴을 보러 간다고? 나를 황태자에게 안내해 달라고 하면서?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한 번도 빠짐 없이 명예 신녀와 함께 다녔다면 제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똑똑똑.

신학생들의 건물로 들어와 죽 늘어선 문 중 하나를 노크했지만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점심시간도 되지 않은 오전. 방 안에 그녀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 여기는 없는 모양이군요. 아래로 내려가실까요?”

루키지는 난감한 얼굴로 그들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가는 동안에도 명예 신녀님에게는 별도로 주어지는 의무가 없어서 어디에 가든 그분의 마음이라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 저기, 명예 신녀님 어디서 본 적 없는가?”

루키지는 급기야 지나다니는 신학생들을 붙들고 그녀의 행방을 물어보고 다녔다.

“명예 신녀님이요? 아스릴 님께선 요즘에 신전 바깥 숲에 자주 나가시지 않나?”

“아, 맞아. 처음 며칠 동안 신전 내부를 전부 돌아보고 나서는 항상 신전 밖의 숲에서 이야기 나누셨던 거 같아.”

“지금 시간이면 수업을 듣고 계실지도 몰라요.”

학생들의 의견도 전부 제각각이었다.

“아…… 미리 그분께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다면 제가 전달을 드렸을 텐데.”

루키지는 난감하다는 듯이 백작 부인과 아스테리아를 바라보며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이해는 하지만 레나드를 찾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명예 신녀, 그것도 아스테리아의 그림자일 뿐이었던 아스릴을 이렇게 헤매듯 찾아 다녀야 한다니 그것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와 명예 신녀는 굉장히 깊은 이야기를 나누시는가 봅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신다고요?”

아스테리아는 방금 또 아스릴이 황태자와 함께 신전 밖에서 종일 이야기를 나눈다는 대답을 해 준 신학생에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질문했다.

차분하게 대답해 주던 학생은 아름다운 아스테리아의 질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아! 이렐린의 꽃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아름다우시네요.”

그런 익숙한 칭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스테리아는 의례적인 인사마저 잊고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스릴 님과 황태자 전하야 뭐 유명한데요? 애초에 황태자 전하께서 신전에 관심 가졌다고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그게 다 아스릴 님 만나러 오기 위한 핑계라는 말이 있어요. 항상 그분과 함께 다니는 것만 봐도 그렇죠.”

아스테리아는 그녀의 천진한 말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제가 듣는 말이…… 대체 무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오히려 신뢰가 가고 말았다. 그리고 아스테리아의 가슴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0